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체육 ]/체육철학'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2/02/28 패러수트를 활용한 팀 활동으로 건강증진하기
  2. 2012/02/24 체육학의 덕목으로서 거리두기
  3. 2012/02/06 산업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체육활동의 교육적의미 (3)
  4. 2012/01/17 르까프 스포츠와 에레테 스포츠
  5. 2011/12/30 건강의 의미를 생각한다.
  6. 2011/12/12 왜 프로야구는 재미있을까? (2)
  7. 2011/12/02 토끼와 거북이, 과연 누가 진정한 승리자일까.
  8. 2011/11/14 스포츠의 테크놀로지화와 그 결과
  9. 2011/11/10 스포츠 폭력과 요가의 비폭력
  10. 2011/11/08 스포츠에서의 탁월성 - 아레테
  11. 2011/11/02 스포츠현상에서 맞수!
  12. 2011/10/27 왜 프로야구는 재미있을까? (2)
  13. 2011/10/21 몸만들기 열풍을 지켜보며. (1)
  14. 2011/10/13 몸 만들기 열풍을 지켜보며. (1)
  15. 2011/08/26 인간의 존재적 한계 극복을 위한 스포츠 (1)
  16. 2011/04/08 검도에서 아레테와 덕의 의미 (2)
  17. 2011/03/08 입시체육의 빛과 그림자 (1)
  18. 2011/02/07 한국 스포츠문화의 현실과 과제: 학교체육 (1)
  19. 2011/01/24 요가의 실천수행에 대한 소고
  20. 2010/09/17 스포츠문화의 위대한 전환: 학교체육법
  21. 2010/08/20 스포츠와 미의 세계
  22. 2010/08/11 스포츠에 있어서 기(技)와 예(藝)
  23. 2010/08/04 아름다운 폼에서 훌륭한 기술이 나온다. (1)
  24. 2010/07/29 인체미 오디세이
  25. 2010/06/15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의 적용은?
  26. 2010/05/25 ‘삶의 질’ 급변 추세에 따른 체육전공의 미래는? (3)
  27. 2010/04/23 요가를 통해 노인 문제를 극복 하자 (1)
  28. 2010/04/14 몸짱이냐 스포츠맨십이냐? (껍데기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스포츠의 역할) (2)
  29. 2010/03/30 YMCA가 스포츠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 (2)
  30. 2010/03/19 자유로운 춤, 엣지 있는 재즈댄스




글/고문수(인천대학교 강사)




. 들어가는 글 

오늘날 학생들은 지방과 염분 그리고 다량의 당분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하여 예전의 학생들에 비해 비만해지기 쉬운 환경에 있다. 더구나 예전보다 신체 활동량도 현저히 적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을 바꾸고 건강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부모, 교사, 지역사회 구성원의 공동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본 필자는 현재의 체육교육과정이 위의 목표 달성을 위한 개혁과 보완에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좀더 활동적이고 건강한 생활방식을 증진시키기 위한 체육교육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학생들은 가장 활동적인 연령층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놀고, 달리고 깡충깡충 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들은 비활동적으로 되어 점차 체중과다가 되어 간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린이가 10세에 이르면 다양한 흥미, 취미가 생기게 되어 신체활동을 멀리한다. 그들은 어린이라는 명칭에 저항하고 어린 시절의 게임, 놀이들을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교사는 신체 활동이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팀 경기를 통한 경쟁, 패 여부, 검은 띠를 따기 위한 태권도 수련은 이러한 어른들의 잘못된 의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운동에 타고난 소질을 지니지 못한 학생들은 자신이 무능력하고 각광받고 있지 못함을 느끼면 소극적으로 되기 쉽다. 우리는 이제 10살짜리 꼬마를 운동선수의 축소판으로 대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신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학생으로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를 학교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팀 활동 스포츠로 패러슈트를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 패러슈트 활용 사례

 

패러슈트는 참여자 모두에게 신체 각 부위를 다양하게 사용하게 하며 신체의 신경과 근육조정 기능을 향상시킴으로써 높은 운동효과를 제공한다. 정서적사회적으로도 참여자들 간에 신뢰감을 생성발달시키고 개인의 사회적 유대관계를 발전시킨다. 일반적으로 패러슈트는 개인 활동보다는 집단 활동 위주로 운동할 수 있는 교구이며 함께 흔들며 천 아래로 통과하기, 천위에 공들이 춤추도록 하기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사회성, 신체협응, 균형능력 및 시지각 협응향상 그리고 창조성 등을 기를 수 있다. 또한, 패러슈트는 잡고 흔들어야 하기 때문에 손의 근력을 강화시키기에 유용한 측면이 있다.

이에 현장의 교사들은 다음의 열한가지 활동을 토대로 학생들이 체육활동에 즐겁게 참여하는 가운데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해야 한다. 교사들은 각 활동별로 제시된 순서대로 활동을 하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모니터링하고 나서 문제를 정렬해주는 부분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이는 교사들이 패러슈트를 활용한 체육수업의 새로운 프로그램의 구안에 시사점을 제공받을 수 있다.

1. 튕기기

첫째, 모든 학생들이 낙하산 손잡이를 하나씩 잡는다. 둘째, 공을 낙하산 위에 올려두고 교사의 구령에 맞춰서 낙하산을 펄럭여 공을 공중 위로 띄운다. 셋째, 공중 위의 공을 다시 낙하산으로 받는다. 넷째, 공 대신 학생 1명을 낙하산 위에 눕혀서 위의 과정을 반복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안전을 위한 배려 사항으로는 주변에 부딪힐 만한 모든 물건들을 미리 처리한다. 또한, 패러슈트 위에 앉아 있는 학생이 바닥에 부딪히지 않도록 바닥에 매트를 설치한다.

2. 폭풍 만들기

첫째, 모든 학생들이 낙하산 손잡이를 하나씩 잡는다. 둘째, 낙하산을 아래위로 움직여 중간 크기의 물결을 만들면서 시작한다. 셋째, 교사의 지도에 따라 학생들이 따라하면서 폭풍이 다가온다고 이야기해 준다. 넷째,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강해지며 파도는 더욱 높아져간다. 이제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파도는 짧고 자주 끊어진다. 폭풍이다. 이제 폭풍이 지나갔다 등의 적절한 이야기로 학생들의 운동 강도를 조절해나간다.

3. 낙하산 당겨 내리기

첫째, 모든 학생들이 손등을 위로 하여 낙하산을 허리 높이에서 움켜잡은 뒤 어깨너비 발 간격으로 선다. 둘째, 모두 낙하산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셋째, 신호에 따라 팔과 어깨만을 이용하여 허리로 끌어당겨 내린다. 넷째, 위의 동작을 반복한다.

4. 낙하산 끌어올리기

첫째, 모든 학생들이 손등을 아래로 하여 낙하산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뒤 어깨너비 발 간격으로 선다. 둘째, 모두 낙하산을 허리 높이로 천천히 끌어 내린다. 셋째, 신호에 따라 팔과 어깨만을 이용하여 머리 위로 끌어 올린다. 넷째, 위의 동작을 반복한다.

5. 윗몸 감아 일으키기

첫째, 모두 무릎을 구부린 채 앉은 상태에서 낙하산을 허리 높이에서 손들을 위로 하여 잡는다. 둘째, 왼쪽 학생들은 누워 윗몸 일으키기를 한다. 이때 오른쪽 학생들은 몸을 앞으로 내밀어 낙하산을 적당히 느슨하게 해준다. 셋째, 바꾸어 가면서 같은 운동을 반복한다.

6. 손목 돌리기

첫째, 팔을 쭉 뻗은 채 손등을 위로 하여 낙하산을 잡는다. 둘째, 낙하산을 항상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힌다. 셋째, 천천히 낙하산을 가운데로 만다.

7. 팔굽혀펴기

첫째, 모두 머리 위로 낙하산을 들었다가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둘째, 낙하산 끝자락에 양손을 댄 채 다리를 낙하산에서 멀리 뻗는다. 셋째, 낙하산이 납작하게 가라앉을 때까지 가능한 많이 팔굽혀펴기를 한다.

8. 방울 만들기

첫째, 낙하산을 바닥에 활짝 펼쳐둔다. 둘째, 모두 상체를 숙여 낙하산을 손등을 위로 하며 잡는다. 셋째, 신호에 따라 동시에 모두 낙하산을 위로 펼치며 재빠르게 낙하산 아래로 기어들어가 모여든다.

9. 동굴 탐험

첫째, 낙하산을 잡고 있는 학생들이 낙하산을 아래위로 크게 펄럭인다. 둘째, 모든 학생들이 하나! ! ! 을 크게 외치며 낙하산을 펄럭인다. 셋째, 나머지 학생 중 1명이 !”과 함께 낙하산 위로 부풀어있는 동안에 낙하산 아래로 통과한다. 넷째, 아래를 통과하는 학생을 바꾸어가며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안전을 위한 배려 사항으로는 학생들이 엇갈려 달려서 부딪히지 않도록 달리는 방향을 한 쪽으로 정해준다.

10. 낙하산 농구

첫째, 학생들이 둥글게 모여서 낙하산을 조그맣게 하여 잡는다. 둘째, 교사가 23m 밖에서 배구공을 높이 던져준다. 셋째, 낙하산을 잡고 있는 모든 학생들이 이동하여 던져지는 공을 받아낸다.

