'[ 전문체육 ]/체육사학'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2/02/14 축구의 역사와 계급투쟁
  2. 2012/02/08 올림픽에 숨은 통합정신과 차별의식 (1)
  3. 2012/02/07 포스터(Mary H. Foster) 작, 옛 북유럽의 신화(1901). 스키 사냥을 하는 여신
  4. 2012/01/31 축구심판의 무기소지 과정 : 옐로카드와 레드카드
  5. 2012/01/19 골프장에 모래 벙커가 있는 역사적 이유
  6. 2012/01/10 축구 용어의 역사학: 영국은 풋볼 미국은 사커 (2)
  7. 2012/01/06 야구가 올림픽에서 퇴출된 역사적 이유 (3)
  8. 2011/12/27 스포츠 진화론: 1800 그 이전과 이후
  9. 2011/12/05 야구단의 닉네임과 정체성, 자이언츠의 기원 (1)
  10. 2011/11/23 확대경에 비친 스포츠 문화의 생성변수 (1)
  11. 2011/10/26 골프의 역사: 셰퍼드 보이의 골프 창안설 (2)
  12. 2011/09/06 일제는 왜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았는가? (5)
  13. 2010/07/09 야구하는 여자, 안향미 (6)
  14. 2010/02/11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장은? (1)
  15. 2010/02/08 돌을 던지며 싸우는 놀이, 석전(石戰) (3)
  16. 2010/02/01 조선시대의 국궁문화
  17. 2009/10/20 올림픽 최초 우승자에게 수여한 상은 무엇일까? (6)
  18. 2009/10/13 잔인한 검투사 경기, 그 진실을 파헤져 보았더니 (11)
  19. 2009/10/07 귀족계급과 서민들의 신체문화 차이는? (7)
  20. 2009/10/03 일요일에 스포츠 참여는 형벌? : 잉글리시 선데이 (6)
  21. 2009/09/22 체육인과 조선시대 무인들의 공통점 (11)
  22. 2009/09/18 ‘공포의 외인구단’ 영욕(榮辱)의 삼미슈퍼스타즈 (18)
  23. 2009/09/15 왜 영국 학교는 스포츠 교육을 중시했을까? (10)
  24. 2009/09/02 동대문운동장, 콜로세움처럼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을까? (12)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인류 역사는 계급과 계층 만들기의 역사이다. 사회 계급은 상류계급과 중산계급, 하층계급 등으로 위계화 된다. 스포츠 문화도 사회계급이나 계층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스포트(sport)란 명사 자체가 귀족 계급의 사냥에서 유래된 말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스포츠맨(sportsman)이란 사냥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른 예도 있다. 테니스는 왕족과 귀족의 레저 문화로 성장해왔고, 골프, 폴로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축구(soccer)의 역사는 사뭇 차이가 있다.



중세 잉글랜드의 몹 풋볼 풍자화

축구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게임이다. 전 세계 수많은 인구가 축구문화에 심취해 있다. 중세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영국 축구의 진화 과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급적 투쟁과 지배, 통제, 저항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하층계급 문화로 계승되어져 왔던 중세의 풋볼(football)은 19세기 후반 중산계급 신사(gentleman)들에 의해 조직화된 스포츠, 축구(soccer)로 탄생했으나 그것은 다시 전형적인 노동계급(working class) 스포츠로 정착되었다. 축구를 하는 사회 계급의 요동, 즉 피칭(pitching)과 롤링(rolling)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참여했던 군중축구, 몹 풋볼(mob football)은 서민 문화로 성장해왔으나 계속 지배계급의 탄압을 받았다. 그것은 지배계급이 피 지배계급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한 방식이었다. 에드워드 2세가 풋볼 금지령을 내린 1314년부터 1876년까지 영국에서는 총 42회 차례의 풋볼 금지령이 떨어졌다. 천시 당했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 1564-1616)는 《리어왕(King Lear)》에서 “너, 이 추잡한 공차는 놈아(footballer)!”라는 대사를 남겼다. 풋볼은 궁술 훈련을 소홀히 하는 원인이 되며, 게임의 특성이 폭력적이며 비문명적이어서 무익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풋볼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풋볼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지배계급은 민중 계급의 놀이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나 천시 당해왔던 잉글랜드 민중의 투박한 공놀이, 몹 풋볼은 일련의 젠트리 계급에 의해 조직화된 게임, 축구(association football: soccer)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신사주의)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신사들이 축구계를 장악함으로써 축구는 완전한 신사 스포츠로 등장한다. 19세기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성장으로 서민 의 레저 문화였던 몹 풋볼이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 현 Independent School,사립)과 같은 중상류층 교육 체계로 유입되었고, 거기서 진화한 풋볼 문화는 케임브리지 룰 풋볼(Cambridge Rule Football)을 거쳐 1863년 지금의 축구로 탄생했다. 축구의 진화를 주도한 그룹은 명문학교 출신의 사회 엘리트들이었고, 그들은 추구한 것이 신사주의, 아마추어리즘이었다. 엘리트들은 강한 계급적 배타성을 보이며, FA를 장악했다. 하층계급을 멀리하며 그들만의 축구 클럽을 창립하고, 그들만의 경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민의 투박한 놀이에서 신사 계급 레저 문화로 재탄생한 근대 축구는 다시 노동계급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근대 축구가 탄생한지 약 10년 동안 축구인(footballer)은 신사계급 엘리트를 의미했다. 그러나 골프, 테니스 등과는 달리 축구는 1880년대부터 완전한 노동계급 스포츠로 정착되어버렸다. 흥미진진한 축구의 특성, 공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구의 경제성이 축구가 대중적 확산을 이룬 열쇠였지만 “합리적인 레크리에이션 정책,” “교회의 역할,” “노동계급의 레저 투쟁” 등이 노동계급의 축구 사회화 배경이었다. 정부와 사회단체가 건전한 여가 문화 도입을 위해 축구를 장려했고,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자 교회도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축구 클럽을 만들었으며, 노동자연맹도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여가 시간 확보를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결과로 축구는 신사 스포츠에서 노동자 스포츠로 급속히 변했던 것이다.

1872년부터 시작된 FA컵의 결승에 진출한 것은 주로 명문 중등학교나 명문대학 출신으로 구성된 축구팀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조금지난 1883년 노동계급 출신들로 구성된 블랙번 올림픽스(Blackburn Olympics)가 신사 축구팀들을 누르고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축구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신사들은 아마추어를 고수했던 반면 노동자들은 프로페셔널리즘을 수용하며 축구를 통해 돈을 벌고자 했다. 그러한 생각은 곧 프로페셔널 풋볼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1888년 프로들이 뛰는 풋볼 리그(Football League)의 출현과 함께 축구는 노동계급 스포츠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축구가 노동계급 스포츠로 정착된 것은 아마추어, 신사들에 대한 전문노동자 프로페서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축구의 계급투쟁은 계속된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축구가 노동계급 스포츠로 정착되었지만 노동계급 축구에 대한 계급적 지배는 막을 내리지 않았다. FA를 장악한 신사, 프로 리그와 클럽을 장악한 부르주아들은 서로 결탁하여 축구 선수들을 관리하기 위한 지배와 감시 체계를 구축했다. 축구의 프로화 이후 선수들에 대한 지배와 통제 방식은 임금상한제와 트레이드 제도였다. 선수들도 선수조합을 결성했지만 1910년대까지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고, 선수는 임금노예에 가까웠다. 사회 계급적 지배와 종속의 관계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축구는 그 뿌리가 서민 사회에 있었으나 지배계급의 금지, 탄압, 통제를 받아왔던 스포츠였다. 근대 축구를 창안한 이후 축구를 그들만의 문화로 인식하였던 신사계급은 축구장에서의 주도권은 서민 노동자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지만 통제권은 계속 놓지 않았다. 근대 이전 지배계급의 축구 금지령과 그에 맞선 서민의 참여, 신사 계급의 축구 창안을 통한 지배력 강화와 노동계급의 저항, 축구 프로화에 대한 신사계급의 배타적인 자세와 노동계급의 프로화 수용,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념적 대립, FA나 축구클럽 구단주의 선수에 대한 감시와 이동의 통제에 맞선 노동계급의 선수조합의 결성 등은 사회 계급적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축구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으며, 지금도 계급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 참고문헌
John Aroltt, The Oxford Companion to Sports & Games,
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75), p. 335.
Olive M. Geddes, A swing through time: golf in Scotland 1457-1743 (Edinburgh: HMSO, 1992)
.
알프레드 바알(Alfred Wahl)/지현 (), 축구의 역사, 서울: 시공사
, (2005), pp. 13-14.
E. Dunning, “The Development of Modern Football,” in E. Dunning (ed.) The Sociology of sport : A Selection of Reading. London: Frank Cass. (1970), p. 133-51; Tony Mason, Association football and English Society 1863-1915,
Sussex: The Harvester Press, (1980), p. 11.
T. S. Ashton, An Economic History of England: Eighteenth Century, London: Methuen, (1959), p. 217; W. Vamplew, Pay Up and Play the Game: professional sport in Britain 1875-1914,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p. 52.
하남길, 영국 신사 스포츠와 제국주의, 서울: 21세기교육사, (1996), p. 83.
 http://en.wikipedia.org/wiki/Blackburn_Olympic_F.C. 2011. 05. 10.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2012년은 런던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다. 전 세계가 떠들썩해질 것이다. 올림픽을 생각하면 “운동경기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누가 언제부터 춤을 추었는지를 찾아내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운동경기의 역사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통해 추정되어 왔다. 기원전 900-700년경에 전차경주, 권투, 레슬링, 달리기, 도약, 투원반, 투창, 궁술 등과 같은 경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운동경기는 동료 전사(戰士)가 전사했을 때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개최된  장례경기(Funeral Games)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한 전통은 그리스 사회문화로 정착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제우스를 향한 제례 경기였던 올림피아제였고, 그것이 계승된 것이 오늘날의 올림픽이다. 그런데 올림픽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통합 정신과 차별 의식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고대 올림픽은 통합과 평화의 개념을 담고 있다. 그것은 ‘성스러운 휴전에 관한 조약’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올림픽 정전(Olympic Truce)’은 당시 내전 상태에 있던 각 도시국가(polis) 사이의 평화와 통합을 의미했다. 올림피아제가 개최되면 전쟁도 중지했다. 고대 올림픽의 상징적인 의미는 근대 올림픽의 부활과 함께 계승되어졌다. 스포츠를 통한 국제사회의 평화․친선․우호의 이념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고대 올림픽에는 운동만 잘 한다고 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그리스 혈통의 남자로서 정치․종교적인 형벌을 받은 적이 없는 깨끗한 자여야만 했고, 엘리스의 역원(役員)이 덕(德)․체(體)․지(智)를 겸비한 자라고 인정한 남자에게만 출전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선수로 뽑히면 10개월 이상 김나지움(학원)에서 훈련을 받고 엘리스에서 올림피아까지 행군하며 경기 중 부정․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제우스 신 앞에 맹세하는 의식을 거쳤다. 이러한 내용은 고대 올림픽 출전자는 상류층 귀족이었음을 뜻한다. 근대 올림픽도 긴 세월 동안 힘과 기량만 보고 무조건 출전자격을 준 것이 아니었다. 상류층인 아마추어만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추어란 말은 상류계층을 뜻하는 계급적인 용어였고, 아마추어리즘 규정은 노동계급 참여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2년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부터 아마추어 규정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올림픽의 아마추어 규정이란 순수하게 취미로 스포츠에 참가하는 상류층 양반들을 위한 규정이었다. 제5회 스톡홀름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 수영선수 보이레파이레(F. Beaurepaire)는 수영지도자 생활을 한 경력으로 인해 올림픽 출전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인디언 혈통의 소프(J.F. Thorpe)는 스톡홀름 올림픽 5종과 10종 경기에서 2개의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1913년 월스터텔레그램(Worcester Telegram)의 기자 존슨이 소프가 올림픽에 참가하기 이전에 세미프로 야구팀에서 돈을 번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미국올림픽위원회는 소프의 금메달 2개를 IOC에 반환했다. 같은 종목도 아니었지만 스포츠 노동자는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포츠의 상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골프, 테니스, 축구 스타들이 올림픽을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나자 IOC에서 아마추어 규정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결국 IOC는 1974년 올림픽 헌장에서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이러한 역사는 고대 올림픽이나 근대 올림픽이나 계급적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의 올림픽은 체력과 스피드, 기술만 두루 갖춘다면 인종, 종교, 사회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나 출전할 수 있다. 고대 올림픽처럼 덕, 지, 체의 겸비를 요구하지도 않거니와 출신계급,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별도 사라졌다.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오직 체력과 기량만으로 승부하는 올림픽이 되고만 점이다. 늘 외국에 가 있던 선수가 자연스럽게 고등학교와 대학의 졸업장을 받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고 알랑거리는 영웅이 많아지고 있다. 런던 올림픽에도 운동기계와 같은 선수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다. 그들도 갈채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하지만 덕, 체, 지를 겸비한 좀 더 아름답고, 우아한 선수들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hng5713@gnu.ac.kr)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지리, 학적 환경 속에서 생계나 생존을 위해 생성된 신체 활동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정치사회적 구조와 이념이었다. 정치의 형태나 정치인의 성향에 따라 스포츠 문화는 시들기도 하고, 개화하기도 했다. 예컨대 로마의 검투사 경기는 전제 군주가 귀족집단의 정치적 무관심을 촉진하기 위해 빵과 함께 제공한 서커스의 일부로 발달된 관중 스포츠 문화였다. 중세 봉건사회의 스포츠 문화도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정교일치(政敎一致) 시대에서 쾌락적인 놀이 문화는 금욕적 생활을 요구한 정치와 종교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고, 다만 지배계급이었던 기사(騎士) 집단의 토너먼트나 쥬스트와 같은 마상경기가 대표적인 운동경기였다. 잉글랜드 튜더 왕가에서 왕들의 스포츠 애호전통으로 인해 론 테니스(lawn tennis)의 전신인 레알 테니스(Real tennis)가 발달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근대 스포츠의 발달과정에서도 사회적 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골 서민 계급이 도시로 이동했고, 그들은 무역이나 상업으로 돈을 벌어 신흥 중산계급으로 등장했다. 그들도 신사계급처럼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민의 놀이 문화가 중산계급의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스며들어 하나의 스포츠로 체계화되었다. 축구의 진화과정은 사회계급 구조의 변화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수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천시했던 서민의 군중 축구(mob football)가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던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로 유입되어 럭비 스쿨에서 럭비풋볼(rugby football),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오늘날 사커(soccer)의 전신인 케임브리지 룰 풋볼(Cambridge rule football)로 탄생했다. 농구와 배구의 출현은 의식의 변화도 새로운 스포츠 문화의 생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신교도는 일요일에 스포츠 활동을 금하는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 전통을 지켜 왔으나 19세기 말 미국 YMCA가 이러한 전통을 깨고 영국의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일요일에도 운동경기를 즐기는 애슬레틱 선데이(Athletic Sunday) 전통을 세웠다. 미국 YMCA가 농구와 배구를 창안한 것은 이러한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
.