11. 콩주머니를 보내라

첫째, 모든 학생들이 낙하산을 잡고 둘러선다. 둘째, 낙하산 안에 콩주머니를 하나 넣는다. 셋째,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이름을 호명하면 낙하산을 움직여 콩주머니가 호명된 학생에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콩주머니를 받은 학생은 다른 학생의 이름을 호명한다. 다섯째,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 나오는 글

 

교사들은 학생들이 본능적으로 신체놀이를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므로 체육수업에 있어서 행동변화를 계획하고 새로운 동기부여 전략을 투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체육교육과정은 활동 수준을 높이기 위한 체력과 관련된 활동들, 즉 장애물 코스, 게임, 체조 등을 포함해 왔다. 그리고 교사들은 단기간에 달성해야 할 목표, 체력 테스트 등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러한 활동들을 가르쳐 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평생 체육활동에 가치를 둘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행동기술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사는 학생들이 그들의 체력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발달상 적절한 체력활동 수준을 높이는 모든 신체활동들이 그들의 일생에 걸친 긍정적이며 영구적인 생활방식을 형성하도록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집단 놀이 형태의 신체활동을 통하여 건강한 신체를 기르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한, 교사들은 학생들이 신체활동에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그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메워 줄 수 있는 교육적인 신체활동의 프로그램을 구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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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체육학이 학문공동체 내에 뿌리를 내린 이후 체육학의 당면문제로서 지적되어온 내용 가운데 한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괴리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체육학자와 체육인은 함께 공조해야만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고 따로 놀며, 그러다보니 체육 이론은 설명력이 약하고 탁상공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으로부터 체육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체육 현장과 더욱더 밀착해야만 하며, 체육학자는 체육인 및 체육단체와 거리를 좁혀야만 한다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부응하듯 체육학은 체육 현실과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며 상호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예컨대 체육학자 중에는 체육단체가 제공하는 지원금과 연구비를 수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적지 않으며, 어떤 이는 체육단체의 비상근 임원으로 위촉되어 각종 의사결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들이 수행하는 연구 주제는 대개 경기력 향상과 관련된 내용이거나 체육단체가 추진하는 체육정책을 정당화하는 일과 관련된다. 이와 같은 이론과 실천의 밀착 경향은 체육학분야뿐만 아니라 소위 응용학문으로 불리는 다른 학문분야들에서도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경향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밀착은 학문의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학문이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거리두기가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대 학문은 점점 더 자신의 전제조건인 대상과의 거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거리의 실종과 거리두기 능력의 상실이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 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경고한 바 있다. 거리두기능력을 상실한 학문은 더 이상 학문이 아니다. 거리를 둔 후에나 가능한 지식의 생산이 그러한 학문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학문은 철저하게 현실 종속적이 되며, 더 이상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뒤를 돌보아주는 사회 현실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제약회사와 밀착된 학문은 그 회사가 생산하는 약품의 효능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약품의 부정적 기능에 관한 데이터는 고의적으로 누락시키거나 삭제시키고, 긍정적 효과만을 부각시킨다. 이들의 관심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제약회사의 이익 증진이기 때문이다. 정당과 밀착된 학문 역시 그 정당의 정치활동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모든 정치적 결정은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면적 결과를 동시에 생산하지만 이 학문은 자신이 옹호하는 정당의 정치적 결정이 생산한 결과의 양 면 가운데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다룰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로 회귀하는 학문, 역사적으로 퇴보하는 학문을 볼 수 있다. 중세 이후 힘겨운 투쟁 끝에 종교와 정치라는 외압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던 자유 학문, 고유한 작동논리에 따라 기능하는 자율적 사회체계로 분화한 자유 학문이 다시금 자발적으로 종속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본다. 돈과 권력의 하수인, 기업과 정당의 하청업자로 전락하는 학문을 본다. 체육학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체육학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행로는 한 마디로 실천에 의한, 실천을 위한, 실천의 이론이다. 응용학문으로서 체육학이 표방함직한 슬로건이다. 그러나 진실로 실천을 위한 이론이기를 원한다면 실천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거리두기는 모든 학문의 필수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체육학은 거리두기를 포기한 듯하다. 명성 있는 체육학자들은 대개 학문 외적 이유에서 체육단체와 이권단체, 행정단체 주변을 맴돈다. 이들의 바람은 단 하나, 돈 또는 권력의 획득이 그것이다. 체육관련 단체와 조직으로부터 지원비와 연구비 명목으로 돈을 타내거나 아예 그곳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각종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권력을 행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학자들에게서 질 높은 학문적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먹이를 던져주는 손은 물지 않는다. 이로부터 체육학의 학문적 중립성이 훼손될 위험이 생겨나게 된다. 이들이 생산해 낸 지식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그것은 이 단체들의 존재와 활동, 그리고 결과들을 정당화시켜준다는 점에서 편파적이다.

체육실천을 정당화시켜주는 이론으로서 체육학은 여러 가지 복잡성 감축방식을 통해 체육과 체육단체의 기능과 역할을 과대 강조한다. 복잡성 감축방식이란 체육과 체육단체가 야기 시킨 복잡한 결과들 가운데 자신과 체육단체의 입맛에 맞는 결과만을 선택하여 그것이 모두인양 주장하는 방식이다. 학문의 사태관찰도 복잡성감축이지만 서로 사용하는 관찰코드가 다르다. 학문이 진리/비진리라는 이분법적 코드에 의존해서 사태를 관찰한다면, 사태 종속적 학문은 정당성/비정당성, 권력습득/권력상실, 연구비수주(지불)/연구비 비수주(비지불), 높은 반향력/낮은 반향력 같은 구별들에 의존하여 관찰한다. 이러한 학문에게 진리/비진리 코드는 이차적일뿐이며, 이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 볼뿐 보고 싶지 않은 면은 외면한다.

체육학이 참된 의미에서의 학문이고자 한다면 하청업자의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생산과 무관한 체육인문학은 더더욱 안 된다. 하청업자는 의뢰자의 요청에 근거하여 의뢰자의 관점에서 사태를 관찰하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하청업자는 의뢰자가 설정한 애초의 목적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에 하청이 중단될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노력한다. 재판에 이김으로써 의뢰인을 보호하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법조인으로부터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듯이 관련영역의 요청에 따라 그것을 정당화하고 감싸주는 학자로부터 진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존의 체육학 발전방향 담론이 체육 현장과의 친밀성을 강조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대상에 대한 낯설음이다. 체육학계에서 늘 강조하는 현장과의 연관성이나 실용성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진술은 듣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학자에게 낯설음이 필요하다는 말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Stichweh의 말을 빌리자면 학문은 낯설음의 관점이 분화한 것이다. 즉 학문은 일상적인 자명성과 인과관계에 대한 추정을 의심하며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들을 전혀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또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어야만 한다. 스포츠에 대한 낯설음이 스포츠에 대한 무관심 또는 스포츠의 특수성에 대한 무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의 본분은 정당화가 아니라 회의주의다. 체육학은 이와 같은 회의주의적 관점을 회복해야만 한다. 특히 비-테크놀리적 지식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체육인문학은 이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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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형석(계명대학교 교수)


요즘 아이들은 깊게 생각하길 싫어한다. 진지하게 사색하거나,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보다는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농담 같은 가벼운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고전보다는 만화책을 좋아하고, 명화보다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를 즐겨 관람한다. 내면적 성숙이나 깊이 있는 성찰보다는 외적 치장이나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극기와 인내, 협동심과 단결력을 요구하며, 고통스럽고 힘든 체험을 수반하는 신체활동보다는 앉아서 마우스를 클릭하며 손쉽게 긴장감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컴퓨터게임에 몰두하기를 좋아한다. 신체활동을 수반하는 활동에 참여하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활동보다는 가만히 앉아 속도감을 즐기거나 자극적인 쾌감을 맛볼 수 있는 놀이기구를 선호한다. 그래서인지 힘든 일을 잘 견디지 못하고, 행동방식에 있어 다분히 충동적이며, 몸과 마음이 매우 약하다. 깊게 생각하길 싫어하다 보니 사소한 일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힘든 일을 잘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이다 보니 순간적인 자해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기성세대에게서도 발견된다. 예전 같으면 참고 견딜 일로 이혼하거나 별거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으며, 끼어들기, 신호무시, 과속, 경적 등이 교통문화의 일상이 되었고, 조급함, 신경질, 충동적 행위 등이 일상적 행위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일까?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여기서는 산업화가 수반한 의식의 압축이란 측면에서 설명해 보겠다.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수반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서 공정과정, 즉 프로세스를 현저하게 감축시켜 주었다. 우리들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수고 없이, 또는 극히 단축된 프로세스에 참여하는 수고만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쉽게 손에 넣거나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지하철이나 버스, 기차, 자가용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먼 거리도 손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동 냉난방 시스템 덕분에 계절에 구애 없이 언제나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음식물을 얻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오랜 시간 발품을 팔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렇듯 산업화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프로세스를 현저하게 감축시켜주었다.

프로세스의 감축은 인간의 생활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그 첫째는 삶의 과정에서 인간의 힘과 수고로움이 크게 덜어진다는 뜻이며, 둘째는 시간이 단축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에서 힘과 수고로움이 크게 덜어진다는 것은 삶이 편리해졌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인간적 질이 점차 떨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시간의 단축이 인간적 질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의미, 인간적 질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라고 모두 인간이냐? 인간이 되어야 인간이지라는 말을 듣는다. 인간이라면 모두 인간이지 인간이 아닌 인간이 있을까? 모순이 있는 진술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곰곰이 숙고해 보면 그리 모순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자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그와는 좀 다른 인간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말에서 인간다움이 갖춰진 인간이 바로 후자의 인간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요인과 관련하여 교육, 사회화, 문화, 윤리 등 여러 측면에서 답을 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의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요인은 육체 보다 의식이라는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이가 불의의 사고로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의 모습과 형체가 달라질 텐데 그 때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 외양이 변했다고는 말할지언정 그 인간이 변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이 육체적인 외양은 똑 같은데도 어느 순간부터 아주 진지한 사람이 되었다거나 또는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동일한 육체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요인은 육체 보다는 의식에 있다.