세상의 모든 사물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 스포츠맨은 스포츠의 역사를 확대해서 볼 수도 있어야 하고 축소해서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시선의 초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맞추어 볼 줄 알면 더욱 좋다. 스포츠의 의미 파악과 보는 즐거움이 한 층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각종 스포츠 종목의 역사를 현미경으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나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없다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스포츠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 문화사의 큰 흐름을 확대경으로 비추어보면 뚜렷이 잡히는 생성과 진화의 변수는 인간의 생계와 생존, 지리생태학적 환경, 정치사회적 구조와 의식의 변화 등이다.(hng5713@gnu.ac.kr)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경고와 퇴장을 의미하는 심판의 무기


스포츠의 종류는 다양하다
. 검도처럼 장비로 상대를 가격하는 스포츠도 있고, 태권도, 레슬링처럼 몸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유형도 있다. 이러한 스포츠를 격투 스포츠(combat sports)라고 한다. 테니스나 배드민턴처럼 네트가 공간을 갈라놓아 신체적 접촉이 없는 스포츠도 있다. 네트를 상징하는 N형 스포츠라 칭하기도 한다. 가장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아이스하키나 럭비 등일 것이다. 경쟁 스포츠(competitive sports)에 속하는 이러한 볼 게임에서 정당한 몸싸움은 반칙이 아니다. 농구나 축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경쟁이 벌어지면 선수들은 심판의 눈을 피해 교묘한 몸싸움을 하게 되고, 실점 위기에 몰리면 팀의 승리를 위해서 의도적인 반칙도 서슴없이 자행한다. 축구도 그렇다. 초창기 영국 축구에 심판은 없었으나 축구가 진화하면서 심판이 등장했다. 그러나 심판은 지금의 부심처럼 경기장 밖에 위치했다. 그러다가 축구가 더욱 격렬한 게임으로 변모하자 주심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필드의 재판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악성 파울 플레이가 더욱 늘어나자 심판은 무기까지 소지하게 되었다. 그것이 옐로카드(yellow card)와 레드카드(Red card)이다.

노랑, 빨강색 카드가 심판의 무기가 된 것은 교통신호등을 본 한 축구심판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심판으로서 악성 반칙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고민하던 잉글랜드의 켄 애스턴(Kenneth George "Ken" Aston, 19152001)은 켄싱턴가(Kensington High Street)로 차를 타고 가던 중 교통 신호등을 보고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생각해냈다. 1936년 심판 자격을 갖춘 그는 장교로 병역을 마친 후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엘로카드나 레드카드 외에도 그는 축구 심판법의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1946년 권위를 상징하는 검정유니폼을 생각해낸 것도 그였으며, 각 팀을 상징하는 페넌트(pennants)를 보고 삼각형 선심기를 착안해 낸 것 또한 그였다. 애스턴은 1949/50년 시즌 풋볼 리그 선심을 시작으로 1960년 유로피언 네이션스 컵 결승, 1963FA컵 결승 심판 등의 심판을 맡은 경력의 소유자였다. “산티아고의 전쟁(Battle of Santiago)으로 불린 1962년 칠레와 이탈리아의 월드컵 경기 심판을 맡으며 유명해진 그는 1966, 1970, 1974월드컵 FIFA심판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에 옐로카드와 레드카드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

두 장의 카드가 심판의 무기로 등장한 직접적인 계기는 1966년 월드컵이었다. 당시 펠레는 다른 나라 선수들의 거침없는 반칙에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특히 불가리아 전과 포르투갈 전에서 펠레는 동네북이었다. 수비수들은 공보다 펠레를 따라다녔다. 펠레가 공을 소유하지 않은 순간에도 수비수들은 심판의 눈을 피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이 대회에서 악성 반칙이 끝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심판위원회는 그 다음 대회부터 심판 호주머니에 노랑과 빨강색 카드를 넣고 들어가도록 하였다
.

국제적 경쟁이 가열되자 축구는 전쟁이 되었고, 반칙은 하나의 전술이 되었다. 월드컵이 열리면 국가주의란 이데올로기에 찌든 축구선수들은 전사가 되고, 팀을 위해서라면 레드카드를 받는 일도 불사한다. 틈만 나면 상대 공격수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이고 교묘한 반칙은 습관적인 행위가 되고, 반칙을 이끌어내는 것도 기술로 취급된다. 같이 흥분한 중계방송 캐스터는 자국 선수가 영리한 플레이를 한다며 너스레까지 떤다. 상대 팀을 향한 욕설, 신경을 자극하는 언어, 비언어적 폭력, 의도적 파울 등은 모두 전술이 되어버린 게 현실이다. 전설적인 미식축구 감독 롬바르디가 반칙은 작전의 일부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오직 승리뿐이어야 하는 치열한 현대 축구에서 축구공과 무관한 악성 반칙의 제거는 심판위원회의 큰 과제였다. 1970 FIFA 월드컵부터 예로카드와 레드카드가 공식적으로 등장했으며, 1982년부터 두 장의 카드 소지는 심판의 의무 사항이 되었다
.

우연히 떠오른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꾼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히 떠오른 아이디어도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삶을 산 사람, 절실한 마음으로 뭔가를 갈구한 사람에게 떠오를 것이다. 켄 애스턴은 축구의 반칙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자신의 일에 몰입한 까닭에 교통신호등을 보는 순간 옐로카드와 레드카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교통신호등에서 따온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는 심판의 필수적인 무기가 되었으며,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는 축구 경기장의 교통신호등이 되었다
.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플로리다의 리유니언 리조트 클럽의 골프코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각종 스포츠의 명칭이나 용어에는 창안지나 자연환경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배드민턴(Badminton)이란 창안자 뷰포트(Beaufort)공작가문의 영지(領地) 명칭이다. 럭비풋볼(Rugby Football)의 럭비는 영국의 중등학교 이름이다. 육상 3,000SC(장애물경기)의 SC는 스티플체이스(steeple chase)의 약자로 옥스퍼드 대학의 종탑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1810년 베드포드(Bedford)에서 경마 장애물 트랙 경주(steeplechase)가 열렸다.  그런 모습의 경기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탄생했다. 학생들이 들판에서 종탑이 있는 대학본부까지 달리기를 했던 것에서 유래한 육상 경기의 하나가 3000m 장애물 경기인 것이다. 이러한 예와 마찬가지로 골프에도 지리적 환경과 연계된 역사성 있는 용어가 더러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링크스(links)와 벙커(Bunker)이며, 산지에 건설된 골프장에서도 볼 수 있는 모래 벙커는 골프가 탄생한 자연 환경적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골프장을 링커스라고 한다. 링크(link)란 ‘고리, 연결부, 연동장치’를 뜻하는 명사이다. 동사로는 ‘잇다’라는 뜻이다. 축구의 미드필더를 링커(linker)라고 한다. 그런데 해안의 ‘모래펄’이라는 의미의 링크스(links)는 골프코스(golf course)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link는 AD 931년경 앵글로색슨어 'hlinc'에서 온 단어이며, 훗날 그라시 에어리어(grassy area)란 뜻으로 사용되다가 골프코스를 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링크스(links)가 골프장이란 명칭이 된 것은 초창기 스코틀랜드의 골프가 해안과 육지를 연결해주는 중간지대, 링크스랜드(linksland)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백과에는 골프를 “링크스로 불리는 옥외 코스에서 특수하게 제작된 클럽으로 작은 볼을 치는 게임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링크스랜드는 바다와 농경지, 바다와 산을 이어주는 쓸모없는 모래 퇴적지대였다. 골프가 링크스랜드에서 시작된 이유는 모래땅은 습기를 계속 머금고 있지 않아 뿌리 깊은 나무나 잡초가 잘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스코틀랜드 전통 있는 92개(17%)의 골프장은 링크스 골프 코스(links golf course)이다.  그리고 영국의 ‘디 오픈(The Open: The British Open)’은 반드시 해안가의 골프코스에서만 개최된다. 이런 역사를 보면 골프장에 벙커(Bunker)가 있는 이유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골프가 탄생할 당시의 링크스랜드 자체가 모래펄이었고, 거기에는 모래 구덩이가 엄청 많았을 것이다. 벙커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뜻은 배의 연료 창고이며, 군사 용어로 지하 엄폐호이다. 골프장에서는 모래함정 장애물이다. 스코틀랜드는 산지와 구릉이 대부분이고, 토양은 척박하다. 양질의 수자원에 위스키 산업이 발달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양을 치기에나 적당한 토양이다. 초창기 골프는 백야현상이 일어나는 긴 스코틀랜드의 여름 날 저녁 식사 후, 어부, 목수, 석공, 대장장이들이 즐겼을 터이고, 해안가의 사구(砂丘)나 분지로 된 링크스랜드는 골프의 최적지였을 것이다. 링크스는 모래 언덕, 덤불, 히스가 무성한 해안선이었고, 육지를 바다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양떼나 토끼가 겨우 먹이를 찾을 수 있는 거친 풀밭이었던 것이다. 링크스랜드가 스코틀랜드에 골프코스를 편리하게 제공해 준 셈이다.  

링커스랜드에는 벙커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골프를 시작한 전통으로 인해 지금도 산을 깎아 건설된 많은 골프장에도 하얗게 입을 벌린 모래 벙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벙커도 링크스와 같은 맥락에서 탄생된 모래 함정이며, 골프가 해안가에서 발달되었다는 초기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벙커가 많은 해안가 모래펄에서 골프가 시작된 역사적 전통적으로 인해 모래 벙커는 지금도 어느 골프장에나 남아 있다. 인간은 전통을 잘 지키는 동물이다.(
hng5713@gnu.ac.kr)

* 참고문헌
1) Stevens, Peter(2010). History of the National Hunt Chase 18602010, London: Peter Stevens Books. p. 103.
2)
Scottish Golf History, “Meaning of Links Golf Course”, http://www.scottishgolfhistory.net/links_golf.htm
3) Uschan, Michael V.(2001). Golf. San Diego: Lucent Books Inc. p. 12.
4) Graffis, Herb(1975). The PGA, New York : Thomas Y. Crowell Company. p. 10.
5) Scottish Golf History, “Meaning of Links Golf Course”, http://www.scottishgolfhistory.net/links_golf.htm
6) 허남양(2001). 골프학개론. 서울: 도서출판 무지개사. p. 120.
7) Uschan, Michael V.(2001). Golf. San Diego: Lucent Books Inc. p. 12.
8) Graffis, Herb(1975). The PGA, New York : Thomas Y. Crowell Company. p. 10.



* 사진출처 http://www.floridareunionresort.com/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세계적인 스포츠의 명칭이나 용어에는 흥미로운 역사가 담겨있다. 예를 들면 배구가 처음 창안되었을 때 처음으로 붙여진 명칭은 민토네트(Mintonette: Minonette)였다. 초기 배구가 인도의 민턴게임(Minton Game)과 유사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훗날 배구 창안 시연회에서 스프링필드 YMCA의 홀스테드박사(Dr. Alfred Halsted)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치는 것은 발리(volley)이므로 명칭을 '발리 볼(volley ball)'로 하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발리볼(volleyball)로 되었다. 농구(basketball)는 농구 창안자 네이스미스가 스프링필드 YMCA 홀(hall) 관리인에게 나무 상자를 부탁했지만 복숭아 바구니(basket)밖에 없어 그것을 전했기 때문에 바구니에 공을 던져 넣는 게임을 하게 되어 바스켓볼(basketball)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축구란 의미의 사커(soccer)란 용어의 탄생과정도 흥미롭다.

풋볼(football)이란 명칭은 중세 군중 축구(mob football)에서 나온 말이다. 긴 세월 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그러한 군중축구는 19세기 럭비리그 풋볼(Rugby league football), 럭비유니언 풋볼(Rugby union football), 어소시에이션 풋볼(Association football) 등으로 분화되었다. 그 외에도 미국의 아메리칸 풋볼(American football), 호주의 오스트랄리언 풋볼(Australian rules football), 캐나다의 캐나디언 풋볼(Canadian football), 갤릭 풋볼(Gaelic football) 등으로 분화되었다. 종목이 다양해지다가 보니 엄격히 구분하여 칭해야 함이 옳겠지만 영국은 우리가 말하는 축구를 그냥 풋볼(football)이라고 칭해왔고, 올림픽에서도 공식적인 명칭으로 풋볼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하여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일본, 한국 등에서 영어로 표현할 때는 풋볼(football)이 아닌 사커(soccer)라는 명칭을 쓰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은 미국 중심의 영어 표현을 하고, 영국은 영국 중심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는 다른 종목에서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영국오픈골프대회를 자존심을 내세워 그냥 "디 오픈(The Open)"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 영어권에서는 이 대회를 "브리티시 오픈(British Open)"이라고 표기 한다. 미국 메이저리그가 자국의 챔피언십 매치인데도 불구하고 "월드 시리즈(world Series)"라는 명칭을 쓰는 것과 같다.

사커(soccer)라는 명칭은 1863년 잉글랜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가 창설된 이후 럭비풋볼(rugby football)과 구분하기 어소세이션 풋볼(Association Football)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발음하기에 너무 길었고, 잉글랜드의 학생들은 '아침식사(Breakfast)'를 '브레커스(brekkers)'라고 하듯이 했듯이 '럭비풋볼(Rugby Football)'을 러거(rugger)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을 '어소커(Assoc)'라는 단축형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소커(soc)'라는 약어로 사용한 것이 발음상 자연스럽게 'er'이 붙여져 '사커(soccer)'란 속어가 생겨났던 것이다.

공식 용어로 축구를 사커(soccer)로 표기하는 나라는 자국 방식의 축구가 있는 미국, 호주 등이며, 우리나라나 일본이 축구를 영어로 표기할 때 풋볼이라기보다 사커라고 하게 된 것은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hng5713@gnu.ac.kr)

 

ⓒ 스포츠둥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야구는 미국의 국민적 게임이지만 한국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대회를 끝으로 야구는 올림픽에서 퇴출되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지금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우리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야구가 올림픽에서 퇴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이유는 야구를 하는 나라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조상이 같은 두 종류의 스포츠가 문화적 충돌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각종 놀이를 조직화하여 근대적인 스포츠로 바꾸어 놓았고, 그러한 스포츠는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북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의 경마, 골프, 테니스, 크리켓 등이 북미 상류층의 주된 레저 문화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영국적 전통을 깨고 새로운 버전의 스포츠 문화를 창달했다. 농구와 배구를 창안했으며, 럭비와 하키는 북미식 버전의 미식축구와 아이스하키로, 크리켓의 조상인 라운더스(rounders)는 야구로 태어났다. 이러한 문화 재생산 과정에서 영국의 럭비나 크리켓은 미식축구와 야구의 발달로 인해 미국 땅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가 야구도, 크리켓도 올림픽에서 퇴출되는 역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영국에는 15세기부터 다양한 형태의 볼 게임이 존재했다. 테니스, 셔틀콕, 하키, 볼링 등과 유사한 놀이 문화가 존재했고, 스툴볼(stool-ball), 라운더스(rounders)의 조상으로 크리켓 경기가 일반화되자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1760년대 햄프셔 햄블던(Hambldon)에는 크리켓 클럽이 생겨났다. 크리켓은 피치로 불리는 운동장에 두 개의 삼주문이 스툴볼의 표적 판 역할을 했다. 오늘날 배트맨으로 불리는 타자는 피치(pitch)의 한 쪽 끝에 서서 삼주문을 방어하는 반면, 보울러로 불리는 투수는 맞은편에서 공을 던져 타자 뒤에 있는 삼주문을 무너뜨림으로서 타자를 아웃시키는 경기였다. 1787년 런던 로즈구장(Lord's ground)에 MCC(Marylebone Cricket Club)가 창립된 이래 크리켓은 가장 역사가 깊은 근대 스포츠로 등장했고, 영연방권에서 '스포츠의 여왕(queen of sport)'으로 불리게 되었다. 크리켓이 북미에 전해진 것은 18세기였다. 1751년에 아메리카 식민지 대표 11명과 런던 대표 11명이 경기를 했고, 식민지 팀이 이겼다. 그것이 아메리카 스포츠 역사 최초의 국제 시합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야구 문화가 성장하면서 미국 땅의 크리켓 문화는 점차 시들기 시작했다. 크리켓이 야구에 밀려버린 것이다.

 라운더스의 조상이 스툴볼이었다면 크리켓과 라운더스는 형제인 셈이고, 야구의 기원이 라운더스에 있다면 크리켓과 야구는 혈통이 같은 셈이다. 라운더스는 미국 뉴잉글랜드로 전해진 이후 두 종류의 게임으로 변천되다가 근대 야구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켓과 유사한 버전의 야구가 발달되면서 미국 땅에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크리켓도 한 때 올림픽 종목이었고, 야구도 올림픽 종목이었으나 두 종목이 모두 퇴출되었다. 영국 식민지였거나 영연방 권에서는 지금도 야구는 하지 않거나 인기가 없는 스포츠이고 크리켓에는 구름관중이 몰린다. 반면 미국의 문화 식민지 권에서는 크리켓은 잘 모르고 야구에 흥분한다. 두 종목 모두 세계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야구가 크리켓의 확산을 방해하고, 크리켓은 야구의 확산을 방해하는 동질적 스포츠의 문화적 충돌 현상 때문이다. 두 스포츠가 축구처럼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지 못하고 올림픽에서 퇴출된 것은 역사적 숙명이다.(hng5713@gnu.ac.kr)

 

* 참고 문헌
하남길, 체육사 신론 (진주: 경상대학교출판부, 2010), p. 170.
David G. McComb, Sports in World History (New York & London : Routledge , 2004), p. 37.
Charles Blancke, "Cricket in America," Harper's Weekly, XXXV(September 26, 1891), p. 725.

ⓒ 스포츠둥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하남길(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의 스포츠는 옛 모습이 아니다. 19세기 각종 스포츠가 조직화되기 이전의 모습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 고대 그리스의 운동경기는 음악, , 연극 등과 함께 신화 속에 담긴 제례나 축제 행사의 일부였다. 중세의 축구는 야성이 넘치는 서민 군중이 제대로 된 규칙도 없이 공을 두고 벌이던 패싸움에 가까운 게임이었고, 15세기부터 발달된 레알 테니스(Real Tennis)는 시종이 던져 준 공을 왕이나 귀족들이 벽면이 사이드라인을 대신하는 코트에서 하던 조잡한 실내 게임(court games)이었다. 배드민턴은 제기차기에 가까운 손으로 셔틀콕을 치는 놀이에서 진화했다. 역사를 100-20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현재의 스포츠는 매우 단순한 서민 유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놀이는 끊임없는 문화적 진화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스포츠로 탄생된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 문화적으로 끊임없이 진화한다. 다윈(C. Darwin)종의 기원(1859)이 출판된 이래 자연인류학이 발달되었고, 이어 문화 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이 등장하여 인간의 진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문화적 진화는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지만 신체 문화 또한 끊임없이 변천되어 왔고, 그 진화의 동력은 인간 에너지의 양과 에너지를 작동시킬 수 있는 발달된 놀이 도구였다. 그것은 곧 여가 시간의 량과 운동기구의 발달을 의미한다. 토너먼트(마상경기), 승마, 골프, 테니스 등과 같은 스포츠는 여가 시간이 많고, 값비싼 용구를 구입할 수 있었던 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9C말부터 일어난 산업의 발달, 노동시간의 감소, 인구의 증가, 도시화, 교통의 발달, 생활 패턴의 변화, 계급구조의 변화, 각종 기구의 발달 등 다양한 에너지 원천과 환경의 변화로 1800년 이전의 스포츠와 이후의 스포츠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다.

근대 이전과 근대 스포츠의 차이는 아덴만(M. Adelman)이란 학자의 주장을 보면 명백해진다. 스포츠의 유현은 조직화, 규칙, 경쟁, 역할차이, 공공정보, 기록과 통계 등 6가지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근대 스포츠는 그 이전과 달리 조직화되었다. 각종목별 통괄단체와 같은 관료조직이 탄생하여 특정 스포츠를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관리하게 됨으로써 스포츠는 제도화된 문화가 되었다. 규칙은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개정되어 성문화되었다. 고을에서 1등을 하면 그만이던 운동경기는 단순히 지역 경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 국제적 경쟁이 되었다. 누구나 선수도 되고 관중도 되었던 놀이 수준의 게임과 달리 전문 선수와 관중이 등장하여 스포츠 참여자의 역할이 뚜렷이 구분되어졌다.

한 동네에서만 알았던 경기 결과는 매스컴의 발달로 전국적으로 알려졌으며, 경기 결과는 기록으로 남아 통계적으로 정리되었다. 1800년 이전의 스포츠와 이후의 스포츠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스포츠의 문화적 진화의 결과였다. 앞으로 100, 200년 후 현재의 스포츠는 어떻게 진화된 모습으로 남아있게 될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고 스포츠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사 인식이 있는 스포츠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1-1. 아델만의 전근대 스포츠와 근대 스포츠 유형의 차이

구 분

근대 이전의 스포츠

(Premodern sport)

근대 스포츠

(Modern Sport)

1. 조직화

(Organization)

일시적이고, 비형식화 된 수준

간접적인 개인 간의 경쟁.

지속적이고 형식화된 수준.

지방, 지역, 국가적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제도화된 수준.

2. 규칙

(Rules)

지역의 관습이나 전통에 기초를 두고 단순하며, 성문화되지 않음.

형식화, 표준화, 성문화됨.

조직적인 수단에 의해 제한되고 합리적이고, 진보적으로 운용.

3.경쟁

(Competition)

단지 지방 수준의 경쟁에 머무르며, 전국적 명성을 얻을 기회 없음.

전국적, 국제적 수준의 경쟁이 이루어지며, 국가적 국제적 명성을 얻을 기회가 주어짐.

4. 역할 차이

(Role differentiation)

참여자의 역할 차이가 낮음.

플레이하는 것과 구경하는 것이 뚜렷이 구별되지 않음.

전문가(프로선수)가 출현하고 선수와 관중이 뚜렷이 구별됨.

5. 공공 정보

(Public Information)

제한적, 지역적, 구술 정보만 존재.

전국적인 스포츠 신문뿐만 아니라 지역 신문, 스포츠 전문잡지 등에 의해 정기적으로 보도.

6. 통계와 기록

(Statistics and Record)

없음

기록의 보존 및 출판

출처(Source) : M. Adelman, A Sporting Time.



※ 참고문헌

趙完圭, 文化人類學槪論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p. 416
delman, A Sporting Time: New York City and the Rise of Modern Athletics, 182070 (Urbana, . :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6), p. 6
Mechikoff and Steven G. Estes, A History and Philosophy of Sport and Physical Education (New York : McGraw-Hill Co. 2002), p. 7.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야구는 영국산 놀이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미국에서 조직화되었고,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적인 운동경기(National Games)이다. 미국에 4개의 프로야구팀이 협회를 창립한 것은 1871년이었다.
프로야구의 역사가 140년이나 되는 셈이다. 그런데 대한민국도 야구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것은 1982년이다. 약 30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중 600만 시대를 맞았다. 한국 스포츠 사상 유례가 없는 기록이다. 미국의 메이저리그를 따라잡기는 어려운 실정이나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한국 야구 중계방송을 시청하다가 보면 도대체 한국 야구팀의 명칭은 정체성이라는 게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꼭 다른 나라 팀의 이름을 따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야구팀에는 자이언츠
, 트윈스, 타이거즈 등과 같은 닉네임이 붙어 있고, 그 닉네임 앞에는 대기업 명칭이 붙어있다. 지역 명칭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기업 명칭이 있는 것도 눈에 거슬리지만 도대체 자이언트나 트윈스, 타이거즈란 외국 야구팀 명칭을 꼭 따라야만 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의 명칭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역사와 전통, 상징성이 응축된 닉네임의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뉴욕자이언츠 시대의 헬멧

미국 야구팀 시카고 컵스(Cups)1902년 지역 언론이 사용한 명칭이 공식 명칭이 된 경우이다. 팀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젊은 신인선수를 대거 영입했고, 그런 선수들을 언론이 유소년, 애송이라는 뜻의 컵스(Cubs)라는 명사로 표현함으로써 1907년부터 공식이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박찬호 선수가 뛰었던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우 멕시코를 국경으로 둔 지역의 순찰대(Rangers)가 유명했기에 붙여진 것이다. 지역 특성상 불법 이민자가 많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1823년 오스틴(Stephen F. Austin)이 준 군대 성격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텍사스의 자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김병현 선수가 뛰었던 애리조나의 다이아몬드백스(Diamondbacks)는 애리조나 사막지대의 방울뱀(rattlesnake) 무늬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방울뱀은 애리조나 사막지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무시무시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메이저 리그에는 유니폼이나 양말 색깔로 인해 붙여진 닉네임도 흔하다. 보스턴·시카고·신시내티·디트로이트 등은 양말 색깔을 나타내는 이름을 쓰고 있다. 초창기 브라운 스타킹스’ ‘화이트 스타킹스등과 같은 명칭은 양말 색깔을 상징한다. 팬과 언론들은 팀을 구분하기 위해 입은 선수들의 의류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결과였다. 보스턴 레드 삭스(Red Sox)는 초창기 아메리칸 리그의 레드 스타킹스의 줄임 말이다. 1869년 라이트 형제는 미국 첫 올 프로야구팀인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를 만들었으나 1870년 이후 새로운 구단주와의 마찰을 일으키며 신시내티를 떠나 보스턴에 둥지를 틀었다. 라이트 형제는 신시내티 시절 사용했던 야구단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었고, 그래서 레드삭스가 되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White Sox)의 이름은 지역 라이벌인 시카고 컵스(Cups)에서 유래했다. 1876년 시카고 컵스의 이전 명칭은 화이트 스타킹스였지만 1907년 팀 재건을 하며 컵스로 바꾸자 예전의 명칭을 그리워했던 시카고 팬들을 위해 1901년 생겨난 후발 연고팀이 예전 이름 화이트 삭스를 사용하게 되었다

                  자이언츠의 짐 머트리 (baseballhistorryblog.com)

자이언츠는 미국에도있고, 일본에도, 우리나라에도 있다.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 야구단의 명칭은 반이 기업 명칭이고, 반은 모방인 듯하다. 우리의 정체성을 살린 이름은 없었을까? 비록 야구가 미국 문화의 산물이고, 우리나라가 미국의 스포츠문화 식민지라고 할지라도 야구단의 명칭은 지역성과 전통성을 살린 정체성 있는 것이 되었으면 좋았을 터이다. 대기업도 야구로 기업광고에 득을 볼만큼 보았을 것이다. 이제 연고지 이름 다음에 정체성 있는 닉네임을 공모해보는 것도 팬을 위한 진정한 서비스가 아닐까? 절대로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어느 수업시간이나 난데없는 질문으로 선생을 난처하게 하는 학생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의 광범위한 스포츠 문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게 된 것일까요?” 한 마디로 답할 수 없는 의문문을 던져 놓고 첫 시간 토론 수업을 시작할 참이었다. 다양한 의견이 오갔고, 토론의 마무리를 할 찰나에 성급한 한 학생이 던진 말이다. “혼란스럽습니다. 스포츠의 기원은 방정식처럼 간결하게 정리될 수 없는 것입니까…?” 또렷이 쳐다보며 뱉어낸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다시 정리해서 설명해 달라는 요구에 가까웠다.
글쎄! 역사란 복합적인 것이어서 방정식처럼 풀어서 설명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전체를 확대경으로
바라보면 스포츠 문화의 생성 요인과 진화의 변수는 분명히 보인다.


                               암포라에 보이는 스타디온 경주


첫째, 스포츠 문화의 생성과 직결된 일차적 변수는 “생계와 생존”이다.
많은 스포츠 문화는 원시시대부터 의식주를 해결하거나 삶의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늘날의 육상, 체조, 수영, 스키, 각종 투기 등은 생계와 생존의 스포츠인 셈이다. 고대 그레코로만 스타일! 그리스와 로마 스타일의 스포츠를 보면 알 수 있다. 대개는 육상과 투기종목이다. 권투와 레슬링의 혼성형인 판크라티온(Pankration), 5종 경기를 뜻하는 펜타슬론(Penthathlon: 투원반, 멀리뛰기, 투창, 달리기, 레슬링), 전차경주, 수영 등이 대표적인 생계와 생존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육상과 수영은 필수적인 것이었고, 그 중 투창, 전차경주 등은 전투력 강화수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생존과 투쟁을 위해서는 강인함이 요구되었다.

팔레(Pale)가 생겨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팔레란 레슬링을 뜻한다. 그리스인들은 상처를 입지 않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길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아동의 교육 수단은 레슬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계승된 것이 ‘그레코로만형 레슬링(Greco-Roman style wrestling)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아이들이 자라면 일차적으로 보냈던 곳이 팔라에스트라(Palaestra: Palaistra)란 학교였다. 팔라에스트라는 레슬링 학교란 뜻이다. 생존을 위해 튼튼한 몸과 강인한 정신을 길러주기 이한 교육을 했던 것이다. 체조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인위적으로 창안된 움직임 체계로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처럼 “표현의 예술”로 진화하기 이전의 근대 체조는 구츠무츠(J. F. C Guts Muths)라는 한 범애학교 불어교사가 균형 있고, 강인한 청소년을 육성하기 위해서 창안했고, 
 그 체계는 19세기 국가주의라는 사상과 결혼식을 올리게 됨으로써 전 세계의 학교와 군대로 확산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진화한 것이다. 육상, 체조, 수영, 투기 등과 같은 스포츠 문화의 생성 변수는 생계와 생존에 대한 의지였다.

(K. 블랑차드 & A. T. 체스카/박기동 외 스포츠 인류학. 서울 : 동문선, (1985) 참조)


둘째, 스포츠 문화의 생성과 직결된 이차적 요인은 지리․생태학적 환경이다.
스포츠의 특성은 스포츠가 생성된 대륙의 지형, 기후, 인구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열대지방에서 동계 스포츠가 발달될 리가 없다. 스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알프스 지방에서 발달되었다는 것은 눈치가 빠르지 않은 사람도 추측할 수 있다. 노르딕 스키는 오늘날의 북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콜라 반도 등지의 동토(凍土)에 살았던 사미족(Sámi peoples)이 사냥이나 교통수단으로 삼았던 활동이었다. 훗날 군사적 기동작전에 이용되면서 근대 스포츠로 진화된 것이다. 다운 힐(down hill), 즉  알파인 스키는 알프스 지방의 겨울 레크리에이션이었다. 오리엔티어링은 스웨덴의 킬란더(Ernst Killander)가 스웨덴의 자연환경에 알맞은 신체활동 프로그램으로 창안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컬링은 더 추운 캐나다 북부로 전해져 각광을 받게 된 스포츠이다. 잉글랜드의 하키는 북미 대륙에서 아이스하키로 변환되었다. 실내 스포츠가 우기(雨期)가 긴 나라에서 발달된 것도 지리․생태학적 변수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테니스, 배드민턴 등은 비가 많은 영국에서 코트 게임(Court games)으로 발달되었다. 원래 코트(court)란 궁전이나 저택 등 큰 건축물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젖은 땅에서 테니스공은 튀어 오르지 않았다. 테니스를 했던 큰 건물이 테니스 코트였고, 그러한 역사로 인해 '코트(court)'는 오늘날 '경기장'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가 되었다. 조정(漕艇)이나 수영이 바다나 강이 있는 지역에서 발달되었을 것이란 추측은 틀릴 리가 없다. 많은 스포츠는 지리․생채학적 환경이 탄생의 변수가 되었다. 생계와 생존에 대한 의지였다.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전 세계 인류가 향유하고 있는 수많은 볼게임(ball games)은 대개 고대사회의 민속놀이에 기원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 근대 이전의 민속 스포츠는 순수하게 여가를 즐기는 놀이 그 자체였다. 표준화된 규칙도 없었다. 선수와 관중의 구분도 뚜렷하지 않았다. 모두가 어우러져 즐기는 순간, 누구나 선수가 될 수 있었고, 뛰다가 지치면 나무에라도 기대어 휴식을 취하며 관중으로 변했다. 삶을 위한 노동의 틈새에 존재했던 여가 문화이자 축제 문화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볼 게임(ball games)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예컨대 오늘날의 축구 모체는 중세 서민들의 집단적 유희였던 군중축구, 몹 풋볼(mob football)이었다. 그것이 케임브리지 풋볼이 되었고, 그게 더 진화한 것이 오늘날의 축구(soccer)이다. 하지만 계속 금지되어왔던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군중축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유형의 게임이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배트 앤드 볼(bat and ball) 게임에 속하는 골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양치기 소년(shepherd boy)의 게임이었다는 낭만적인 전설이 있을 뿐이다
.