한편 인간의 의식은 시간적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의 의식이 시간 속에서 자신을 키워 나가면서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몸은 음식을 먹어야 성장하지만 의식은 시간을 먹어야 성숙해진다는 뜻이다. 터미네이터나 스피드 같이 망막만을 즐겁게 하는 영화와 닥터 지바고 같이 마음 속 깊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내는 영화가 우리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를 비교해 보면 의식의 발달과 시간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영화를 보는 순간순간 각 장면이 제공하는 정보들은 단지 우리의 망막까지만 왔다가 금방 뇌리에서 사라져버리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시각을 통해 우리의 의식으로 들어와 몇 바퀴 회전을 하며 오랜 시간 머물러 있다. 정보가 의식에 머문 시간이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정보가 남아있는 시간이 길수록 의식이 깊어지고 확대되기 때문에 전자보다는 후자의 영화가 의식의 성숙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도스트옙스키나 톨스토이의 명작이 무협지보다 의식 성장에 더 큰 도움을 주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식은 시간적 존재라는 말, 즉 시간을 먹고 자라는 존재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용을 케이블카와 등산에 비유해서 다시 한 번 설명하겠다. 산업화가 수반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고산지대에 케이블카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보통사람들은 물론이고 산에 올라갈 수 없었던 사람들, 특히 신체 허약자나 장애인도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손쉽게 정상에 올라 멋진 조망을 즐길 수가 있게 되었다. 프로세스가 단축되었고, 그 결과 삶이 편리해졌으며, 짧은 시간 내에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산업화가 가져다준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케이블카가 설치되면서 걸어서 등산하는 풍습이 없어졌고, 그 결과 등반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던 상호 부조의 우정, 노력, 인내심, 용기와 같은 덕의 함양을 위한 훈련이 사라졌다. 또한 케이블카를 타고 가며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만을 편안하게 구경할 뿐,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체험하며 보다 깊이 생각하고 고뇌하는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케이블카의 설치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식이 보다 확장되고 성숙될 수 있는 기회가 축소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등산 같은 체육활동은 케이블카라는 과학기술에 의해 사상된 프로세스를 복원시켜 줌으로써 덕의 함양을 위한 훈련 기회와 압축된 의식을 다시 확장시켜 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비단 등산만이 아니다. 축구, 농구, 배구 등의 구기, 태권도, 유도, 씨름, 검도 등의 투기, 그리고 육상과 체조 등의 스포츠는 아직 기술적 연관에 의해서 프로세스가 사상되지 않은 영역들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이 프로세스가 사상되지 않은 활동을 직접 행함으로써 기쁨과 고통을 맛볼 수 있고, 땀을 흘리면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으며, 성취감이나 패배감을 맛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과학기술에 의해 사상된 프로세스를 다시 복원시켜 준다는 점에서 활동 그 자체로서 교육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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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최의창(서울대학교 교수)


체육하는 우리에게 낯익은 표현이 한 가지 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표어다. 천 육백년 만에 다시 시작된 근대 올림픽의 모토로 사용된 유명한 문구다. 인간이 지닌 스포츠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노력을 짧고 강하게 표현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구호다. 상대를 이기고 자신을 극복하도록 최고조의 기량을 폭발시키라는 주문이다. 이 말의 로마어 표기는 <Citius, Altius, Fortius>. CAF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급 스포츠브랜드의 명칭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 문구는 <스포츠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라는 쿠베르텡의 유명한 연설 구문과 함께, 스포츠의 진정한 정신을 드러내어 알려주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사랑받고 있다. 더욱 더 빨리 달리고, 더욱 더 높이 뛰어오르고, 더욱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스포츠의 수월성을 높이고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상대와의 멋진 경쟁을 통해서 각자가 지닌 탁월성을 최고조로 높이고 자신을 더욱 더 개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스포츠가 지향하는 바가 경기력 향상에만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는 다른 방향으로도 마음을 둔다. 그리고 그 방향은, 겉으로만 본다면, 경기력 향상과는 정반대쪽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스포츠는 운동안 심화라는 방향을 지향하기도 한다. 스포츠는 시합에서 이기는 것으로만 그 본래적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는 경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실행하게 되느냐의 차원도 얻고자 한다. 얼마나 잘 하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잘 하느냐도 눈여겨본다. 스포츠는 멋진 플레이, 아름다운 경기, 올바른 대적 등과 같은 진선미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포츠의 최초 중흥기였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추구되었던 한 가지 체육의 이상은, 아주 멋진 발음을 지닌, “아레테”(arete)라는 가치였다. 아레테란 어떤 활동이던지 그것의 기술적 최고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내는 사람의 인격적 덕스러움을 함께 의미한다. 그리하여 아레테란 한 사람이 지닌 기능적 차원과 심성적 차원의 최고 상태를 동시에 갖춘 이상적인 가치로서 추구되었다. 아레테는 스포츠의 장면만이 아니라, 교육, 정치, 경제, 의료, 군사 등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가치 가운데 하나로서 추앙되었다.

스포츠의 장면에서 아레테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멋있게 올바로 실행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우승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우승이 정정당당히 얻어지는 것을 뜻한다. 가장 많은 득점을 해서 최고의 골게터가 되어야 하되, 멋지고 당당하게 득점을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우승하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지닌 최상의 기량의 펼치고 최선을 다 한 것에 스스로 만족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스포츠기량과 스포츠맨십이 하나가 된 플레이를 펼쳐내는 것을 이야기한다.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스포츠 아레테는 기와 도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기능적 방향으로 내치닫는 스포츠를 르까프 스포츠”(Le CAF sport)라고 부른 적이 있다. 르카프 스포츠는 기술적으로 더 잘 하는 것을 추구하는 스포츠다. 상대를 누르고 승리와 우승을 쟁취하기 위한 경기능력 증진으로 모든 것을 가늠하는 스포츠를 말한다. 골을 더 많이 넣고, 더 큰 홈런을 때리고, 더 높이 뛰어 오르는 스포츠를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르까프 스포츠를 다대고 스포츠”(多大高 스포츠)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이>를 부르짓는 스포츠다. 표현이 약간 달라서 그렇지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를 외치는 올림픽 모토와 한 가족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기량과 심성의 합일을 추구하면서 아레테를 지향하는 스포츠를 아레테 스포츠”(Arete sport)라고 부른다. 아레테 스포츠는 기술적 차원과 심성적 차원이 하나가 되는 것을 희망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멋있게 시합하는 것을 가치롭게 여긴다. 관중에게 맹렬히 추앙받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편은 물론 상대편도 함께 승리하기를 기대한다. 스포츠가 좀 더 참되고, 좀 더 선하고, 좀 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도록 바란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아레테 스포츠를 진선미 스포츠”(眞善美 스포츠)라고 일컫기도 한다.

다대고 스포츠와 진선미 스포츠는 수퍼마켓에서 파는 두 개의 물건처럼 서로 다른 진열대에 놓여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이 둘은 하나의 물건이다. 하나의 물건을 부르는 두 가지 명칭이다. 이 둘은 하나의 실재이다. 하나의 실재가 드러내는 두 가지 상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농구가 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는 가에 따라서 나에게는 다대고 농구와 진선미 농구가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농구를 실천하는 가에 따라서 나는 르까프 농구를 하던가 아레테 농구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농구를 구분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의 수준과 방식이다. 르까프 스포츠와 아레테 스포츠는 한 가지 스포츠의 두 측면을 부르는 이름들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스포츠를 배울 때 우리는 르까프적 차원과 아레테적 차원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 내 개인적 체험으로는 전자에 초점을 맞춰서 배운 적이 훨씬 더 많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도 그다지 바뀔 것 같지는 않은 상황이다. 욕구충족과 승리쟁취가 일상생활의 일차 기준인 현실 세계에서는 다대고와 르까프가 발등의 불이고, 진선미와 아레테는 강 건너 불에 불과할 뿐이다. 전자는 시급한 진화의 대상이고 후자는 느긋한 구경의 대상일 뿐이다. 일상의 스포츠에 있어서 대다수의 지향은 르까프 방향으로 쏠려있기 마련이다. 이겨야 기쁘고 얻어지는 것이 있고 뿌듯하지, 지게 되면 많은 것이 부정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현실이 그렇기는 해도, 다대고 스포츠가 기쁨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르까프의 방향으로 돌진한 한국 스포츠가 보여주는 양면성을 한 번 보라. 올림픽에서의 상위성적, 피겨와 골프에서 세계적 스타선수의 등장, 국제대회의 유치 등등 참으로 대단한 성취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와 함께 끊이지 않고 드러나는 감독의 선수()폭행, 선수의 승부조작, 심판의 편파판정, 임원의 비리월권 등등 참으로 대단한 창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진선미와 아레테의 정신이 스포츠 세계의 전 영역에서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기는 것과 최고가 되는 것만이 대세인 한국 스포츠계는 아레테와 진선미의 가치를 높이 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대고가 승하면 진선미가 패하고 르까프가 진하면 아레테가 퇴하게 되는 것이 세상지사다.

공인된 스포츠 강국에 이미 진입한 우리에게는 이제 그동안 소홀히 해왔던 스포츠의 소중한 가치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기는 것, 잘 하는 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되찾아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 가치는 바로 아레테요 진선미다. 한국 스포츠는 이제 아레테 스포츠를 지향하고 진선미 스포츠를 추구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있다. 금메달과 우숭컵의 찬란함에 넋놓고 혼뺏기기를 멈추고, 스포츠맨십과 스포츠문화와 스포츠정신을 고양시키고 향상시키는 일에 기운을 쏟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때이다. 이것이 우리가 스포츠 강국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스포츠 부국, 스포츠 선진국의 품위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어디에 있나? 어떻게 그 길을 찾아 나서는가? 나는 그 길이 교육에 있다고 확신한다. 아레테 스포츠를 지향하는 스포츠 부국으로의 길은 바로 스포츠 교육의 힘으로 닦아야 한다. “스포츠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코칭)을 제대로 잘 해내는 것이야 말로 르까프 스포츠 나라에서 진선미 스포츠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첩경인 것이다. 스포츠 게임강국에서 스포츠 문화부국으로 성숙할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에게, 노인들에게, 선수들에게, 감독들에게, 정치인들에게, 행정가들에게, 어머니들에게, 아버지들에게 스포츠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포츠선진국의 국민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진선미의 가치는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학습되었다. 다대고의 가치는 본능의 강화로 적절히 충족될 수 있다. 하지만, 참됨과 올바름과 아름다움의 가치는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적 조처 없이는 사람에게 갖추어지지 않는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소년은 교육을 통해서야 인간소년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네 발로 있다가 두 발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온전한 인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진선미의 가치들이다. 다대고와 르까프만을 강조하면 우리 앞에 등장하는 인물은 살벌한 스포츠 정글에서 자라나 생존본능으로 가득한 맹수의 눈을 가진 스포츠 늑대소년과 소녀들일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참다운 운동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아레테 스포츠 교육인 것이다.