                   존 발리(John Varley) . 생각에 잠긴 양치기 소년

1887년 출판된 《골프의 기원(The Origin of Golf)》에서는 골프의 출현 역사를 목가적인 분위기로 그려져 있다. “한 목동이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양을 지키던 중에 동글동글한 돌멩이를 발견하고 지팡이로 때렸다. …막대기로 굴린 돌이 토끼 굴(홀)로 들어갔다. 양치기는 자신이 한 짓을 보여주려 다른 친구를 큰 소리로 불렀다. ‘거참 쉽구먼!’하고 말했지만 그 친구는 다시 보여주려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스코틀랜드의 긴 여름날 양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목동은 심심했을 것이다. 우연히 작대기를 들고 구형 돌멩이를 치자 그것이 토끼 굴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흥미를 느낀 목동은 친구를 옆으로 부른 뒤, 내기를 했을 것이고, 그렇게 시작된 놀이가 다른 목동들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골프의 기원이었다고?골프 책마다 목동의 골프 전설은 등장한다. 어떤 책에는 둥근 돌멩이를 토끼 굴에 쳐 넣는데 성공한 후 환희를 맛본 목동이 많은 돌멩이를 주워 모아 놓고 토끼 굴에 넣는 노력을 계속하다가 자신만의 샷(shot)을 완성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Herbert Warren Wind, The Story of American Golf, New York : Alfred A. Knopf, (1975), p. 13.

 하지만 그게 언제란 말인가? 누구였단 말인가? 모든 이야기는 캄캄한 밤 구름 속의 별도 분명 빛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다를 바 없다.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골프가 자기네 스포츠라고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골프의 발상지는 네덜란드의 빙판이었을 수도 있고, 로마광장 근처의 어떤 길목이었을 수도 있다. 베이징이 내려다보이는 한 언덕의 중턱이었을지도 모른다. 《골프 스토리(The Story of Golf)》를 쓴 페퍼(G. Peper)는 아무도 처음 골프가 시작된 장소나 시점을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일이며, 분명한 것은 골프가 어떤 종류의 레크리에이션 게임보다도 인간을 사로잡는다는 것뿐이라고 했다누가 공차기를 먼저 했고, 누가 춤추기를 가장 먼저 했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일이 불필요한 짓이듯 골프도 역사도 그렇다.
양치기 소년의 게임이 골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인 전설일 뿐이다



※ 참고문헌

3) 자료 출처: http://www.1st-art-gallery.com/shepherd-16.html 2011. 10. 17.
4) Thomas P. Stewart (ed)., A Tribute to Golf: A Celebration in Art, Photography and Literature. Harbor Springs, MI: Stewart, Hunter and Associates, (1990), p. 78;  Michael V. Uschan, Golf. San Diego: Lucent Books, INC, (2001), p. 12.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 조준호(대림대학 사회체육과/ 교수)



인천체육의 성지 웃터골공설운동장(현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은 인천시민의 애국심발원지(發源地)였다. 그곳은 항상 인천시민들의 땀 냄새, 운동장의 흙냄새, 그리고 바닷가의 짠 냄새가 뒤섞여 인천특유의 냄새가 뿜어지는 가장 향토색이 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한·일간의 야구대결이 있을 때면 인천시민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가슴에 품고 그들과 함께 달렸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였지만 웃터골에서 만큼은 야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를 응원할 수 있어 뜨겁게 용솟음치는 애국심을 달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웃터골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기에 정확한 생성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천부민과 함께한 웃터골은 개항기 스포츠의 산실이었다. 그곳을 확장, 재 확장 하고 단어 앞에 공설(公設)이라는 단어만 붙여 어느 순간부터 웃터골은 인천의 공설운동장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그곳은 인천시민들보다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1905년의 인천인구는 일본인이 12,712, 한국인이 10,866, 중국인이 2,665, 구미인이 88명으로 한국인들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 인천살이는 살기는 좋아도 흥! 왜놈의 등살에 못살 곳이었다. 그곳으로 서양의 스포츠는 자연스레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림1.인천체육의 성지 웃터골운동장

본 고
()에서는 인천체육의 성지 웃터골운동장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살펴보고 또한 일제가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상기해보고자 한다
.


1.
웃터골 확장에 관한 기록의 오류
?

웃터골은 1920년 111, 2363평의 그라운드형태를 갖춘 공설운동장으로 확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 의하면 웃터골은 “19266월에 공사비 일만원을 들여 6450평으로 재 확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인천부사기록 때문일까? 인천역사 대부분의 서적에서는 웃터골 재확장의 시기를 19266월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927418일자매일신보에 의하면 “192610월부터 웃터골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금액 일만 삼천 오백 원의 공사비를 투입, 예정보다 1개월 연기되어 4월 말에 대망의 공사가 완공될 터라는 신문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신문 1927629일자에는 예정보다 공사가 3개월이 더 연장하야 본월 중에나 완공이라는 신문기사와 인천공설운동장의 확장공사는 낙성되었으므로 인천부에서는 710일경 낙성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시민대운동회를 개최키로 하였다는 기록(매일신보, 1927630)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웃터골이 6450평으로 재 확장된 정확한 시기는 1927630일이었고 시민들의 활용이 가능했던 시기는 1927710일이었다. 웃터골 재확장의 역사적 진실, 우리에게 알려진 시기와 약 1년여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2. 일제는 왜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아 갔는가?


웃터골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좋은 위치
, 우리민족의 정기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운동장 이상의 가치가 있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 그곳을 일제는 탐냈다.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이 다닐 인문계 학교가 없었다. 즉 일본인 자녀가 인문계를 다니려면 경인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제는 이를 이용했다. 일제는 웃터골을 빼앗아 그곳에 일본인의 자제들을 위한 인문계 학교를 세워 우리민족의 정기말살과 일본인의 실제적 교육을 위한 일석이조의 사업아이템을 구상했다. 일제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 내용은 동아일보신문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 할 수 있었다.

경기도 당국 경상비 일만 오천원 중 8천원 보조할 것을 비밀리에 승인하여 오는 4
1
일부터 55명을 한 학급으로 개교하기로 내정되어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신축교사의 부지이다. 인천부에선 되도록 함구하고 비밀리 진행시키려고 한다는 바, 그 복안은 산근정에 있는 공설운동장에 교사를 짓고 공설운동장은 부내 도산정으로 옮길 작정이라 한다(동아일보, 193531일자).

이는 일제의 간악한 속내의 결정판이었다. 이에 대한 인천의 부민들은 크게 불평(不評)하였다. 하지만 힘이 없는 인천부민들의 외침은 그저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일제는 이와 같이 웃터골을 빼앗았고 인천부민들에겐 새로운 제안을 한다. 바로 시 외곽지역인 도산정에 새롭게 공설운동장을 신설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동경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즉 일제 스스로를 위해 공설운동장을 도시 외각 지역에 건립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인천체육의 성지인 웃터골을 빼앗기고 새로운 공설운동장을 반기는 인천부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슬픔을 넘어 분노(조선일보, 1935326)하였다. 하지만 나라 잃은 인천부민들의 힘없는 메아리는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일제는 우리에게서 웃터골을 빼앗아갔다.

               그림2. 인천 각 학교 연합대운동회(자료출처: 인천문화재단, 2006: 138)

3.
3.
잘못된 진실?


웃터골을 빼앗은 일제는 공설운동장 신설을 제안하며 도시의 외곽지역인 도산정에 인천공설운동장 건립을 계획하게 된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웃터골공설운동장은 중학교기지로 제공하고 내년부터 도산정에 대 공설운동장을 신설한다는 것은 보도해온 바와 같거니와 어제 도당국으로부터 그것이 인가되어 지난 21일 오전 9시부터 입찰을 개시하여 결국 삼만팔천원에 경성 시전조(柴田組)에 낙찰되었다는데 이는 도당국의 예산보다 6천원을 초과한 것이라 한다(동아일보, 1935823일자).

이러한 계획을 통해 인천의 도산정(도원동)공설운동장은 193682일 개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산정의 공설운동장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는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인천의 대다수의 향토서적들은, 심지어 인천의 역사를 자부한다는 한 공공건물의 개항장 연표에는 1934630일을 도원동 공설운동장의 준공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신문기사에서 확인 했듯이 도원동 공설운동장을 신설하겠다는 도당국의 인가가 1935821일에 허가를 받았다는 신문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 2년의 시기가 잘못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공설운동장과 관련된 잘못된 진실은 체육사에 소홀했던 우리의 책임이 크다.

                                            그림3. 2011년 현재 인천개항문화연표

웃터골운동장은 그렇게 일제에 빼앗겼으며 그곳은 그들만의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정작 내 나라의 주인들은 체육성지(聖志)를 잃고 일제의 힘의 논리에 의해 새로운 장소인 도산정으로 공설운동장을 이전하여야 했다. 최근 독도에 관해 일본은 매우 특이한 주장을 내세우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일제의 그 논리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하여도 우리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독도 역사 찾기와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멀리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일본, 그들에게 철저히 빼앗겼던 웃터골의 교훈을 통해 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대한민국, 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대(大)한국인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할 것이다.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최영금 (한국체육대학교 박사과정)


스포츠에는 과연 여성종목과 남성종목이 있을까? 성별 차에 따른 스포츠 법규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스포츠에서 여성에게 어울리는 스포츠와 남성에게 적합한 스포츠를 나누는 것일까? 여성학, 사회학자들은 선사시대 이후로 형성된 남성중심으로 짜여진 세계관(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합리한)을 남녀모두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남성이 중심으로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금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고정관념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드디외가 말한 ‘공론의 모순(paradoxe de la doxa)’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출처: 조이뉴스21


여성 야구선수 안향미를 아시나요?
 

테니스부에서 활동하던 초등학교 여학생이 있었다. 그 여학생은 야구부에서 운동을 하던 동생을 기다리면서 혼자 야구를 지켜보곤 했는데 어느 날 테니스부가 없어지면서 아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평범한 여자아이와는 다른 방향을 가게 되면서 매번 야구하는 여자아이를 받아 줄 학교를 찾아 돌아다니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향미의 아버지는 진학할 학교를 찾아, 학교 야구부 감독을 만나러, 교육청 관계자를 만나러 동분서주하고 결국 남녀공학이면서 야구부가 있는 덕수정보산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성 야구선수 최초로 공식대회 출전

1999년 4월 30일. 제33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전. 대한민국 역사상 공식 경기에 여성이 선발투수로 나서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1905년 야구 도입이후, 거의 100년만에 마운드에서 선 여성선수는 타자를 데드볼로 출루시키는 것으로 아쉬운 데뷔전을 갖는다. 이 경기로 인해 언론의 주목과 세간의 이목을 끌어 ‘야구하는 여성’을 알리기는 했지만, 대학진학과 프로팀 입단의 진로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나라에서 정말 여자는 야구를 할 수 없었을까?

엄밀하게 따지자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야구선수는 안향미가 아니다. <한국 야구사>에 따르면 최초의 여자 야구경기는 1925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마산 의신여학교와 진주 시원여학교의 경기이다. 같은 해 11월 동아일보가 주선한 미국여자야구단의 경기, 1949년 최초 여자 소프트볼팀이 기록이 남아있으나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여자야구는 안향미가 최초라고 기억될 만큼 진귀한 일이 된 것이다.

여성 야구선수는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면서 야구협회 규정에 ‘남자가 아닌 자는 선수가 될 수 없다’라고 명시되었다고 하나, KBO 야구규정에는 여자가 야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없다. 단 KBO총재 권한에 따른 ‘부적격자’에 대한 규정이 있으나 안향미가 여기에 해당되어 선수등록이 거부되지 않았으며 대학 이하 유소년 야구에는 혼성팀을 인정하는 규정도 있었다. KBO 야구 원로는 만약 여성이 많았다면 여성차별적인 규정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역으로 규정이 없다는 것이 이미 차별이지만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성 야구단의 창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안향미는 다시 진로에 대한 벽에 부딪친다. 대학은 여자를 위한 탈의실, 샤워실의 시설이 없어 합숙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입단 테스트도 조차 거부하였다. 유일하게 프로야구단 한화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고 또 선수가 아닌 프런트 일을 제의하지만 엘리트 야구선수로 남고 싶었던 그녀는 다른 방향을 모색한다. 그러나 미국여자야구선수단의 입단 제의도 무산되고 2002년 일본여자야구협회 소속인 세미프로 여자야구팀 드림윙스에서 투수와 3루수로 활동하다 2년 후 한국에 돌아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회원을 모집한다. 세 번째 연 정모에서 단 3명이 모여 여자야구를 의논하고 팀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성 야구팀은 시작으로 2008년 1월 한국여자야구연맹이 현판식을 마치고 2010년 현재 전국 총 22개팀이 연맹에 가입하여 선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선발된 대표팀 선수는 초창기 자비로 운동했던 때와 달리 선수활동과 관계된 비용을 지원받고 있다.


여성 스포츠의 무거운 걸음마, 그러나 세상에 던지는 물음표 하나
 

현실의 모순을 발견하고 물음표를 던지며 더 나은 삶을 희구할 때 인간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비록 그 시작은 미약하고 무거운 걸음일지라도 역사는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 더 이상 스포츠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포츠를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날이, 여자가 야구를 하는 것이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라 그냥 일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한국야구위원회 선수명부에는 흰색 야구 선수복을 입은 안향미라는 여성선수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빛바랜 선수명부가 더 낡아지기 전에 여성 야구인들의 얼굴이 더 채워지기를 소망해본다.

                                             <덕수정보산업고등학교 야구특기생으로 등록>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조준호 (인천대학교 강사)


우리나라 자장면의 원조, 사이다의 원조, 쫄면의 원조, 담배의 원조 등이 암시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인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이 인천은 최초와 원조(鼻祖)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붙는 도시이다.
특히 체육사적으로도 매우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체육인들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운동장의 원조도
바로 인천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천체육의 대 성지
인천청년운동의 발상지,
인천최초의 공설 운동장,
인천시민의 애국심 발원지,
그곳이 바로 웃터골운동장이다.