아레테 스포츠 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여, 그것은 인문적 방식으로 한다. 인문적으로 스포츠 교육하기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스포츠를 가르치고 배울 때, 인문적 지혜와 서사적 체험을 동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문적 지혜와 서사적 체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스포츠를 내용으로 하는 스포츠 문학, 스포츠 예술, 스포츠 종교, 스포츠 역사, 스포츠 철학적 지혜와 체험들을 함께 맛보는 것이다. 야구 게임을 배우면서 야구시, 야구소설, 야구자서전, 야구에세이, 야구회화, 야구음악, 야구조각 작품들을 음미하고 감상한다. 야구와 기독교, 야구와 불교, 야구와 신앙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면서 깨달음의 체험을 추구한다. 야구 시합을 하면서 듣기와 보기와 읽기와 그리기와 생각하기와 느끼기 등 전신체적 정서반응을 도모한다. 스포츠의 인문적 체험과 인문적 지혜의 스포츠적 활용을 통해서 스포츠를 배우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에 참됨과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심어줄 수 있게 된다.

르까프 스포츠와 아레테 스포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하나의 동전이 지니고 있는 두 측면이다. 그동안 앞면만 주시했다면, 이제는 뒷면도 보아야 할 때다. 화폐가 액면가만큼 가치로우려면 양면이 다 제 형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스포츠로 국격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진선미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이다. 우리에겐 그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안목이 필요하다. 나는 그 안목을 운동안이라고 부르며, 그 시력을 밝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스포츠의 진선미적 차원을 더욱 깊게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스포츠를 <더 참되게, 더 올바르게, 더 아름답게 하는 일> 즉 운동안을 심화시키는 일은 인문적 스포츠교육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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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송형석
(계명대학교 교수)




요즘 건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돈과 노력,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이에 비례하여 건강관련 업종이 끝을 모르고 번창하고 있다. 최근 사회체육이다 생활체육이다 하여 체육 및 스포츠 영역이 호경기를 맞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건강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무관하지 않다.

건강에 대한 관심은 우리 시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간사를 통틀어 어느 시대고 건강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였던 퇴계 이황 선생은 유학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活人心方이라는 건강 유지 및 향상을 위한 체조서를 상세하게 필사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Politica에서 건강의 윤리적 가치를 언급한 바 있고,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나리스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게 하소서(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건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건강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건강해야만 인간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답변에 대해 독자들은 건강해야만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고? 도대체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뭔데?’라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인간적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단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들과 달리 삶을 자주적으로 영위하는 존재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과 삶을 자주적으로 영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가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는 삶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이끌고 가는 삶이다. 인간을 제외하고 어떤 동물도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고 가지 못한다. 그저 삶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갈 뿐이다. 배고프면 먹이를 찾고, 졸리면 자고, 번식기가 되면 짝짓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듯 동물은 본능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간다. 인간에게도 이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과 달리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고 가는 면이 더욱 강하다.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능동적으로 삶을 이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예술가로서 아름다운 예술품을 창작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운동선수로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고 싶어 할 수도 있으며, 소설가로서 도스토옙스키처럼 불후의 명작을 쓰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작업실에서 침식을 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거나,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며 트랙을 달리거나, 밤을 꼬박 새우며 습작 연습에 몰두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그 조건 가운데 필수적인 두 가지는 생명의 소여와 성숙이다. 생명의 소여가 인간적 삶의 필수적 전제라는 점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상론하지 않겠다. 한편 아직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나 청소년으로부터 인간다운 삶,
즉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삶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을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노력을 양육과 교육이라고 부른다. 양육이 신체적 성숙을 돕기 위한 노력이라면, 교육은 정신적 성숙을 돕기 위한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소여와 성숙 이외에도 매우 많은 조건들이 요구된다. 이 조건들을 정리하면 대략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조건으로 축약시킬 수 있다. 인간은 산소가 적당히 포함된 대기, 적절한 온도, 그리고 적당한 중력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이 이외에도 원활한 신진대사, 적절한 호르몬 분비, 적당량의 비타민과 무기질 공급, 충분한 영양공급, 면역체계의 원활한 활동 같은 요인들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물리적 조건이다. 한편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목표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타인과 원만하게 상호작용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타인을 이해시킬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언어와 기호들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이것들이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요구되는 사회적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일이든 실제로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주의력과 기억력, 그리고 감성 및 지성 능력 같은 심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또한 타인의 관심과 사랑, 자신을 인격체로서 인정해 주는 타인의
태도
, 가족, 친구, 동료와의 감정적 교류, 자신감 같은 심리적 요소들도 필요하다.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하거니와 가능하더라도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 조건들이 적절하게 갖추어질 수 있도록 매 순간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간다. 이상과 같은 설명을 듣고 인간적 삶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을 위해 이 조건들을 조금 더 간명하게 표현하겠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이라는 조건이 요구된다. 그렇다 건강이란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이 적절하게 잘 갖추어진 상태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은 인간적으로 살기 위한 전제이며, 필수조건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만이 자신이 바라는 바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도와 계획을 자주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만이 자신이 성취한 바를 누릴 수 있다. 이제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건강해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강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되새겨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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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효(서울대학교 강사)

지난 회에서 우리는 프로야구의 서사적 측면을 페넌트레이스의 기호학을 통해 살펴보았다
. 서사(敍事)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과정은 서사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리킨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영화, 그리고 소설 등의 모든 스토리는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이런 서사구조에 의해 풀어나간다. 그래서 페넌트레이스의 기호학은 서사구조의 충실한 재현에 다름 아니다.


이번 회에는 프로야구가 만드는 이야기의 내적 요소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 우선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을 갖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처하는 현실은 늘 이항대립적이다. 선과 악, 영웅과 악당, 행운과 불운, 우연과 필연, 그리고 삶과 죽음 등 대부분의 서사는 이항대립의 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야구는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서사구조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스트라이크와 볼, 세이프와 아웃, 투수와 타자, 공격과 수비, 위기와 찬스 등은 야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기표들이다. 이 기표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프로야구에서의 이항대립이 소설이나 영화와 같지 않다는 점이다. 소설과 영화의 이야기가 작가나 시나리오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에 비해 프로야구의 이항대립은 응원하는 팀에 따라 상반되어진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세이프는 환호가 되지만 상대 팀에게는 탄식이 된다. 다시 말해 스트라이크와 볼, 세이프와 아웃은 어디까지나 양가(兩價)적이다. 이처럼 한 가지의 사건이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양가성으로 인해 야구는 자주 인생에 비유되어 진다. ‘위기 뒤의 찬스란 뒤집으면 찬스 뒤의 위기가 되고, ‘9회말 역전 홈런은 승자의 기호임과 동시에 패자의 쓰디쓴 교훈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야구를 생각의 스포츠라고 하는 것이다.

야구는 게임의 구조에서 이미 생각을 강요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생각을 하면서 보아야 야구의 재미는 배가된다. 야구가 생각의 스포츠인 이유는 게임의 진행이 순간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1. 사이의 미학

여타의 종목과 달리 야구는 투수의 투구와 타자의 타격이 부딪히는 순간 이루어진다. 투수는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겠다는 의사를 타자에게 전하고 타자는 그 의사를 읽고 타격에 임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타격의 의지가 없는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없다. 그러나 투수와 타자의 의지가 일치되기까지는 몇 가지 절차를 거친다. 투수는 포수와 사인을 교환하고 타자는 보통 두 세 차례 방망이를 휘두른 후 배팅 박스에 들어선다. 때로 모자와 헬밋을 고쳐 쓰기도 하고 운동화 끈을 만지기도 한다. 이러한 동작들은 언뜻 불필요해 보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경기 외적인 의식들이다. 오히려 긴장과 흥분을 끓게 만드는 전희(前戱)와 같다.

볼과 스트라이크, 인코스와 아웃코스, 높은 쪽과 낮은 쪽, 직구와 변화구 등 투수의 공이 손가락을 떠나기 이전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구질의 조합을 생각해 보라. 이윽고 송진팩의 하얀 분말이 터질 때 동시에 밀려드는 긴장감은 미구에 찾아올 열광과 낙담을 한껏 가두어 놓는 멈춘 호흡이지 않는가. 이처럼 야구는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지는 선택과 수읽기가 9회말 3아웃까지 이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흥분과 긴장을 끊임없이 당겼다 늦추었다 한다. 이 이완과 수축의 반복이 여타의 스포츠와 확연히 구분되는 야구의 즐거움이자 매력인 것이다. 이를 우리는 사이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이의 미학은 볼카운트라는 기표에 의해 드러난다. 볼카운트란 이를테면 투수와 타자 간에 이루어지는 대결의 기승전결이며 긴장과 흥분의 게이지에 다름 아니다. 이 진행의 시간을 매우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볼 배합의 예측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작전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사만루, 12,3, 22, 무사 2루 등등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상상력과 작전의 경우의 수는 게임을 읽는 사람에 따라 무한대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전체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이야기소(이야기의 작은 단위를 말함)’이며, 이야기소의 합이 한 판의 야구 게임이 되는 것이다.


2. 미디어의 적자(嫡子)

사이의 미학이 긴장의 수축과 이완을 가능하게 만든다면 긴장에서 놓여나는 시간은 방송 미디어의
절묘한 소재
가 된다
. 가령 매 이닝 공격과 수비가 교체되는 때라든지 릴리프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때의 짧은 시간은 방송 미디어에게 더할 나위없는 호재를 제공한다. 그 공백의 시간 동안 내레이션으로 채울 수 있고, 심지어 주 수입원인 광고의 화면으로 바꿀 수 있다. 어느 스포츠가 게임의 도중에 광고의 송출을 가능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해설자의 멘트를 들어보라. 매 이닝 중요하지 않은 공격과 수비는 없으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투타의 대결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야구는 스포츠 미디어의 총아이며 적자인 것이다. 그래서 미디어는 야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무수히 많은 인생의 은유를 생산한다. 이것이 야구의 또 다른 기호학이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기표는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의 기의가 되고, 위기 뒤의 찬스,
혹은 찬스 뒤의 위기는 처세의 기의로 탈바꿈한다
. 때로 삶의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은 야구는 한 방이라는 기호에 자신을 위탁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작용들은 방송 미디어의 끊임없는 담론의 생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야구를 즐기는 관중 혹은 시청자의 생활세계의 반영을 전제로 한다. 요컨대 야구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신체의 야성적인 움직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순한 기표에서 무수히 많은 삶의 기의를 해석하는 기호의 집적체인 것이다. 영웅의 부재와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
프로야구는 이것에 굶주린 현대인에게 야성(野性)을 건드리는 오디세이의 긴 이야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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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박현애(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유명한 이솝우화 중 하나로 토끼와 거북이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빠른 동물의 대명사인 토끼와 느림의 대명사인 거북이가 달리기 경기를 하게 되고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있던 토끼가 경기 도중 잠이 들고 꾸준히 경기에 임한 거북이가 승리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토끼와 거북이 이솝우화는 자신을 과신한 사람과 꾸준히 일에 응한 사람의 결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달리기 경주를 통해서 알게 해주는 또 다른 다양한 이야기를 낳게 한다.

스포츠 상황에서 본다면,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경기할 일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스포츠에서의 경쟁은 우선, 공식적인 경기의 경우, 기량이 비슷하거나 혹은 비공식 경기에서는 신체적 발달상태가 유사한 경우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과 프로선수가 농구 경기를 하는 일도 없고, 진지한 스포츠 상황에 놓여지는 일은 만무하다. 또한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거북이는 토끼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깨우고 같이 경쟁해야 한다는 스포츠 윤리적 측면도 있으나 이러한 두 가지 전제를 차치하고 스포츠 상황에서의 토끼 같은 선수와 거북이 같은 선수에 대하여 스포츠가 주는 사회 본질 중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


김동규
(2001)는 스포츠의 본질을 사회문화적 측면, 유물론적, 미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였다. 사회문화적 측면은 스포츠의 놀이의 본질에서 시작되어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제도화 되어 간다는 접근을 의미하며, 스포츠는 사회화를 통하여 문화로 발전을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물론적 측면은 노동을 위한 연습의 필요에 따라 스포츠가 생성되었다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 미학적 접근은 스포츠를 행하고 난 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을 중시한다. 미적체험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기도 하며 이는 주관적 체험으로서 체험의 유무와 정도가 개인에 따라 다르므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스포츠에 대한 가치를 논해야 함을 뜻한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접근은 사회문화적, 유물론적 접근으로 거북이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경쟁과 투쟁의 요소이다.

많은 학자들에게 스포츠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경쟁과 투쟁의 모습으로 정의되어 왔다. 따라서 스포츠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 신체활동을 통하여 내포된 경쟁에 우선적 가치를 둔다. 스포츠에서의 투쟁과 경쟁은 스포츠에 수많은 감동적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이는 다른 선수들에 귀감이 되거나 혹은 이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마음에 동요를 가져온다. 이는 스포츠 활동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스포츠가 제도화 되어 문화로 발전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 활동에 수반되는 은근과 끈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거북이와 같은 느릿해도 꾸준한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기량이 뛰어나지만 더 이상의 노력을 게을리 하는 토끼로 부터 자만감이 주는 위험성을 알게 된다
.

두 번째 접근으로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미학적 측면에서 다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경기의
중요도를 떠나서 선수 개인의 경험에 집중하며
,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개개인 마다 다를 것 이고 이에 자유로운 접근을 통해 스포츠가 가지는 올바른 가치에 대한 의미가 재조명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로버트 짐러(1991)는 파라독스 이솝우화라는 책을 통해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다음은 로버트 짐러의 파라독스 이솝우화 중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내용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에게 다른 동물들이 이야기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토끼가 너 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
너만 빼놓고 다 아는 사실이야
”-한번 다른 상대를 이겼다고 도취되지 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고 할 수 있다
.-

단 한번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로 승자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거북이가 이길 수 있지만 그 외에 벌어질 수많은 경기에서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없다. 스포츠에서의 기록은 이솝우화와 같이 일회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북이가 한번 얻은 영예로 전설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거북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슈가 되는 중요한 대회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끈기를 보여주며 우승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나 토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중요한 대회에서 성과가 좋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평가된 실력이 있으면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 경쟁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이에 도전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모든 선수들은 올림픽의 금메달을 따기 위해 운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요 대회가 갖는 의미는 인간의 숭고한 도전 외에도 지대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선수들이 무엇을 위해 운동하며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감내하는지에 대한 개인의 경험적 측면에서 심오한 고찰의 수반이 요구된다.

, 그렇다면 토끼와 거북이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일까. 끈기의 모습을 보인 거북이와 절대적 실력을 갖춘 토끼 중 진정한 승자를 정하는 데에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선수가 토끼와 같은 절대적 능력을 갖춘 강자가 되기 위해 거북이처럼 인내하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경기의 실적만을 매스컴을 통해 인지하면서 우리가 간과해 온 훌륭하지만 불운한 선수가 있지는 않은지, 스포츠의 문화적 측면이 주요 경기나 주요 실적에 편향되어 스포츠의 경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재고해 봐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경쟁과 그 안의 숨겨진 다채로운 의미를 이야기할 때, 거북이형 노력과 토끼형 재능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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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송형석 (계명대학교 교수)


스포츠는 근대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던
19세기 초기에 영국에서 출현했다. 이 시기는 서구사회 전체가 진보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다. 근대유럽인은 테크놀로지를 진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믿었기 때문에 테크놀로지는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어 육체가 담당하던 역할이 대부분 기계에 의해 대치되었으며, 이에 비례하여 육체의 실용적 가치는 점차 평가절하 되었다. 이에 따라 기계적인 것만이 근대적이고 육체적인 것은 근대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며, 철저하게 육체 의존적 활동이었던 스포츠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스포츠는 바로 이 시점에서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함으로써 전근대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던 육체를 근대의 영역에 편입시켰다. 이제 스포츠는 이중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한편으로 보다 빠르게, 보다 높이, 보다 강하게라는 근대올림픽모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진보이데올로기를 표방함으로써 근대의 영역에 속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전근대적인 육체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전근대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근대적인 육체를 통해 근대의 진보이념을 실현하고자하는 스포츠의 노력은 그 출발점부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다윈의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육체기능의 진화, 육체능력의 향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디고 느리게 진행되는 육체의 진화, 가시화되지 못하는 육체능력의 진보만으로는 스포츠가 진보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스스로 진보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가속화된 진보, 단시간 내에 가시화할 수 있는 진보의 증거가 필요하다. 즉 선수들의 육체기능, 다시말해 경기력을 인위적으로 가속화시켜주고 가시화시켜주어야 한다. 이러한 요청은 테크놀로지의 도입을 통해서 충족될 수 있었다.

경기력을 좌우하는 요인은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 대개 보통 이상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선수가 된다. 그러나 선수가 된 이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재능만으로 부족하다. 다른 선수들 역시 재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경기력을 좌우하는 요인은 후천적 노력으로 전환되며, 선수들은 다른 선수보다 뛰어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식사를 조절해고, 인위적으로 계획된 강도 높은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예외 없이 정신 및 체력의 한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선수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체력의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이 오며,
불안, 초조, 긴장 등으로 집중력이 저하되는 경우도 생긴다.

장시간 강도 높게 진행된 훈련은 신체부상을 유발할 수 있고 심리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수도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은 계속되어야 한다. 선수로서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하느냐 아니면 대열에서 낙오하느냐의 기로에 선 선수들은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 그리고 경기력 향상을 위해 가능한 모든 조처를 동원한다. 이 과정에서 테크놀로지, 특히 스포츠과학과 과학적 훈련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근대스포츠가 경기력향상을 위해 도입한 테크놀로지는 산업과 노동 영역에서 생산능력 향상을 위해 개발된 것이다
. 근대의 테크놀로지는 인간과 생산기계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서 생산력향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해 왔다. 생산력 저하의 주요 원인은 피로, 졸음, 미숙 같은 정신 및 신체적 능력의 한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로의 발달로 각성제와 강장제 같은 의약품이 개발되었으며, 이것들은 생산능력 향상을 위해 이용되었다. 이후 쾌감, 공격성증대, 슬럼프극복을 목적으로 하는 향정신성 의약품도 개발되었으며, 이것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다음 단계는 도파민과 엔도르핀 같은 신경전달물질 또는 근육발달을 촉진시켜 주는 성장호르몬이나 성호르몬 같이 인체 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는 소량의 물질을 인위적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 이 물질들은 인체 내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하게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테크놀로지는 이것들을 인위적으로 대량생산하였으며, 그 결과 인간의 작업능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노동과 산업영역에서 작업능력향상을 위해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철저하게 목적합리적 성격을 띤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능력향상이라는 목적이 특정 가치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개발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크놀로지는 가치중립적이며, 탈도덕적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능력향상과 관련하여 취해진 조처들이 선한지 악한지,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능력향상에 기여하는지 아닌지만 사실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는 묻지 않고 진보를 위한 수단의 증식에만 관심을 기울여 온 근대 테크놀로지와 마찬가지로 근대스포츠 역시 무엇을 위한 기록향상인가는 묻지 않고 기록 향상을 위한 수단증식에만 몰두해 왔다.

근대의 테크놀로지와 근대스포츠는 공통적으로 진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능력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 수단을 개발했으며
, 이에 힘입어 인간의 능력, 선수의 경기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많은 신기록이 쏟아졌다
. 그러나 그에 따른 가치합리성의 퇴조와 목적합리성의 대두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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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량희 (전남대학교 외래강사)



근대화 과정을 겪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삶의 생활수준 변화가 생기면서 특별한 신체활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 따라서 직업적인 신체활동 뿐 아니라 취미활동을 통해서도 스포츠는 현대 생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스포츠는 현대인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 있는 삶의 하나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가 일반화되고 인류 생활의 큰 틀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을수록 그에 따른 부정적 요소들이 눈에 띠게 드러나고 있으며 스포츠 폭력은 그 부정적 요소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 폭력은 선수들 간에 빈번히 일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선수들을 다루는 감독이나 코치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23일 부산 사직 구장에서 일어난 관람객들의 난투극에서처럼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들의 집단 폭력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스포츠에는 여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로써 유희의 개념과 더불어 경쟁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을 통해서 자칫 폭력이 일어나기 쉽다고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폭력의 문제는 인류의 삶에 있어 어떤 핑계가 있더라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문제로서 스포츠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통해 폭력 당사자들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경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청소년들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은 그 모방성과 전염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적 차원에서조차 폭력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체벌을 금기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교육학에 의하면 체벌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어린이들은 폭력이 내면화되고 상습화되어 그것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폭력에 굴종하게 되며 결국 가해의 쾌감을 쉽게 느끼게 되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기 쉽다고 한다.