웃터골은 청년들의 기개와 시민들의 진지한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운동장이다.
아직도 웃터골운동장은 인천시민들에게 성스러운 체육의 성지로 불린다.
2009년 웃터골운동장의 현재 나이는 89세로 이제 곧 구순(九旬)이 된다.
웃터골운동장이 백세, 이백세가 되는 날, 이곳은 한국체육의 성지(聖地)가 될 것이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을 우리는 웃터골운동장이라고 불렀다.
인천시내 어디에서도 항상 산등성이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항상 높아만 보였다.
그래서 이곳을 산기슭에 있는 높은 곳이라 하여 모두가 웃터골이라 불렀다.

웃터골에는 우물이 있어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생활수를 얻었다고 한다.
그들이 웃터골에서 물만 떠갔을까?

물이 있는 곳, 교통이 발달된 곳, 넓은 분지, 그곳에서는 분명 체육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체육활동이 있었다.
이러한 웃터골운동장의 최초 설립과정과 체육활동,
그리고 웃터골이 한국근대체육사에 미친 영향을 본 내용에서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1. 웃터골운동장의 설립과정은?
천연의 분지 웃터골은 이미 그 시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운동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웃터골이 보다 구체적인 운동장의 모습을 갖추며 확장된 시기는 3·1운동이 끝나고
그 다음해인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는 시기였다.
신문발행과 사회단체의 조직이 허용되는 등의 사회전반의 유화분위기로 인해 인천에 웃터골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당시 인천내의 관청, 은행, 미두취인소, 학교 등의 각 기관에는
체육구락부가 결성되었고, 스포츠 붐이 일게 된다. 이에 웃터골운동장이 경기를 치르기에 협소해
불편해지자 인천부는 결국 부내 산근정 26번지에 위치한 웃터골을 확장하게 된다.
결국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를 통해 확장설계를 실시하여
대정9년(1920년), 11월 1일 2천 3백 63평에 기부금 5,250원으로
‘그라운드’의 형태를 갖춘 공설운동장을 준공하였다.

또한 웃터골은 다시 1926년에 공사비 1만원을 들여 6천 450평으로 재 확장하였으며
그해 겨울에는 이곳에 스케이트장도 개장하여 인천체육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2. 웃터골운동장에서는 어떤 체육활동이 실시되었는가?

웃터골운동장에서는 시대를 반영하는 엄복동과 조수만의 초기 자전거경기대회도 열렸으며,
해마다 여는 춘(春)․추(秋)의 각 학교 대운동회와 연합체육제전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이러한 체육활동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경기는 바로 야구경기였으며 특히 한․일간 야구경기가 있을 때면
으레 장외 민족대결까지 벌어져 일본 경찰이 출동해 관중을 해산시키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한용단(漢勇團)'과 미두취인소의 ‘미신(米信)’팀 간의
라이벌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현재의 웃터골 일대는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고 한다.

                                              2009년 현재 웃터골운동장(제물포고등학교)

3. 웃터골운동장이 한국근대체육사에 끼친 영향은?
일제강점기의 인천은 개항장으로서 외국인 집단거주지역(租界地)이 존재하고 있었다.
웃터골은 바로 이러한 조계지와 매우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외국인들의 스포츠공간이 되기도 했다.
또한 웃터골에서는 인천대표팀과 일본 제1함대 수병들, 혹은 미국 상선 ‘윌리암’호 선원들과의
야구경기나, 상해 유학생들과의 축구경기 등 국제경기형식을 띤 새로운 형태의 스포츠도
웃터골운동장을 통해 자주 소개
되었다. 여기에 웃터골은 이미 1920년 11월에 확장 개장하여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의 토대가 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보다 4년이나 빠르게 건립되었다.
시설의 규모면에서는 경성운동장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웃터골운동장은 인천항을 통해 도입된
근대스포츠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실험적 체육공간으로서 한국근대스포츠의 개척지였다.

이상과 같이 웃터골운동장은 인천체육의 성지라 불리며 매우 유서 깊은 스포츠시설로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인천의 향토사학자 고일은《인천석금》에서
웃터골운동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인천청년의 ‘발원지’는 별항(別項)에 기록하거니와 인천청년의 발상지는 웃터골이다.
인천시민에게 민족의 얼의 씨를 뿌렸고 민족주의의 묘목을 심었었고 반일 항일의 횃불을 드높이
들어
8.15광복의 첫 페이지를 열어 제친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은 웃터골이다.



ⓒ 스포츠 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조준호 (인천대학교 강사)


수십 년 전 대동강 변에서 석전(石戰)을 실제 행하던 노인들은 젊은 시절 석전을 하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상처가 나는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자기 아들이 싸움에 패하여 집으로 도망하여 오면 어머니는
대문을 열어주지 않고 꾸짖어 되돌아가게 하여 끝까지 싸우게 하였다.

위의 내용은 마치 서양 고대사인 스파르타 인들의 전투무용담을 듣는 듯하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우리 선조들의 삶을 기록한 심우성의『우리나라의 민속놀이』
석전(石戰)편의 일부분이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인 우리나라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놀이가 있었다.
불과 1970년대까지도 시골에서는 이 놀이를 해왔으며 우리선조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놀이를 희(喜)했다. 오랜 역사성을 갖는 이 놀이는 우리민족이 때론 국토를 지키기 위해,
때론 신체단련을 위해, 때론 풍년을 위해 해왔다. 그것이 바로 석전(石戰)이다.

1. 석전(石戰)이 무엇인가?
석전은 단어 그대로를 살펴보면 ‘돌싸움’을 말한다. 석전은 ‘석전희(石戰戱)’,
‘돌팔매놀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으며 개천이나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혹은 강을 사이에 두고 주민들끼리 서로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싸우는 놀이였다.
석전은 生과 死의 혼전을 이룰 정도로 매우 격렬한 신체활동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우리민족의 오랜 무예풍습과도 같은 매우 과격하고 호전적인 놀이였다.
우리의 삶속에 녹아 쉼 쉬던 놀이, 우리민족의 전통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그 놀이가
바로 석전(石戰)인 것이다.


2. 우리민족은 석전(石戰)을 어떤 방식으로 했는가?

석전은 최초 서로 편을 나누고 돌팔매를 시작한다.
돌팔매를 하다가 서로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가득해질 때 본격적인 석전놀이가 시작된다.
돌을 던지는 것 뿐 만 아니라 육모방망이를 든 대장들 사이에 백병전도 실시하며 굉장한 분노와
원시적이긴 하나 조직적 전략도 숨어있다. 이러한 석전이 대규모로 진행되거나 공식적 성격을 띨 경우
놀이의 방식에는 우선 각 편을 방패군과 돌팔매 군으로 나누어 경기하는 방식 하나와
청기와 백기 팀으로 나누어 깃발을 뺏는 방식 등도 있었다.
즉 석전은 스포츠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던 우리민족의 놀이였다. 


3. 돌(石)은 어떻게 던졌는가?

돌을 직접 잡고 던지기도 했으며 보다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도구는 닥나무의 질긴 섬유질로 만든 노끈이었으며 대략 60∼80cm정도로 늘어뜨리고
빙빙 돌려서 던지는 것이었다. 즉 돌을 던질 때는 노끈의 한끝을 손목에 매거나 손바닥에 쥐고
나머지 한끝은 집게손가락에 걸어 빙빙 돌리다가 집게손가락을 놓으면 돌이 날아가는 원리였다.
이때 돌을 올리는 곳은 반드시 가죽으로 만들어야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돌을 던지는데 사용하는 노끈의 이름을 정약용은 ‘물풀매’라고 했으며
북한서적에서는 ‘망패’, ‘왕패’라는 이름 등도 등장하였다.


4. 과격한 석전을 도대체 왜 했는가?
우리민족에게 석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각 시대마다 돌을 전문적으로 잘 던지는 석전부대도 있었다.
신라의 ‘석투당(石投幢)’, 고려의 석투반(石投班) 등이 있다. 또한 고려 때 만들어진 척석군(擲石軍)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이들 석전부대는 국토를 수호하였다. 또한 석전은 고대에는 정월,
고려시대는 단오, 조선시대는 정월과 단오시기의 지역특성에 맞게 실시되었으며
석전에서 승리한 편은 지역에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인 시대에
석전을 승리하여 풍년이 된다는 것은 당시 최고의 동기유발 요인이었다.
즉 석전은 크게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작게는 지역의 풍년과 희(喜)를 위해 석전을 한 것이다. 


5. 석전이 새롭게 변화된 형태가 혹시 없었는가?

북한에서 석전의 변화된 형태인 ‘석전무(石戰舞)’라는 무용이 있다.
석전무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즐겼다는 무용으로서 그 내용은
안용철의 《조선민속사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石戰舞는 서도지방의 민속무용이다. 평안도 지방에 널리 퍼졌던 춤으로 돌팔매 싸움하는
내용이다. 石戰舞는 일종의 집단적인 경기놀이인 석전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바가지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이 춤의 특징적 춤동작은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돌띠를 휘둘러 돌을 던지는 동작을 하고
여성들은 손목을 굽히며 어깨를 가볍게 움직이는 동작 등이다. 매우 박력 있고 씩씩하며
흥겨운 춤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석전무’는 과거 서양 고대사에 등장하는 스파르타의 군사무용인 피릭(Pyrrhic)과도 매우 유사하다. 또한 석사놀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는 남해안 해안마을에서 추석에 통나무 원목을 세우고 돌을 던져
기둥을 맞추는 민속놀이로 지금도 경상남도 남해에서는 이 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아직도 우리민족은 냇물이나 강가를 지날 때면 반드시 돌을 물에 띄워 멋지게 돌팔매를 최소 한두 번,
세 번은 해본 후 강을 건너는 유희(遊戱)민족이다. 어느 민족이나 누구나 돌팔매놀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돌팔매를 조직화하였고 이를 놀이로, 무용으로, 전투로까지 승화시킨
역동적인 스포츠 민족이다.


ⓒ 스포츠 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나영일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국궁과 양궁

국궁은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수천년을 이어온 대표적인 무형문화재다. 우리나라가 올림픽
양궁종목에서만 16개의 메달을 딴 것은 우리민족을 큰 활을 쏘는 동이(東夷)족이라 우리
몸속의 DNA에는 활쏘기를 잘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의 양궁은 남산에 있는 석호정에서 활을 쏘던 체육교사 석봉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83년 궁도협회에서 양궁이 분리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활쏘기를 국궁이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결국 우리나라 양궁실력의 뿌리는 국궁이다. 활터에는 활을 쏘는 사대(射臺)와
과녁 그리고 활쏘는 사람들이 머무는 정자인 사정(射亭)이 있다. 전국에는 370여곳의 사정이
있다. 2009년 현재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양궁선수는 1,559명이고, 국궁선수는 무려 11,560명이나
되어 축구 다음으로 인기가 많다. 국궁은 엘리트체육으로서 뿐만 아니라 생활체육동호인수도
엄청나게 많은 우리나라의 전통스포츠이다.




  김홍도의 활쏘기(射弓), 1780년추정, 단원풍속화첩, 중앙국립박물관 소장




활쏘기의 의미


조선시대의 활쏘기는 무과과목의 하나로 인재선발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고, 군자들의
심신수련 활동이었다. 왕과 신하가 활쏘기를 통해 군신간의 예의와 화합을 유지하고, 군왕으로서
국가통치의 중요한 덕목인 학문적 소양과 더불어 무예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조선 초부터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였다. 1743년 영조가 성균관에 행차하여
문무과시험을 보고, 직접
활쏘기를 한 그림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방에서도 향사례(鄕射禮)를 통해
지역민들의 단합과 친목도모를 하였다.

 
사정은 스포츠클럽의 원조

정부는 2006년부터 한국형 스포츠클럽시스템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스포츠클럽시스템의
원조는 바로 사정이다. 사정은 관설사정과 민간사정이 있는데, 마치 오늘날의 공공체육시설과
민간체육시설로 나눈 것과 비슷하다. 서울의 관설사정은 임금이 친히 활을 쏘는 경복궁 후원의
춘당대(春塘臺)나 과거시험이나 별군관 또는 군인들이 연습하는 중일각(中日閣)이 있고, 지방의
관청에는 장교와 군민들이 활쏘기를 연습하는 장대(長臺), 연무대(鍊武臺), 관덕정(觀德亭) 등의
이름을 가진 사정이 있었다. 민간사정은 임진왜란 후에 선조대왕이 국민의 상무심을 진흥시키고자
경복궁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것이 시초였고,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때에 과거 시험을 위하여 수많은 민간사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800년대 말까지 서울에만
약 40여개의 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많은 사정이 없어졌다. 전라북도의
천양정은 1712년, 충청남도의 덕유정은 1793년에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고, 당시의
기록도 남아있다. 국민생활체육회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단체에서는 생활체육동호인 조직을 늘이고,
지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의 370여곳에 있는 국궁동호회를 벤치마킹
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림  1910년대의 석호정(출처미상)




사정은 전통 스포츠문화의 뿌리


조선시대의 사정은 학교와 학원기능을 한 교육기관이면서, 지금의 전국체전과 같은 무과시험이
열린 대회장이고 연습장소 였다. 사정에는 지금도 순 우리말이 통용되고 있다. 사대에서 과녁으로
부는 바람인 ‘덜미바람’,
과녁에서 사대로 부는 바람인 ‘안바람’,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부는 바람인
‘오색바람’
등 활터에서 사용되는 우리말만 익혀도 풍성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사정에는
사두(射頭)라고 불리는 대표가 있고, 사범이나 선생을 통하여 국궁을 배우고, 서로를 접장(接長)이라고
부며 각종 예의범절을 교육하고 전수하고 있어 서양의 스포츠클럽과는
차원이 다른 가장 한국적인 전통
스포츠클럽이다.






                             어사례도(御射禮圖-국왕이 활을 쏘는 예), 1743년, 국립박물관소장




조선시대의 국궁문화


활 쏘는 사람들은 물소 뿔로 만든 각궁(角弓)을 애지중지하여 겨울에는 따뜻한 아랫목에
보관하였을 정도다. 그리고 굳은살이 박히도록 활을 쏘아 엄지손과 깍지(角指)가 맞붙을 정도였고,
다양한 훈련방법을 개발하였다. 매월 초하루에 삭회(朔會)라고 하는 월례대회를
통해 사원들끼리
서로의 기량을 펼치고, 사원 중에서 유사(有司)를 정해서 떡이나 음식을
내고 우승자에게 상품을 주기도
하였다. 또 편사(便射)라고 하는 지역 및 정(亭)대항의
단체전 경기를 하였다. 한량으로만 편을 짜서
경기하는 한량편사(閑良便射)를 비롯하여
터편사, 골편사, 장안편사, 아동편사 등 다양한 단체 경기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사계(射稧)라고 하는 전통적인 계(契)모임이 있어, 활터의 운영이나 친목 등을 위한
상부상조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활터에는 예의를 존중하는 수많은 예의작법이 있다. 안전 조치의 하나로, 활을 쏘고 나서 함께 나가고 함께 들어오는 동진동퇴(同進同退)나 연습시에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는 습사무언(習射無言) 그리고 활쏘는 사람들이 알아야하는 활터의 예의로 궁도9계훈 등을 실천하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현직이 없어서 놀던 벼슬아치나 무과 응시자 또는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한량(閑良)이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풍류를 즐기고 돈 잘쓰고
잘 노는 사람의 대명사로
지금도 쓰인다. 활쏘기를 하면서 돈을 걸고 하는 놀음의
경우에도 국가에서는 국방에 이롭다하여 벌을
주지 않았다. 활쏘기는 마음이 바르고
덕을 쌓고 그것을 보는 관덕(觀德)의 행위였다. 그래서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그 벌로 술을 먹이게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러한 풍습이 오늘날 몇몇 활터에도
전해지고 있다 



                                      준천시사열무도(濬川時射閱武圖), 1760년, 규장각 소장




전통무예진흥법과 국궁


2008년 일본은 중학교에서 무도(武道)를 필수종목으로 채택하는 정책을 고시하였고,
문부과학성에서는 도장의 신설과 유지보수를 위해서 5개년계획으로 5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 전통무예진흥법이 시행되어 어떤 형태로든 국궁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2010년부터 시행될 새로운 교육과정의 중학교 2학년 체육과목에 ‘국궁’
을 소개하여 학생들에게 국궁의 전통을 잇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이제 서양스포츠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스포츠인 국궁도 새롭게 발전하여 국궁문화가 꽃피기를 기원해 본다.