충남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농구. 경기 막판 우리은행 김은경(오른쪽)3년 후배인 국민은행 김수연의 얼굴을 때린 직후 서로 쳐다보고 있다

이러한 폭력의 문제가 대두되는 현실에서 우리가 폭력에 대한 반대 개념인 비폭력에 대한 생각을 하게하는 요가의 계율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물론 요가는 유희나 경쟁의 개념을 내포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많은 인구가 요가 아사나 수련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요가 아사나 수행이 사회체육의 한 분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요가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살펴봄으로써 요가를 수련하는 현대인들의 삶에 필요한 요소들의 의미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요가는 아사나를 수련하는 것 뿐 아니라 삶에 필요한 계율들을 지키도록 제시하고 있다. 정통요가 경전인 요가수트라에는 그 계율들이 10가지 제시되어 있는데 그 중 5가지는 금할 것들(禁戒)이고 나머지 5가지는 권장하는 사항(勸戒)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계의 내용 중에 맨 처음 비폭력이 나온다.

비폭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이고 그것은 200년간 영국의 침략 하에 식민지가 되어 살아가는 인도인들을 영국에서 해방시킨 가장 위대한 슬로건이자 덕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총 칼을 들고 인도를 200년이나 장악한 영국을 비폭력으로 어떻게 돌려보낼 수 있었는가 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요가의 계율인 비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몸이나 물질적 몸의 움직임의 개념으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요가의 내용은 물질적 차원 뿐 아니라 정신적 차원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에너지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가에서 제시하는 폭력의 의미는 나 이외의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고통을 주는 것까지 포함한다. 고통을 주는 모든 행위와 언어 뿐 아니라 분노와 탐욕 번뇌 또는 집착과 같은 사념들 또한 폭력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에너지들까지 다 사라진 형태의 비폭력 에너지를 지니게 되면 자신의 에너지를 넘어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투사되어, 맹수 같은 존재들까지도 비폭력 에너지를 지닌 존재에게는 전혀 그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비폭력의 힘으로 맹수 같은 영국의 총칼이 인도에서 멀어지게 하였고 드디어 인도는 영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이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고도의 수행을 이룬 자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우리나라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와 상통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요가에서 제시하는 비폭력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현재의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제지하는 규칙이나 상벌의 강화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스포츠 관계자 내면의 분노와 탐욕과 번뇌 그리고 집착과 같은 사념 등을 다스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 요소가 스포츠계에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경쟁을 위주로 하는 스포츠계에서 폭력에 대한 주의와 경각심만으로는 폭력을 근절할 수 없을 것이며 그 경쟁의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비폭력을 유발하는 명상적이고 유연한 수련을 가미하는 철학적 바탕을 이루어 냄으로써 앞으로 스포츠계가 더욱 품격이 높아지고 평화로운 스포츠로써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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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박현애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간혹 스포츠의 명장면을 모아놓은 영상물을 접하곤 한다. 선수의 경이로운 움직임, 주변 선수의 방어에 대처하여 행하는 명석한 퍼포먼스 등을 보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이는 스포츠에서 느낄 수 있는 탁월성에서 오는 일종의 쾌감이다. 스포츠를 보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선수의 탁월성은
그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

탁월성은 아레테(areté)를 의미하는데 aritos(excellent, best)와 뜻을 같이한다. 이는 우수성을 의미하며,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우월함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기능이나 독특한 특징이 기능적으로 잘 수행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이레테란 인간의 우수성과 뛰어남을 일컫는다. 물론 탁월성은 인간의 완벽하려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욕구가 발휘되면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김연아에 열광하고 감동을 받는 것도 라이벌 선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것보다 완벽한 퍼포먼스로 완전한 경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김연아 퍼포먼스에서 인간의 우수성과 뛰어남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는 음악과 김연아의 퍼포먼스, 그리고 기술적 탁월함 모두 최상의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탁월성을 얻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단순히 우월한 기록이나 퍼포먼스가 아레테가 되지는 않는다. 과거 기록이나 수행에의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새로운 수행방법의 시도, 그 선수를 말해주는 독특한 플레이, 완벽함에 가까운 완전한 경기 등의 수행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스포츠에서 깊은 감동을 얻게 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장미란의 경우 자신이 목표한 금메달에의 성과를 얻고도 세계기록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스포츠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90년대 중반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의 이중 점프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수행 방식으로 기능의 탁월성은 물론 스포츠의 아레테를 느끼게 해주는 수행이었다. 또한 차범근의 경우 탁월한 수행능력과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한 반칙 없는 플레이로 아직까지 회자되며, 1976년 코마네치(Nadia Comaneci)2010년 김연아가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스포츠의 아레테를 느끼기에 충분한 사례가 된다. 이러한 일례들은 당시 그 수행을 지켜보았던 감상자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스포츠 명장면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결국 감동적인 스포츠로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이 스포츠의 아레테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레테가 발휘될 수 있는 스포츠 수행의 방향은 무엇일까.

                         기록에의 도전이 아닌 수행에의 도전으로 바뀌어야한다.

탁월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탁월한 수행능력이지만, 기록에의 도전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올해의 득점왕보다 감동적인 수행을 하는 선수를 오래 기억한다. 이는 선수들이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기록제조기가 아닌 전설이나 신화로 남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해야하는 이유이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수행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

아레테가 발휘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있는 스포츠가 되어야 한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영화화되고 깊은 감동으로 남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팀의 경기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전설이 되었다. 스포츠 영화가 갖는 진부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리스트에 집중하는 이유는 불굴의 의지와 선수들의 노력이 경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성과주의가 아닌 스포츠 본질을 찾아가야 한다.

스포츠는 순수함이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현대 사회의 산물이다. 배금주의, 부패, 비리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아직까지 그 순수함을 잃지 않고 인간의 긍정적 본성을 보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또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스포츠에 감동한다. 이는 스포츠의 본질이 스포츠 정신에 입각하여 있으며 엄격한 규칙을 준수함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최근 K리그의 승부조작이나 쇼트트랙 선수와 협회의 담합과 같은 변질된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주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상당부분 스포츠만이 갖는 순수함이 건재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탁월성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승부에 집착하여 승리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차치하기 위해서는 보는 이들이 진정한 승부를 가릴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학자들이 말하는 스포츠의 특성 중 하나로 알레아(aléa)를 든다. 이는 스포츠의 결과는 불확정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승리자들이 다른 패배자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거나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또한 스포츠의 묘미 중 하나는 경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월한 전적을 가지고 있는 팀이 의외의 패배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스포츠경기의 감상자가 결과보다 좋은 경기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른다면 스포츠의 묘미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스포츠의 아레테에 근접할 수 있다.

스포츠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소산이다. 현대인을 우매하게 만드는 3S(screen, sport, sex)로 불명예를 안고 있기도 하지만, 스포츠의 본질이 지켜지고 운영되었을 때,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현대 문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스포츠의 탁월성, 아레테가 발휘될 수 있도록 스포츠 문화가 변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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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남 중 웅
(충주대학교 교수)

 

맞수는 사전적으로 , 재주, 기량 따위가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대를 뜻한다. 영어로는 라이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스포츠현상에서 이러한 맞수가 있다는 것은 보는 이와 하는 이 모두에게 재미를 더해주는 요인이다. 경쟁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소중하게 느끼는 또 다른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현상에서 경쟁이 인간사회의 대리전이라는 측면으로 한정하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다.

                                                           선동열 vs 최동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
. 개인이 삶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유기적인 조직체인 사회에서 조금의 행동제약 기준이 바로 사회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는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스포츠현상을 사회의 축소판이라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의 맞수는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나? 때론 독이 되고, 때론 약이 되는 것인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나 직장 등 사회현상에서 맞수는 나의 위치를 점검하게 하는 기준인 동시에 내가 살아남아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경쟁사회에서는 맞수가 등장한다. 그것도 삶의 전개 과정에서 희로애락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맞수의 본질은 기술적인 부분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심리적, 지리적, 문화적 차원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맞수는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로 볼 수 있고, 심리적인 부분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지리적인 맞수는 시간적, 공간적 변화요인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문화적 차원의 맞수는 역사적인 사건에 기인 한다. 다양한 원인에서의 맞수라는 개념은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와의 비교를 통해서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이면서 때론 만족과 성취를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김연아 vs 아사다 마오
   
  각 국의 스포츠현상에서는 이러한
맞수를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미국야구에서 양키스와 보스톤, 영국 축구에서의 멘체스터와 리버풀 등은 역사적, 문화적 차원에서의 맞수이다. 그들의 경기는 더욱더 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생산하는 중요한 매개체인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과 미국 등은 지금까지 국가적, 정치적 문화적 맞수이다. 이러한 국가 간의 스포츠는 정치적으로 활용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중요한 상징물이 되기도 있다. 이처럼 맞수의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화적 활동을 담고 있는 종합적 상징체인 것이다.

                                                   타이거우즈 vs 필 미켈슨 
                         
스포츠는 경쟁에서 출발한다. 즉 상대가 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사회문화이다. 스포츠는 결과에 따라 웃기도 울기도 하는 문화적 역사적 중요한 자원이다. 스포츠를 통해 개인, 국가 또는 민족의 대결장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결과를 상대에 대한 우월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맞수와의 경쟁에서는 참여자는 큰 관심을 가지며, 자신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상의 힘을 표출하기도 하고, 그 이상의 패배감을 주기도 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패더러 vs 나달 

   가을은 스포츠의 계절이다
. 프로야구와 축구가 마무리되고 있고, 프로농구와 배구가 시작되는 전환의 계절이다. 스포츠현상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이번 시즌의 프로야구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600만 관중을 넘어 하나의 사회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프로야구의 최종 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두 팀의 승부는 맞수라고 불리는데 무리가 없었다. 아마 작년의 기억을 더하면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많은 재미를 더해 주었다. 또한 내년에는 더욱 기대되는 스포츠현상이 있다. 바로 선동렬 감독의 복귀이다. 선동렬 감독의 기아와 류중일 감독의 삼성은 과거가 회상될 수 있는 좋은 그림이다. 이들 두 팀은 과거 진정한 프로야구의 맞수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더욱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내년의 프로야구는 풍성한 재미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효도르 vs 크로캅 
 
   비단 두 팀 간의 맞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맞수도 예고되고 있다. 일본생활을 마치고 복귀하는 이승엽과 김태균, 토종 홈런왕 이대호와 최형우의 경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맞수의 대결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 있고, 관심이 가는 경쟁이다. 이러한 맞수의 탄생이 지속적으로 생산된다면 스포츠현상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재미있는 사회문화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맞수는 짧은 역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 역사의 흔적이기 때문에 그 만큼 소중한 우리의 사회문화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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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정효
(서울대학교 강사)

 

야구만큼 재미있는 스포츠가 따로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발끈할지 모른다. 그래도 한국의 프로야구는 재미있다. 오죽 했으면 야구 경기를 한 편의 드라마나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겠는가. 야구 경기에는 확실히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복기의 묘미가 있다.
 
무사만루의 찬스에서 득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9회말 투아웃에서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것이 야구의 재미를 증폭시키는 주요한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승부의 향방과 감동은 야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스포츠는 재미와 감동의 DNA를 갖는다. 그런데 왜 유독 프로야구에만 구름관중이 몰리는 것일까.


2011년 프로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600백만을 넘어서더니 어느새 1,000만의 목표치를 내걸고 있다. 머지않아 허세가 아님을 입증할 날이 올 것 같다. 이런 호시절에 프로야구의 인기 비결을 묻는 일은 새삼스러울지 모른다. 혹자는 WBC의 준우승과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을 거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IT의 수준만큼 프로야구의 플레이 자체가 향상되었고, 이것이 재미를 배가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미디어의 분석은 상투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지적은 아니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같은 잣대를 축구에 적용하면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와 현재 프로축구 경기장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우생순의 여자 핸드볼은 또 어떤가. 프로야구의 재미와 감동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스포츠 종목과 다른 프로야구만의 특별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다름의 구조를 설명하지 못할 경우 스포츠의 일반적 특징을 동어반복으로 열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야구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재미와 감동의 원인이 드러난다. 기호학이란 사회현상을 기호로 간주하고 그 의미작용을 밝히는 학문이다. 가령 강남은 한강 이남을 뜻하는 행정단위이지만 그 단어의 의미는 일의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부자 동네''부동산'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룸싸롱'을 연상할지 모른다. 이처럼 강남이라는 기호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기표(記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의 자의성 때문이다. 프로야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야구장을 찾고 TV 중계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이라는 기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전하는 기의를 해석하고 공유한다. 프로야구의 문화기호학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프로야구의 재미는 무엇보다 경기의 진행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시즌이 시작될 즈음 미디어의 프로야구에 대한 홍보는 새로운 시즌의 개막혹은 대장정의 시작으로 표현된다. 이때 개막(開幕)이라는 기표 속에는 흥행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뿐 아니라 대서사시의 막이 오른다는 두근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대서사시란 무엇인가? 군웅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대결의 파노라마가 아닌가.

프로야구의 시즌 전체가 서사시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시리즈의 우승이라는 목표를 두고 펼치는 각 팀의 대결이 전쟁의 웅장한 서사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지나 여타의 무협지와 다른 긴장을 환기시킨다. 무협지가 중원정복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일회적이고 완결된 구조로 보여주는 것임에 반해 프로야구의 이야기는 1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진다. 여기에 지난 시즌의 영광과 좌절, 도전의 희망과 복수에 대한 염원, 그리고 패권(覇權)의 기호들이 뒤얽히면서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장정의 기표가 프로야구만큼 어울리는 스포츠는 달리 없다.


1년 주기의 페넌트레이스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것이 일상적인 삶의 주기와 겹친다는 점에 있다.
프로야구는 개화의 봄에 시작해서 늦은 가을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이 시합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거르지 않는 게임의 진행은 이벤트성이 강한 축구와 대비되는 야구만의 특성이다. 축구는 게임의 성격 상 매일 진행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게임 결과에 대한 희비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다. 요컨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과 다음 주를 기약하는 것에는 많은 긴장과 흥분의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페넌트레이스는 경기의 결과를 일상 속 깊숙이 개입시킨다. 그것은 전날 벌어진 시합의 내용과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에서 샐러리맨들의 아침 대화가 시작되는 살가운 풍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즌의 진행과 일상의 깊은 관계는 승수의 축적이라는 또 다른 기호를 통해 드러난다. 페넌트레이스의 중요한 전략이 여기에 숨어 있다. 1위부터 꼴찌까지의 순위와 게임차는 응원하는 팀에 대한 희망의 게이지이며, 이 수치의 등락과 더불어 팬은 일희일비하고 어느새 대장정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승리의 축적과 순위의 상승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기호가 바로 가을야구이다. ‘가을이라는 기표는 수확의 기의와 함께 서사시의 결말 부분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바람과 우승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염원의 메시지가 투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야구는 게임이 갖는 판타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으로서의 판타지성은 컴퓨터 게임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한다는 것과 가상이 아닌 현실의 판타지라는 점이 2차원의 평면 공간에서 펼쳐지는 놀이로서의 게임과 다르다. 그리고 이 판타지는 전쟁이라는 기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프로야구에는 다른 스포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전쟁의 기표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가령 단타를 소총으로, 홈런을 대포로 비유하거나 투수에 따라붙는 폭격기잠수함등의 기표들은 모든 포지션을 전투의 진지로 만든다. 그래서 감독은 쉽게 야전사령관으로 분()하게 되며, 그가 펼치는 작전과 선수의 기용을 통해 게임 전체를 전장(戰場)으로 탈바꿈시킨다. 전쟁의 판타지는 팬들로 하여금 더불어 싸운다는 일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관중의 동원이라는 기표 속에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응원하는 민초의 함성이 교묘히 깔려 있게 되는 것이다. 응원의 함성은 승전보를 바라는 민초들의 고함에 다름 아니며, 프로야구는 이런 숨어 있는 전쟁의 알레고리를 통해 관중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은다.

프로야구는 가상이 아닌 3차원의 공간에서 남성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상력을 구현한다. 허구적이지 않은 판타지의 미학. 이것이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의 이중성이며 이 역설적인 미학 때문에 팬은 매 경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판타지에 대한 열광은 현실의 팍팍함과 일상의 고단함이 더할수록 날로 증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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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송형석 (계명대학교 교수)


어느 정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요즘 스포츠에서 일고 있는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변화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스포츠는
다양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몸짓의 활동으로 그치지 않고 몸짓을 통해 정신적인 그 무엇을 고양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협동심”, “인내심”, “극기의 정신등이 전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일련이 몸짓을 통해 고양시키려고 했던 정신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교육학자들이 인간의 교육과 관련하여 스포츠의 가치를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정신적인 것에서 육체적인 것으로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에로틱한 몸이 스포츠참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스포츠의 목적이 바람직한 몸 거동의 반복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는 마음 닦기에서 몸만을 갈고 다듬는 몸 닦기로 바뀐 것이다.


스포츠는
사회의 거울이라는 잘 알려진 명제는 이러한 경향이 몸에 집중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몸에 대한 관심은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을 보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노력과 시간, 돈을 쏟아 붓고 있으며, 이에 부응하여 몸 관련 산업은 끝을 모르고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몸에 관심을 갖고, 몸을 아름답게 가꾸며, 몸 건강에 신경 쓰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런 노력이 즐거움을 주고 개성을 확장시켜주는 한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성을 억압하고 제한하며 고통만을 가중시킨다면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집착에 가까운 대중의 몸 닦기 열풍이 어떤 문제점을 지닐 수 있는지 몇 가지만 지적해보겠다.

첫째, 몸 가꾸기는 철저한 자아의 타자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갈고 다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 가꾸기 주체의 삶의 척도는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 된다. 데이빗 리츠먼은 이에 대해 내부지향형 인간타자지향형 인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 마디로 몸 가꾸기를 통해 주체성이 상실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둘째, 몸에 대한 투자에는 한계가 있다. 몸은 나이를 먹고 쇠퇴하며 결국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면 누구나 주름살이 늘게 되고 윤기 나는 젊은 피부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몸은 지체 없이 늙어가며 결국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몸에 중심을 둔 자아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셋째, 몸은 언제나 우리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각종 대중매체를 통해 보고되고 있는 성형수술과 다이어트의 실패와 폐해에 대한 적지 않은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 몸에 아주 작은 변화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여전히 작은 채로 남을 것이고, 키가 큰 사람은 여전히 클 것이며, 비만 체질을 타고난 사람은 날씬해지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고, 날씬해지더라고 요요현상 같은 부작용으로 인해 날씬함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넷째, 바람직한 몸에 대한 이미지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용될 수 있다. , 몸 가꾸기와 몸 변형에는 적지 않은 금전적, 시간적 투자가 요구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고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추세에서 소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사람들은 몸에 대해 기대를 품고 몸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신감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 실제적인 결과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받고 자신감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외모를 가꾸는 것으로는 자의식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모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이루려는 시도는 지속적 효과가 없다. 안정된 자아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몸은 적절치 않고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지적하였듯이 몸 닦기에 대한 집착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중세 수도사의 고행에 버금가는 몸 닦기의 결과 아름다운 몸, 멋진 외모를 갖게 된다고 해도 약속된 모든 것이 성취되지는 않는다. “여성들의 착각은, 사랑 받으려면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아름다우면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랑을 체험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있다. 하지만 실상 아름다움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할 기회를 조금 더 줄뿐이라는 발트라우트 포슈의 말처럼 이상적인 외모 자체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몸과의 전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몸과 화해하고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스포츠참여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몸 만들기에만 열중하는 고통 받는 인간 homo patiens의 모습이 아니라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 고통의 인내 과정을 통해 마음을 단련하고 세계 및 타인과 대화하며, 궁극적으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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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송성일 (계명대학교 교수)



어느 정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요즘 스포츠에서 일고 있는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변화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스포츠는 다양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몸짓의 활동으로 그치지 않고 몸짓을 통해 정신적인 그 무엇을 고양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협동심”, “인내심”, “극기의 정신등이 전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일련이 몸짓을 통해 고양시키려고 했던 정신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교육학자들이 인간의 교육과 관련하여 스포츠의 가치를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정신적인 것에서 육체적인 것으로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에로틱한 몸이 스포츠참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스포츠의 목적이 바람직한 몸 거동의 반복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는 마음 닦기에서 몸만을 갈고 다듬는 몸 닦기로 바뀐 것이다.