ⓒ 스포츠 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김복희 (안동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올림피아 제전경기 우승자에게 수여한 상은 야생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 코티노스(Cotinos)였다. 올림피아의 올리브 나무와 올리브관에 대한 기원은 헤라클레스와 관련이 있다.
신화에 의하면 야생 올리브 나무는 헤라클레스가 아르테미스에게 바칠 암사슴의 황금뿔을
구하기 위하여 히페르보레아(Hyperborean)의 땅에 갔다가 올리브 나무를 가지고 와서 올림피아에 심었다.

헤라클레스는 엘리스를 점령한 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올림피아 제전 경기를 창설하고
형제들과 달리기 경기를 해서 이긴 사람의 머리 위에 야생의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로 델포이의 신탁을 듣고 상으로 야생 올리브로 관을 만든 사람은 이피토스 왕이었다.
7회 이전 올림피아의 스타디온 경주에서는 우승자에게 빨간 사과를 상으로 주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피토스 왕은 빨간 사과가 헤라클레스의 전설과 올림피아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7회 올림피아 제전경기를 위해서 이피토스 왕은 델포이의 사제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다.
여사제는 거미줄에 쌓여있는 야생의 번식력이 강한 올리브 나무를 찾아야 한다고
이피토스 왕에게 말하였다.
올림피아에 도착한 왕은 알티스의 푸른 숲 한 가운데에서
거미줄이 쳐져있는 이슬로 빛나는 야생 올리브 나무를 발견하였다.
이피토스 왕이 올리브 나무를 찾으려고 왔을 때는 아침 해가 비치고 있었으므로
왕은 이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고 그 곳을 성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야생 올리브 나무는 올림피아에서 신성시되었다.
그리고 제7회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우승자는 이 야생 올리브 나뭇잎으로 만든 관을 수여 받았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양쪽에는 오피스토모스(Opsthodomos)와 마주보고 있는
칼리스케파노스(Kallistcphanos)라는 아름다운 영관(榮冠)의 올리브 나무가 서 있었다.
최고의 영예를 엮어 주는 영관은 이 나무의 가지로 만들었는데 올림피아 제전경기 우승자의 화관은
부모가 살아 있는 청년이 황금 낫으로 자른 신성한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들었다.
이 관을 헤라신전의 황금과 상아로 된 탁자에 올려놓으면 심판은 그것을 우승자에게 씌워 주었다.
우승한 선수는 올리브관을 받았을 때 신들의 일행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 믿었다.
경주가 무승부로 끝나면 올리브관은 신에게 바쳐진다는 규칙이 있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우승자는 야생 올리브관 이외에 붉은 양털 띠와 종려나무 가지를 받았다.
운동선수들은 도시의 명예와 올림피아 신들의 영광을 위해서 참여했기 때문에
올리브관, 양털 띠,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에 대한 표시였다.
종교적인 관습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양털 띠는 보통 신성한 대상을 장식하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에 양털 띠를 두르는 목적은 우승자를 신성화한다는 의미이다.

붉은 색은 힘을 강하게 하며 그것을 입는 사람에게 힘이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 이후 선수들은 승리한 뒤에 즉시 종려나무가지를 받았으며
5일째 공식적인 대관(戴冠) 의식에 갈 때까지 머리에 이것을 두르고 다녔다.
종려나무가지는 우승자로 확인되면 현장에서
즉시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작가 겔리우스(Gellius)는 왜 우승자에게 종려나무의 가지를 수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종려의 잘라낸 가지에 무게를 가하여 점점 더 무겁게 내리누르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생가지는 밑으로 처지지 않고 그 힘에 저항하여 오히려 위로 튀
어 올라온다.
플루타르크의 말에 따르면 이 나무는 압박과 중압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는 성질을 가졌으므로
승리의 상징으로 수여하였다.


                                                     우승자에게 주어진 양털띠와 종려가지
                   자료출처: (Ekdotike Athenon S. A.(1982), The Olympic Games in Ancient Greece. p. 139)



우승자의 표시로 주어진 양털 띠와 종려나무가지는 경기 직후에 우승자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우승자는 경기의 마지막 날 대관식에서 올리관을 상으로 받았다.
관은 종교적 상징, 기도와 희생제를 동반하는 표시였지만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올리브관은 제우스 신을 숭배하기 위한 표시이자 승리의 상징
이었다.
따라서 이 상은 교훈적 가치가 크다.

선수들은 어떤 재화보다 더 값지고 검소한 올리브관을 획득하기 위해서
고결하고 공정하고 품위있게 경기를 치렀으며 올리브관의 영예는 개인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들의 가족, 씨족, 도시, 조상, 신들을 위한 선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경기에서는 우승자의 승리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색다른 관습이 또 있었다.
가장 위대한 조각가가 경기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서 고용되었고
위대한 서정시인 또한 올림피아의 대관식이나 출신 도시의 개선식 행진에서
소년들의 코러스로 불려지게 될 승리의 찬가를 지어서 우승자의 영광을 축하하였다.
우승자는 승리의 기념으로 알티스의 성스러운 정원에 조각상을 세우고
거기에 승리하게 된 사유를 적어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것은 파격적인 명예였다.

우승자 조각상은 찬양할만한 행위로서 영원히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경기, 즉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우승자는 조각상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플리니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3회 승리를 기록한 우승자에게는 인물상을 새긴 등신대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경기에서는 민족 최고의 시인이 우승자에게
그의 폴리스를 초월해서 송시(訟詩)를 바쳤다.

승리는 최대의 영광이다.
우승한 선수를 위해서 임명된 시인이 최고의 영광된 순간을 노래한 승리의 찬가는
우승자들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시인들은 올림피아 제전경기 우승자들의 업적을 신화나 전설, 구전으로 꾸몄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우승자에게 주어진 올리브관은
얼마나 신성하고 영예로운 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우승자들은 아레테(arete)를 추구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리스인들은 이들의 탁월성을 예찬하기 위하여 올리브관과 함께 조각상이나 찬가를 통해서
영예를 기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하웅용(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적이 되어 죽고 죽일 수 있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투!!
잔인하지만 로마인들에게는 최고의 대중스포츠였던 검투사 경기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 웅장함을 자랑하는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에서는 열광하는 5만 여명의
로마인 앞에서
검투사 경기가 열리곤 한다. 이곳에서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검투사간의 결투,
검투사와 맹수간의
결투가 행해졌고, 죄수를 처형하기도 했다.

이러한 검투사 경기를 단편적이나마 소개했던 영화가 2000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글라디에이터’ 였다.
영화를 보면서 줄곧 의문스러웠던 것은 “이 영화의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였다.
영화 속 검투사 경기와 관련된 진실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자.


첫째, 주인공 막시무스와 코모두스 황제는 정말 검투사 경기를 참가했을까?

우선 막시무스는 코모두스 황제의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은 장군이었지만,
검투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코모두스 황제는 영화에서처럼 건장한 체격과 검투기술이 뛰어나
콜로세움에서 직접 칼솜씨를 선보였고 기록에 의하면 무려 735회나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검투사 황제” 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출생조차도 그의 어머니가 유명 검투사 외도로
가졌다는 루머도
있었다고 한다. 코모두스는 검투사경기에만 너무 몰두하여 국정을 멀리했고,
결국 암살당하는 불운의
황제이기도 했다.


둘째, 거대한 콜로세움은 어떤 구조였을까?

검투사 전용경기장인 콜로세움은 기원전 183년에 목조로 세웠다가 서기 80년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석조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많은 로마 시민들에 의해 콜로세움이 메워졌으며,
관람석 맨 위층은
노예에게도
개방되기도 하였다.
영화처럼 맹수의 극적인 등장을 위해 지하에 동물과 검투사의
우리와 올릴 수 있는
도루래와 같은
시설이 있었다. 방수시설도 완벽하여 콜로세움에 물을 가득히 받아
수전도 가졌다고 한다.

화려한 전용경기장인 콜로세움은 야간경기도 가졌다.
당시 로마인들은 해가 뜨면 일하고
어둠이 지면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기에,
야간경기라는 것은
환상적인 일이었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
전체를 환히 비추는 등불 아래에서 야간경기를 관전하며
제공된 술과 음식을 먹었으니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환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후대에 와서 ‘빵과 서커스‘ 라 비유되어 비난받지만, 어쨌든 배불리 먹고 마시며
경기도 공짜로
즐길 수 있다면 서민들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셋째, 검투사 경기의 프로그램은 어떠했을까?

대부분의 헐리웃 영화가 그러하듯이 검투사 경기 자체는 어느 정도 사실을 근거로 만들었다.
검투사 경기는
로마시를 물론 제국 각지에서 성행되었고 처음에는 1대1 시합이었으나,
차츰 프로그램이 다양화 되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검투사 경기는 오전에는 맹수 사냥으로 시작하여 점심시간부터는 검투사
경기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아무도 살아나 갈수 없는 경기(munera sine missione)'가 열렸다.

이 경기에는
범죄자들로만 구성되었는데 원형경기장에서 이들을 공개 단죄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두 명이 결투하여 한
사람이 쓰러지면 곧바로 다른 검투사가 나와 승자와 다시 대적하여 계속해서
전멸할 때까지 하는 것
이다.
당연히 경기 시간이 길어지고 하루 종일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넷째, 민간 검투사 양성소가 있었을까?

영화에서는 막시무스는 민간 검투사 프로모션에게 스카웃되어 검투사가 된다.

그러나 코모두스 황제에
제위기간(180~192)에는 영화와는 달리 민간 검투사 양성소,
민간 검투사 프로모션 또는 검투사 프로팀은
없었다. 민간 검투사 양성소는 로마 초기에는 전역에
존재하였으나, 1세기에 이르러 검투사 경기를 국가에서
통제하면서 없어졌다.

민간 양성소가 없어진 이후, 수도 로마 근교에는 국가가 직접 4개의 검투사 양성소를 설립하여
직영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의 한 곳인 루더스 마투티누스(Ludus Matutinus)는 클라우디우스
시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곳으로 맹수들과 경기를 갖는 검투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수도 로마이외에도 프리네스터(Praeneste),
카프아(Capua) 퍼가뭄(Pergamum),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와 함께 스페인에 가울(Gaul)과
바로셀로나
(Barcelona) 등지에
황제 직영의 검투사 양성소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은 검투사경기에 얼마나 열광하였을까?

영화에서 보듯이 검투사 경기는 로마 최고의 볼거리로 시민들은 열광하였다.

검투사 경기는 장례 풍습에서
비롯되어 로마 사회에서 급속하게 대중화되었으며,
저항할 수 없는 관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검투사 경기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쇠퇴하였지만 약 400년간은 로마 관중의 영혼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흥분을 자아냈다.
이러한 행사를 주관한 황제는 관중의 대단한 환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쉽게 검투사 경기를
저버리지는
못하였다. 관중의 환호를 잘 조정할 수 있는 황제는 여론의 흐름을 유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검투사 경기는 제정군 주제를 강화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였던 셈이다.
대중이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거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어가며 황제는 권력기반의
확고한
안정을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검투사 경기가 오늘날에 다시 부활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검투사 경기의 부활은 이미 시작 되었다고 본다.
이종격투기의 경기장면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격투기를 처음 보았을 때 무규칙과 경기의
잔인성으로 인해
스포츠 종목으로써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하웅용(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체육사학에서 가장 비중 없는 부분은 서양의 중세일 것이다.
통념적으로 중세의 신체문화는 다른 문화처럼 별 볼 것 없는 암흑기로 치부되니까!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중세의 기간이 너무도 길다.
중세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인 15-16세기에 이르는
1천년 이상의 긴 기간이기 때문이다.
천년동안 모든 이에게 절제된 수도원의 생활(종교적 생활양식)이 강요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신체문화는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중세에도 다양한 신체문화가 존재하였고 즐겼다.
중세의 신체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편견은 반복적 학습에서 온 “학문적 게으름”인 것이다.
그럼 중세 신체문화의 진실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자.


왜 중세 신체문화를 암흑기라고 했는가?

중세를 이해하려면 먼저 기독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종교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중세에서는 “영혼은 고귀하지만 신체는 천하다”는 생각으로
놀이를 포함한 모든 신체문화를 “죄악이며 사간낭비”라고 타부시 하였다.
이러한 중세의 신체문화적 상황을 카이와(Roger Caillois)는 중세에서의 놀이는
구속 받지 않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과 달리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쾌락적인 엉뚱한 짓과 헛된 기분전환에 불과하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를 신체문화의 암흑기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광의적인 측면에서 중세 신체문화를 평가한다면 암흑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체문화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가지는 놀이의 본능을 어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호이징가에 의하면 “놀이를 즐기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이며,
더 나아가 “문화행위 자체에는 놀이적 속성이 있다”고 하였다.
호이징가의 이러한 주장을 해석하면 "
인류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놀이나 신체활동을 지속적으로
즐겨왔으며, 놀이에 대한 욕구는 본능이며, 중세에도 예외가 아닐 것"
이라고 라고 할 수 있다
.

중세에서 즐겼던 신체문화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

귀족계급의 신체활동

중세는 계급사회였기에 신체문화 역시 귀족과 기사의 상류계급과 서민이 달랐다.
상류계층의 대표적인 체육활동으로는 수렵, 토너먼트, 쥬스트, 과녁맞추기 등이 있었다.
또한 12세기 들어오면서, 프랑스의 귀족들은 구기관(球技館)에서
주드뽐(Jeude paume, 테니스의 일종)을 즐겨하기도 했다.
베브렌(T. Veblen)에 의하면 상류계층은 하류계층과 사회적인 구분을 두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과시적인 행동이나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를 하였다고 한다.
Veblen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상류계층의 체육활동은 대표적인 “과시적인 소비형태”라고 볼 수 있다.
상류계층이 즐겼던 수렵, 각종 마상경기, 주드뽐 등 모두가 일반 시민이나 농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수렵은 주로 개나 매를 이용하여 행해진 신체활동으로
중세 귀족들이 가장 애호했던 신체활동이었으며, 상류계층의 사교장이었다.
다른 신분의 사람들은 허가되지 않아 귀족 남성만의 여가였다.
또한 수렵은 농가에 피해를 입히는 동물을 사냥한다는 명백한 효용의 가치가 있는 신체활동이었다.
양어장을 공격하는 수달들이나, 양치기 무리에 덤벼드는 늑대들을 퇴치하는 것은 영주의 일에 속했다.
목장 평원을 넘어서 밭의 말뚝(펜스)을 넘나들기도 하고,
사냥감을 몰기 위해서 불을 질러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어 농부들은 탐탁히 여기지 않았지만,
여우나 멧돼지가 농작지를 짓밟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럽중세 기사의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시작되어 궁전문화의 영향으로 화려하게 개최되었던
토너먼트(Tournament), 쥬스트(Joust), 과녁맞추기(Quintus)는 중세를 대표할 수 있는 경기이다.
단체 경기인 토너먼트, 1대1경기인 쥬스트, 정확한 과녁을 맞히는 과녁맞추기는
대부분 기마에 의한 모의 전술로써 행하여진 기마창술경기라고 할 수 있다.

                                                                     토너먼트

                                                                       쥬스트


                                                                주드뽐 경기(구기관) 

 

수렵이나 각종 마상경기는 군사훈련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중세 후기부터는 그들의 여유시간에 행하는 레저로 변천하게 되었으며,
주드뽐 역시 다른 계급이 행하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따르는 종목이었다.
즉 이러한 신체유희는 상류계층만을 위한 활동으로써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체육사에서 주로 다루었던 수렵, 마상경기, 주드뽐 등은
중세를 살았던 일부 사람들만의 신체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중세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시민이나 농민들의 신체활동은 전무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민들의 신체활동

중세 후기에는 중세 시민과 농민들도 비록 종교적, 시간적, 경제적인 이유로
상류계층보다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체활동을 즐겼다.
서민들은 그들의 출신지역의 유희나 댄스와 여러 형태의 걷기, 뛰기, 던지기 등의 민속적인 놀이를 즐겼다. 이러한 신체활동은 도시별로 독자적인 시민제라든가 구경거리, 장터모임과 같은
대규모 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술(soule)이나 구주희와 같은 공놀이도 즐겼는데, 중세에 있어 공놀이는
도시의 광장이나 도로 또는 도시와 연결하는 공간에서 이루어 졌다.
당시 공놀이가 지금의 축구처럼 일정한 규칙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한 종류가 아닌 여러 형태의 볼게임(ball games)이 행해졌다.

                                                                       술 게임


구주희와 오늘날 볼링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병을 쓰러뜨리는데 쓰이는 도구에 있었다.
사람들은 병을 쓰러뜨리는데 공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막대기를 던져서 병을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이 막대기는 길이가 1m이상이 될 수도 있었고, 굵기도 상당했다.
평민에게는 나무 공을 만들기보다 막대기를 얻는 것이 경제적이고 쉬웠기 때문에
막대기를 사용하는 구주희는 큰 인기를 누렸다.


                                                                 다양한 공놀이

중세농민들은 봄의 축제, 5월 축제, 가을의 감사절 축제 등을 통하여 다양한 신체활동을 즐겼다.
농민들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양한 춤, 레슬링, 달리기, 도약, 던지기 등의 민족 놀이를 가졌다. 예를 들어 도약경기 종목에는 제자리높이뛰기, 삼단높이뛰기, 사단 높이뛰기,
뛰어서 밑으로 내려가기 등이 있었으며, 던지기 종목에는 돌 던지기, 봉 던지기, 해머던지기,
단도던지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들은 후에 근대 육상경기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세 신체문화는 근·현대 신체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중세의 신체활동으로 흔히 떠올려지는 것들은 기사들의 군사훈련에서 비롯된
쥬스트나 토너먼트 등의 마상경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귀족은 물론 일반 민중들이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다양한 신체유희를 즐겼고,
이러한 신체유희들 중에는 20세기까지 그 인기를 누리는 것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세의 도시와 농촌에서 즐겨했던 신체활동들이 육상, 테니스, 게이트볼, 양궁, 펜싱, 볼링 등과 같은
근대스포츠로 발전하는데 모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양 체육사의 발달과정을 연속선상에서 볼 때
중세체육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체문화를 계승했고 근·현대 체육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영국의 민속학자 스트럿트(J. Strutt)는 특정한 국가의 국민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레저 생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역동적이고 건전한 여가 문화를 지닌 국가의 장래는 밝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레저 문화도 국가의 장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사회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주말엔 스포츠 인파로 가득하다.

스포츠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인파들을 볼 때마다 국민의 레저가 역동적인 종류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우리사회가 더욱 건강해져 갈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일요일의 스포츠 인파들을 접할 때마다 흥미로운 용어 두 가지도 머리를 스친다.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라는 말“애슬레틱 선데이(Athletic Sunday)”라는 말이다.

영국의 기독교 신교 교파들은 일요일이나 기타 성일(聖日)에 쾌락적인 스포츠 활동을 하는 자체를
죄악시하고, 일요일의 스포츠 참여를 금지하였으며, 적발될 시에는 형을 받았다.
그러한 영국의 전통은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사회로도 전파되어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일요일의
스포츠 참여는 금기사항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영미 사회에서는 ‘잉글리시 선데이’ 전통이라고 한다.

잉글리시 선데이 전통은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에서 미국 육상 대표선수로 참가했던 프린스테인(Myer Prinstein)은
세계 기록보유자였고, 예선에서 7.17m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경기일정이 일요일로
잡히자 일요일 경기를 할 수 없다며 포기했다. 청교도적인 신념의 발로였다.

그는 그 다음 올림픽에 다시 출전하여 금메달을 땄다. 더 리얼한 역사는 실록 영화 『불의 전차』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에릭 리들(Eric Liddell) 이야기를 통해서 잘 볼 수 있다.

청교도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1924년 파리 파리올림픽 100m 경기의 유력한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일요일로 경기 일정이 잡히자
“저는 주일(主日)에는 달리지 않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출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영국 언론은 그를 배신자로 몰았다.
그러나 동료 에이브람(Harold Abrahams)이 1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리들이 그 다음 주에 열린 400m경기에서 주 종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금메달을
획득해버렸다.

그는 청교도적인 신념에 따라 ‘잉글리시 선데이’ 전통을 지킨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영국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불의 전차』라는 영화로 남게 되었다.
미국 프로 야구의 역사에서도 1870년까지 ‘잉글리시 선데이’ 전통은 유지되었다. 노동자들은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했고, 야구장에 갈 수도 없었으며, 구단들도 일요일에 야구 경기를 하면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일정을 잡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일요일의 스포츠 활동을 금지하는 법인 소위 ‘블루로(Blue Law)’라는 것이 있었고,
일요일에 야구경기를 개최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란 판단에 따라 오랫동안 일요일에는
야구 경기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1880년대까지 일요일 골프 또한 미국 사회에서 금기사항으로 통했다.
세월의 흐름과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인간의 의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일요일의 스포츠 금지 전통은 일요일의 스포츠 권장 전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YMCA에는 영국의 강건한 기독교주의(Muscular Christianity) 사상을 수용하면서
스포츠 혁명을 일으켰다.
일요일의 운동 금지라는
‘잉글리시 선데이’ 전통은 사라지고, 일요일에도 건전한 스포츠 활동을
권장하는 ‘애슬레틱 선데이(Athletic Sunday)’라는 전통이 생겨났던 것
이다.

이 신조어의 탄생지는 뉴욕 YMCA이었고, 스포츠 혁명의 베이스캠프는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
YMCA이었다. 귤릭이라는 YMCA 지도자는 네이 스미스에게 농구를 창안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제자였던 모건은 배구를 창안했다.

YMCA의 스포츠 창안과 보급 운동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 YMCA 각 지회는 체육관을 건립하고, 청소년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농구와 배구의 창안은 물론 소프트볼의 규칙을 만든 것도 YMCA이었으며,
그 외 공립학교운동경기대회 조직, 1969년 맥가우YMCA(Mcgaw YMCA) 무용가 미셋(Judi Missett)의
재즈사이즈(Jazzercise) 운동 전개, 1970년 소렌슨(Jackie Sorenson)의 댄스운동(dance exercise) 전개,
‘에어로빅스(aerobics) 붐(boom)의 선도, 보디 빌딩 운동의 확산 등은 모두 YMCA가 이끌어낸 것이었다.

YMCA는 청소년들을 건전한 여가 활동으로 유도하려 하였으며, 일요일에도 건전한 스포츠를 권장하는
소위 애슬레틱 선데이 전통을 만들어갔다. 그러한 전통은 점차 미국 전역으로 점차 확산되면서
’잉글리시 선데이‘라는 전통은 사라지고 ’애슬레틱 선데이‘라는 전통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는 자연환경, 종교, 사회사상 등의 영향을 받으며, 진화한다.
스포츠 문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신교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는 ‘잉글리시 선데이’라는 전통이 강하여 일요일이나
기타 성일(聖日)의 스포츠 참여를 금지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미국 YMCA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러한 전통은 사라지고
 ‘애슬레틱 선데이 전통’이 자리 잡게 되었다.

복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YMCA의 스포츠 보급과 확산운동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우리나라에 서양 스포츠가 소개된 것은 기독교의 복음주의 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오늘날 미국에서 조직화된 농구, 배구, 야구 등과 같은 스포츠가 우리나라의 빅4(Big 4) 스포츠가 된 것도
이러한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오늘날은 일요일 오후에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IOC도 일요일 경기 일정을 잡으며 눈치를 보지 않는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혼합복식 배드민턴 선수들은
일요일 밤을
‘배드민턴 선데이’로 만들지 않았던가?
일요일에도 건강의 유지 증진이나 행복추구를 위해 스포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말이나 휴일의 스포츠 인파를 바라볼 때마다 스포츠 문화사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잉글리시 선데이’라는 말과 ‘애슬레틱 선데이’라는 용어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종종 미국 스포츠 보급 운동을 주도했던 YMCA 캐치프레이즈까지도 머리를 스친다.

“튼튼한 아이, 튼튼한 가족, 튼튼한 지역사회 건설
(We build strong kids, strong families, strong community)”.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나영일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


 

조선시대는 양반사회!

500년간 지속된 조선시대는 양반사회였다.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어지는 양반제도는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문인에 비해 무인의 대우와 평가는 우리의 생각보다 그렇게 낮지 않았다.
그동안 문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문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과 생각이 너무 높아서 무인은 천시되었다고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과거시험으로서 문과와 무과가 실시되었는데,
공식적으로 3년에 한번 문과는 33명, 무과는 28명씩을 선발
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국방의 상황 그리고 경사가 있었을 때 과거시험은 때때로 실시되었고,
어떤 경우에 만과(萬科)라고 하여 만명이 넘게 많은 인원을 뽑아 부실하게 운영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무과는 약 200여회가 실시되었고, 합격자는 모두 12만명 정도였다.
그리고 하급무인들을 선발하는 다양한 시험제도가 있었다.

1만 시간의 법칙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의
'아웃라이어(Outliers)'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의 2장 제목을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붙였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아웃라이어’라고 하는데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건
1만 시간의 땀 흘리는 훈련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은 매일 하루에 3시간 씩 10년 동안을 몰입해서 훈련을 하는 시간이다.
성공의 기회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분야이건 소설가건 피아니스트건 보통 어떤 일에 빠져
10년 정도를 갈고 닦으면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 전문적인 기술이나 안목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은 1만 시간의 피나는 연습시간을
투자한 사람들
이다.
조선시대의 무인들도 역시 그 이상의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조선시대 무인들은 2-30년을 공부하고 무예를 닦았으며,
이론과 실기가 겸비된 사람들이었다.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의 나이를 보면 평균적으로 30세 후반이었다.
이순신장군은 28세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그 후 32세에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무려 4년이 지난 다음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처럼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당시의 무인들은 이론과 실기에 모두 능했다. 이론으로는 사서오경이나 무경칠서와 같은 병법서와
유교경전을 알아야했고, 실기는 주로 무예시험 종목인 활쏘기와 말을 타고 활을 쏘거나
폴로와 비슷한 경기인 격구(擊毬) 등을 시험보아 문무를 고루 갖춘 인재를 선발하였다.

실기시험은 9등급으로 채점하였다.

조선시대의 무예 시험은 요즘 대학수학능력시험처럼 9등급으로 평가하였다.
당시의 평가는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에서부터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까지 9단계별로 점수를 부여
하여 실기 기능을 채점하였다.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위해서는 상상의 점수인 1등급을 받아야 했다.
관서지방에서 실시한 예비 과거시험 결과를 보면, 평양한량 전응린(田應隣)은 월도(月刀)가 상상,
농창(弄槍)이 상상, 쌍검(雙劒)이 상상, 편추(鞭芻)가 육중(六中)으로
무과최종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하급 무인들은 물시계를 이용하여 달리는 능력을 측정하는 주(走)라는 시험과
력(力)이라고 하는 시험을 보았다.
이들은 특히 오늘날의 배근력 시험에 해당하는 여력(膂力)이 좋아야 했다.
무인들은 보통 모래 15-18말(斗, 약 100kg)정도를 들 수 있을 정도의 힘 쎈 장사들이었다.



정조대왕은 명궁이면서 에티켓이 있는 임금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무인뿐만 아니라 임금의 무술실력도 대단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도 명궁이었고 격구의 대가였다.
특히 정조대왕은 활쏘기를 자주 하였는데, 그의 실력은 거의 신궁의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는 50발을 쏴서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모두 10번이나 되고,
100발을 쏴서 98발을 맞추기도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술실력이상으로 예의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실력자였다.
그는 활쏘기를 하여 10순(5발을 1순이라고 한다)에 49발을 맞히고 나서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부러 1발을 맞추지 않은 것은 스포츠경기를 하면서 타인에 대한 새심한 배려를 한 것으로
그가 예의와 에티켓을 지닌 젠틀맨이었음을 말해준다.

무인들의 실력이 낮아서 나라가 망했다.

구한말인 1890년, 지금의 평안도지역의 아이진(阿耳鎭)에 있는
군병들의 활쏘기와 조총 사격기록을 기록한 《아이진시사방득중성책(阿耳鎭試射放得中成冊)》에는
지금의 군대 직급으로 중대장급인 기총(旗摠), 소대장급인 대장(隊長)의 장교를 비롯하여
일반 병사 등 총 102명의 기록이 모두 불합격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이처럼 상급직급자인 기총부터 하위 포수까지 모두 불합격된 기록을 보면
당시의 군병들의 활쏘기와 조총의 실력이 형편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헤이해진 기강과 국력의 쇠퇴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그결과 조선은 일제에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체육인과 조선시대 무인들은 닮았다.

전쟁이 거의 없어진 요즘의 세상에서는 올림픽이나 세계대회가 총성없는 전쟁을 대신하기도 한다.
자국의 명예와 국력의 척도가 메달수에 비견되면서 체육인들은 조선시대의 무인과 같은 역할
하고 있다. 체육인과 무인들은 너무도 닮았다.

조선시대에는 왕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과 무를 겸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성공의 매직넘버인 1만 시간 이상을 훈련에 매진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무인들의 체력진단과 평가방법은 과학적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서 무인은 무만, 문인은 문만 일삼다가 그것마저 소홀히 하여 나라가 망했다.

운동선수가 오직 운동만 하고, 일반인이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오늘날의 체육계의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체육인이 문과 무의 실력을 겸비할 때, 진정한 인격체로서 이 사회에서 실력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체육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바뀌게 될 것이다
.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조준호(인천전문대학 사회체육과 강사)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은 1980년대 한국만화사의 최고 걸작이다.
이 만화는 아직도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사람들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또한 이 만화를 보면 한국프로야구의 이단아 삼미슈퍼스타즈를 연상하게 한다.
그 이유는 뭘까?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2년 창단된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즈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미는 최고의 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삼미의 향수는 오래도록 쉽게 잊혀 지지 않는 걸까?

우수한 선수들이 많아 매번 우승을 하는 팀은
왠지 단점이 없어 보여 인간미를 떨어뜨리고, 중간순위를 하는 팀은
뚜렷한 매력이 없어 너무 평범해 보인다.
사고치는 꼴찌라도 노력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더 정이 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고, 내일은 이길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으로
모두가 안쓰럽게 지켜보던 삼미는 야구도시 인천의 명성을 무색하게 한 외인구단이었다.

야구도시 인천은 한국최초의 야구 시발지이며, 광복이전 1920년부터 활약한
‘한용단’과 ‘고려야구단’, 사회인야구의 효시가 된 ‘전인천군’ 등
최고의 야구팀이 활동하던 야구도시다.
그리고 1960,70년대에는 고교야구 최강팀 ‘동산고’와 ‘인천고’가 야구도시의 명성을 이어갔다.
이렇듯 영광의 야구도시 인천을 모두가 ‘구도인천(球都仁川)’이라 불렀다.
‘구도인천(球都仁川)’의 첫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즈,
우리 모두는 바지위에 팬티 입는 슈퍼맨을 미친 듯이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부산갈매기’가 사직구장에서 부산 팬에 의해 우렁차게 합창되고, ‘목포의 눈물이’ 광주구장에서
구성지게 불러졌을 때, 인천구장에서는 ‘김트리오’의 ‘연안부두’가 목 터지게 불러졌다.

왜 이 노래를 들으면 짜릿한 눈물샘을 자극하는지,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의 이단아 ‘삼미 슈퍼스타즈’를
아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삼미의 역사는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떼쓰는 막내아이로 태어난
삼미는 제임스 딘처럼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그처럼 너무 젊은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났다.

삼미슈퍼스타즈는 한국프로야구사에 진정한 슈퍼스타였다.

1. 왜 팀 이름이 슈퍼스타즈?

아직도 삼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촌스러운 슈퍼맨 모습과
마스코트 원더우먼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삼미 창단의 바로 그 중심에 김현철 회장이 있었다.
김회장은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 재학 중일 때
미식축구에 매료되었는데 거기서 슈퍼스타즈란 이름을 가져왔다고 했다.
촌스럽지만 정이 가는 그 이름 슈퍼스타즈, 자꾸 듣다보면 중독된다.

2. 자발적인 삼미의 창단으로 인해 한국프로야구는
  
정상적인 출범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프로야구 출범 시 각 지역의 모교애 30%,
향토애 70%라는 지역별로 안배한 창단계획을 세운다.
인천에서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업들을 물망에 오르게 되나
기업들의 사정으로 인하여 여의치가 않자 인천지역을 출범에서 제외시킨다.
결국 한국 프로야구는 리그전도 어려운 5개 구단만으로 절름발이 출범을 계획하게 되지만,
이때 삼미그룹이라는 다소 생소한 기업의 김현철 회장이
프로야구 출범 준비위원회의 정식모임 6시간 전에 전화를 걸어 창단 의사를 밝힌다.
이제 인천 만석동에서 기업을 일으킨 삼미가 인천의 프로야구팀을 만든 것이다.
자발적인 삼미의 뒤늦은 등장으로 한국프로야구는 정상적인 출범이 가능하게 되었다.



3. 삼미는 창단 원년 단 한명의 슈퍼스타도 없이 단지
   ‘팬 사랑을 받는 팀’이 목표였다?


1982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가 있었다.
“삼미슈퍼스타즈,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스타플레이어가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전 국가대표의 딱지가 붙은 선수가 없다. 굳이 이 팀의 애칭 슈퍼스타즈에
걸 맞는 이를 찾는다면 사령탑 박현식 감독뿐이다. 에이스가 없어 타격위주의
게임을 운영하며, ‘팬사랑 받는 팀’을 목표로 최하위 탈피에 주력하겠다.
프로 품위 지켜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프로팀의 목표는 ‘승리’, 그리고 최종 ‘우승’일 것이다.

야구단의 승패는 소비재 업체를 보유한 회사의 매출과 직결되지만,
삼미는 이러한 소비재 업체도 없었으며 그저 최선을 다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팬 사랑을 받는 팀’이 되고자 했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프로야구팀 아니었을까?

4. 삼미는 창단 첫해 최악의 기록을 남겼으나, 
   1983년 재일동포 장명부를 비롯한 우수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진정한 외인구단이 되었다?


삼미는 한국야구사에 아직도 깨지지 않을, 어쩌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 영욕의 기록을 남긴다.
삼미는 원정경기 최다 21연패, 한경기 최다 20실점, 특정 팀 상대 최다 16연패,
후기리그 최저승률 0.125, 18연패 등 치욕스런 기록들이 있다.
또한 개인최다 30승, 시즌 최다 출장투수 60게임, 시즌 최다 선발투수 44게임,
팀 최소 투구 80개, 최다 완투 56게임 등 장명부의 활약은 삼미를 우승후보로 도약시킨다.

삼미는 전년도 꼴지팀에서 하루아침에 우승후보로 성장,
왜 삼미가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5, 삼미슈퍼스타즈에는 본받을 만한 철학이 있다?

삼미에는 장명부와 감사용 등 유명한 선수들이 있다.
한 시즌 30승의 최고투수 장명부, 패전전문 마무리 투수 감사용은
극과 극을 달리는 선수들이었지만 그들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장명부는 30승의 원동력을 ‘無二一球’의 정신(KBS스페셜, 2005.10.16)을 강조한다.
오직 하나의 투구’라는 정신으로 하나하나 투구한 것이
바로 그의 30승 신화
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감사용도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고 꼴찌가 있어야 1등이 있음을 말하며,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도전하는 정신자세가 가장 중요하다(이코노믹리뷰, 2005. 4.27)”고 강조한다.

1등에게도, 꼴등에게도 우리에겐 모두 배울 교훈이 있다.
삼미는 비록 꼴지 팀의 대명사였지만 가끔 강팀에게 큰 점수 차로 승리하는
‘도깨비팀’이기도 했다.
삼미는 1985년 모기업의 경영악화와 팀의 성적부진으로
시즌 중 결국 청보그룹에 매각되었다.

삼미는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팀 창단으로
한국야구계에 선구자적 귀감이 되었다.
또한 삼미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있어서 진기한 기록들을 많이 남기며
초창기 한국프로야구 정착과 발전에 기여한 진짜 슈퍼스타였다.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옥 광(충북대학교 체육학과 조교수)


 

근대 올림픽을 부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쿠베르탱이었다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근대올림픽을 부활하고자 했던 이유와 초기 올림픽 경기의 조직 및 운영에 영향을
끼친
사고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 기인한다고 한다면 많이들 의아해할 것이다. 

근대 스포츠사의 가장 중요한 획을 그은 근대 올림픽의 부활이 영국의 퍼블릭 스쿨과 무슨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일까?


귀족 출신 성분의 쿠베르탱은 어린 시절부터 영국의 교육적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그는 테누의 《잉글랜드에 관한 노트(Notes on England)》, 토마스 휴즈의 《톰 브라운의 학창시절
(Tom Brown's School Days)》등을 읽고 영국 퍼블릭 스쿨의 스포츠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자유와 스포츠’ 라는 스포츠 교육사상의 하나의 원형을 구축하고 스포츠 운동에 주력하였고,
결국 1894년 스포츠를 통해 전인적 발달을 지향하고 스포츠 정신을 바탕으로 인류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상인 올림피즘(Olympism)을 주장하며 1896년 근대 올림픽의 서막을 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남길 외, 2008: 139-140).

그렇다면 그가 주목한 19세기 영국 퍼블릭 스쿨의 교육과정에서 스포츠를 중시한 이유와 이것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짚어 보는 것은 세계 스포츠사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근대 스포츠 사상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근대 영국의 역사에서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며, 그 교육 과정에서
스포츠가 활용되었다는 점은 영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영국사에서 퍼블릭 스쿨이 출현한 시점은 12세 초엽부터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중상류층들의 자제를 국가가 지원하여 교육하는 국립교육 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그 수가 218개교가 될 만큼 급격히 증가했고, 교육대상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신흥 부르조아 계층들의 자제들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로부터 일정한 보조금을 받는 동시에 학부모들로부터 높은 금액의 수업료를 받아 운영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는 국가나 지방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여 사립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당시 명문학교, 예컨대, 그레이트 퍼블릭 스쿨(Great Public School)로 간주되던 학교는
1861년 왕립 클라렌톤 퍼블릭 스쿨 위원회에서 선정한 9개교를 말하는데 여기에 이튼(Eton),
해로우(Harrow),
럭비(Rugby),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슈루즈버리(Shrewsbury), 윈체스터
(Winchester),
차트하우스(Chaterhouse), 세인트 폴스(St. Paul's), 머천트 테일러스(Merchant Taylor's)
학교들이 포함되었다.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 스포츠가 도입된 이유와 발달 배경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퍼블릭 스쿨에 스포츠가 도입된 것은 스포츠를 애호하던 상류 계급의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이전까지의 왕실과 상류계층의 스포츠 애호 전통이 계승되어 경마, 크리켓, 골프와 같은
종목들은
18세기 말부터 점차 전국적인 조직체를 결성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퍼블릭 스쿨은 일부 귀족과 중산계급, 그리고 신흥 부르주아의 자제들이 수학하던 특수한
교육기관이었기에
각종 스포츠가 사회문화적 환경 특히 계급적 환경에 의해 학교를 중심으로
확산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퍼블릭 스쿨에 스포츠가 도입된 직접적인 배경은 스포츠가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위한
긍정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당시 사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퍼블릭 스쿨의 교육은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라틴 및 그리스 고전 중심의
경직된 교과과정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의 틀 속에서 욕구의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들은 각종 게임의 참여가 난폭한 학생들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Mangan, 1987: 142)

결국 1840년대부터 말보로우와 업핑엄을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각종 스포츠를 교육 체계 속에
공식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스포츠를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묘약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퍼블릭 스쿨은 기숙학교 즉, Boarding School 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활동 범위가 교정내로 제한되어
있었고, 스포츠의 도입은 이러한 환경에 매우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19세기 영국 퍼블릭 스쿨에서 지향했던 스포츠 교육의 목적은 애슬레티시즘(athleticism)
즉, 운동애호주의의 체계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슬레티시즘의 이념적 체계는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목적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신사도(gentlemanship),
강건한 기독교(Muscular Christianity), 제국주의적 충성심(imperial royalty)의 함양을 목표로 한 것
이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용어를 반지성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조잡하고 병리학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19세기 중엽부터 각종 스포츠 종목들은 퍼블릭 스쿨의 중요한 교육 영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점차 그 체계가 잡혀갔다.

교장, 교사, 기숙사 감장들은 프리펙트 시스템(prefect system), 상급생들이 하급생을 관리하던
기숙사의
조직체계와 모니터 시스템(monitor system)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게임에 참여시켰으며,
스포츠 참여를 통한 교육적 이상을 구현해갔던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결국 공명정대성, 남성다움,
협동심,
통솔력 등과 같은 목적 개념 아래 진솔, 헌신, 정직, 투지, 신체적 탁월성, 성실, 자기신뢰, 절제,
명예,
복종심, 스파르타적 근성, 희생, 단결 등과 같은 자질을 함양하는 지렛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애슬레티시즘에는 제국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도 내재되어 있었다.

영국이 20세기 초까지 제국주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
특히, 워털루 해전에서 승리한 181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은 그 절정에 달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한 영역이 된 학교 스포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스포츠 참여를 통한 신사도의 함양이라는 도덕교육의 목적과 강건한 기독교 육성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이 결합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애슬레티시즘이었는데(하남길, 1996: 141),
이 강건한 기독교도의 육성이라는 개념은 곧 제국주의적 기독교도의 육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사도나 기독교주의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있던 다윈주의(Darwinism)와
융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애슬레티시즘은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이념이 동시에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슬레티시즘은 매우 역설적인 이데올로기로 19세기 영국 스포츠의 조직화와 확산은
결국 공명정대한 영국 신사의 육성 목적과 기독교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강건한 영국인의 육성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실시한 스포츠 교육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지니며, 퍼블릭 스쿨은
사회사적으로 볼 때 귀족 스포츠와 민중 스포츠를 통합하는 역할
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테니스, 크리켓, 폴로와 같은 종목은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축구는 지배계급으로부터
시종 금지를
당하던 민중의 저항적 유희였으나 퍼블릭 스쿨에 전통의 상류계급과 신흥 부르주아
자제들이 함께
수학하면서 계급적 통합을 통한 새로운 신사의 유형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옛 귀족 스포츠와
민중 스포츠를 중산계급 사회의 문화 또는 교육매체로 정착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국의 스포츠 교육은 각종 팀 스포츠가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고, 스포츠의 조직화와 발달에 촉매적 작용을 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교육 및
여가문화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9세기 영국의 애슬레티시즘은 강건한 기독교 신사의 육성을 목표로 한 이념이었으나
기독교주의와 제국주의가 결합된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패러독스(paradox)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스포츠문화 애호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은 영국의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로
수출된 것이며 정치적인 상징성을 띠며 변화한 스포츠는 문화적 양상의 부산물임과 동시에
결속제와도 같은 도구적 작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하남길(1996). 영국 신사의 스포츠와 제국주의. 서울: 21세기교육사.
하남길 외(2008). 체육과 스포츠의 역사. 진주: 경상대학교출판부.
Mangan, J. A. & Walvin, J. et al. (1987). Manliness and Morality.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
글 / 손 환 (중앙대학교 교수)




동대문 운동장!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를 좋아하는 한국인치고
동대문 운동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애교심과 애향심의 발로, 나아가 애국심을 불타오르게 했던 곳,
그곳이 바로 동대문 운동장이다.

그런데 한국근대스포츠의 메카로서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동대문 운동장이 2008년 83세의 나이를 먹고 역사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러한 동대문 운동장을 탄생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일생을 통해
과연 한국근대체육사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또한 유럽의 콜로세움처럼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동대문 운동장의 건설

동대문 운동장은 우리의 뼈아픈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일본의 동궁(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결혼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 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이것은 경성 운동장 사용조례(제1조)의 “경성 운동장은 1924년 동궁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림 1. 경성운동장 평면도



경성 운동장은 경성부의 토목기사인 오모리(大森)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그 구조를 보면 총면적 22,700평, 총 공사비 155,000원(약 34억), 총 수용인원 25,800명이며
육상경기장 8,500평(15,000명), 야구장 5,500평(7,000명), 정구장 1,000평(3,900명)으로 되어 있다.

2. 한국근대체육사적 의미

동대문 운동장은 1925년 종합경기장의 면모를 갖춘 경기장으로서
개장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각종 체육단체, 각급학교, 언론기관에서 주최한
축구, 야구, 정구, 육상, 종합경기 등 전국규모의 대회와 올림픽 및 월드컵축구대회의
출전을 위한 예선전 등의 각종 경기대회가 개최
되었다.


                                                         그림 2. 경성운동장 전경


그러므로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근대스포츠의 메카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스포츠가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스포츠의 발전과 행보를 같이한 역사적인 무대로서
유서 깊은 스포츠시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근대스포츠의 산실로서 83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우리민족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대문 운동장은 비록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민족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대문 운동장을 단순히 철거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후손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정부나 관련부처,
그리고 체육단체 및 체육인들의 지혜를 한 곳에 모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스포츠둥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스포츠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