스포츠는
사회의 거울이라는 잘 알려진 명제는 이러한 경향이 몸에 집중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몸에 대한 관심은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을 보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노력과 시간, 돈을 쏟아 붓고 있으며, 이에 부응하여 몸 관련 산업은 끝을 모르고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몸에 관심을 갖고, 몸을 아름답게 가꾸며, 몸 건강에 신경 쓰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런 노력이 즐거움을 주고 개성을 확장시켜주는 한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성을 억압하고 제한하며 고통만을 가중시킨다면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집착에 가까운 대중의 몸 닦기 열풍이 어떤 문제점을 지닐 수 있는지 몇 가지만 지적해보겠다.

첫째, 몸 가꾸기는 철저한 자아의 타자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갈고 다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 가꾸기 주체의 삶의 척도는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 된다. 데이빗 리츠먼은 이에 대해 내부지향형 인간타자지향형 인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 마디로 몸 가꾸기를 통해 주체성이 상실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둘째, 몸에 대한 투자에는 한계가 있다. 몸은 나이를 먹고 쇠퇴하며 결국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면 누구나 주름살이 늘게 되고 윤기 나는 젊은 피부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몸은 지체 없이 늙어가며 결국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은 몸에 중심을 둔 자아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셋째, 몸은 언제나 우리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각종 대중매체를 통해 보고되고 있는 성형수술과 다이어트의 실패와 폐해에 대한 적지 않은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 몸에 아주 작은 변화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여전히 작은 채로 남을 것이고, 키가 큰 사람은 여전히 클 것이며, 비만 체질을 타고난 사람은 날씬해지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고, 날씬해지더라고 요요현상 같은 부작용으로 인해 날씬함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넷째
, 바람직한 몸에 대한 이미지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용될 수 있다. , 몸 가꾸기와 몸 변형에는 적지 않은 금전적, 시간적 투자가 요구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고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추세에서 소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사람들은 몸에 대해 기대를 품고 몸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신감을 얻으려고 하는데, 그 실제적인 결과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받고 자신감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외모를 가꾸는 것으로는 자의식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모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이루려는 시도는 지속적 효과가 없다. 안정된 자아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몸은 적절치 않고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지적하였듯이 몸 닦기에 대한 집착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중세 수도사의 고행에 버금가는 몸 닦기의 결과 아름다운 몸, 멋진 외모를 갖게 된다고 해도 약속된 모든 것이 성취되지는 않는다. “여성들의 착각은, 사랑 받으려면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아름다우면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랑을 체험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있다. 하지만 실상 아름다움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할 기회를 조금 더 줄뿐이라는 발트라우트 포슈의 말처럼 이상적인 외모 자체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몸과의 전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몸과 화해하고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스포츠참여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몸 만들기에만 열중하는 고통 받는 인간 homo patiens의 모습이 아니라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 고통의 인내 과정을 통해 마음을 단련하고 세계 및 타인과 대화하며, 궁극적으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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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현애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 - 인간의 존재적 한계”

인간에게는 존재적 한계가 주어졌다. 태어났으면 죽는다는 존재적 유한이라는 한계도 있으나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들 말이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진학이나 취업의 실패를 맛봐야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병과의 고통스런 싸움을,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의 아픔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이렇듯 모든 인간에게 삶이 주는 고통과 시련을 ‘인간의 존재적 한계’라고 한다.
즉 인간의 존재적 한계는 인간이 존재하면서 당면하게 되는 사회적, 정서적, 정신적 한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덜 고통스럽고 더 발전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질문 안에 들어있다. 바로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복잡다단한 개성, 편향된 과학화로 인한 정서적 교육의 부재 등의 수차례 지적되어 온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되짚어 볼 때, 고통을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적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면, 유한한 생명의 존재로서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존재적 한계를 갖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초월의 본성과 욕구도 가지고 있다. 초월의 욕구는 건강한 성격인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타날 때 환경적, 개인적 한계를 초월한 잠재력을 발휘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손지희, 2009). 
 
                                 “스포츠는 현실을 반영한다.”

간혹 스포츠 문화를 오래 경험한 사람들의 “스포츠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스포츠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을 준비하게하거나 비교적 유사한 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 이지만, 프랑스의 작가 까뮈는 “내가 배워야할 대부분의 윤리적 문제들은 스포츠를 통해 배웠다.” 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는 스포츠의 윤리적 측면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강력한 설명이지만 그보다 이전에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 바로 ‘스포츠가 얼마나 인생의 중요한 부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인가’ 이다.

Loy는 스포츠 세계의 특성을 6가지(자유, 분리성, 불확정성, 비생산성, 규칙성, 허구성)로 나누었는데, 이 중에서도 분리성은 스포츠 세계가 시・공간이 한정되며,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스포츠는 인간의 생과 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포츠는 인생과 완벽하게 분리되어있는 새로운 세계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인생이나 인간사와 무관하게 만들어지고 진행되는 세계는 아니다. 

여타의 문화, 그 중에서도 인간사에 의도적이고 직접적으로 개입된 문화와는 다르지만, 스포츠는 어찌보면 의도적이고 직접적으로 인간사에 개입한 다른 사회문화의 형식보다 더욱 선명히, 그리고 여과 없이 그 의미들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스포츠는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서 깊은 감동과 부정에 대한 반동 등의 복잡한 인간의 심리까지도 비교적 명확히 담고 있다.

“ 스포츠에서 경험할 수 있는 존재적 한계와 극복”

기록을 다투는 스포츠의 양적측면이나 기량을 다루는 스포츠의 질적 측면들 모두 기록과 자신, 타인으로부터 존재적 한계를 경험한다. 또한 규정지어진 스포츠의 규칙에 의해서도 존재적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드러난 스포츠에서의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극복한 가장 가까운 사례로 ‘승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승리라는 외재적 가치에서만 존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스포츠의 본질을 간과하고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가치들로 본래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어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승리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소수의 승리자가 누릴 수 있는 가치보다 다수의 패배자가 느낄 수 있는 열등감은 인간을 존재적 한계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경험할 수 있는 승리 이 외의 많은 내재적 가치들을 갖는다. 가령,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고통스러운 훈련, 고된 훈련 뒤의 아쉽지만 명예로운 패배, 결과에 승복하고 자신의 한계와 취약점을 알아가며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능력 등은 스포츠 문화를 더욱 생생히 살아 숨 쉬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이처럼 스포츠 상황에서 존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스포츠 행위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강렬한 감동을 남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노력들이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이 가능하도록 해 준다. 즉 스포츠는 더 좋은 기량을 위한 노력들을 통해서, 그리고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고통들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경험하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배우게 한다.
 

인생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들, 즉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상황적 한계, 고통과 노력으로도 얻어지지 않는 눈앞의 성과 등과 같이 인생에서 당면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스포츠는 자연스럽게 경험하도록 하여 준비하게 하며, 이를 극복할 의지 또한 스포츠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마라톤을 즐기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린다.’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스포츠 훈련 중의 외로운 싸움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가져다준다. 또한 스포츠 상황에서의 문제 해결 능력을 인생에 접목하여 보면 복잡한 인생사도 의외의 간단한 해결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며, 이렇게 스포츠를 통해 얻어지는 작은 교훈들은 인간의 일상에 도움을 준다.

인간에게는 생이 주는 기쁨과 위기가 있다. 기쁨은 기쁨대로 누릴 수 있으나 위기는 그 나름의 의미가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게 하여 인정하게 하고, 자신을 보다 단단히 만들어가기 위한 기회로서 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책이 이야기 해주지 않는 인생에 대한 공부는 스포츠 상황의 순간순간에 스며들어 녹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일면을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스포츠의 순간순간에 될 수 있는 한 깊이 생각하고 다양하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
스포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많다. 그러나 ‘스포츠’라고 하면 경쟁과 승리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논리가 그 외의 수많은 가치들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손지희(2009). 몰입경험의 교육적 가치.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박현애(2010). 스포츠 행위에서 나타나는 감성적 인식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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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 상호 (동아대 스포츠 과학연구소 특별 연구원)

 
1. 스포츠에서 아레테의 의미

선수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기량을 경기에서 발휘하고자 한다. 뛰어난 기량은 관객들로 하여금 열광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박태환과 김연아의 움직임에 감동하고 환호를 보내는 이유이다.
하지만 신체적 기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들이 인격적으로 탁월함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타이거 우즈의 예를 설명하지 않아도 기량의 발휘와 그가 가진 인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행위의 탁월성과 도덕적인 행위가 잘 발휘된 것을 서구에서는 아레테(aretē)로 설명하였다. 즉 탁월성(excellence)과 덕(virtue)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아레테의 의미가 스포츠에서는 자신의 신체가 가진 기술, 재능, 체력을 바탕으로 한 탁월성만을 강조하는 의미로 변용되었다. 스포츠는 자신이 가진 탁월성을 겨루는 경쟁이지 덕이 높고 낮음을 측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운동경기(athletics)의 어원이 ‘상품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하다’는 의미에서도 잘 나타난다.  

 체육철학자인 Paul Weiss는 스포츠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량을 잘 발휘하고자 하는 탁월성의 노력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스포츠에서 자신이 가진 탁월성을 잘 발휘하는 선수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가 경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한 도덕적인 성품을 발휘하는데 한계를 가진다. 비록 아레테의 개념이 탁월함과 도덕적인 훌륭함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스포츠에서 경쟁의 전제는 도덕적 품성보다 자신의 기능이 우선 발휘되어야 한다. 이는 경쟁의 심화와 승리지상주의, 비도덕적 행위로 이어졌다. 오늘날 스포츠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토핑을 위시한 약물복용의 문제점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쟁적인 스포츠세계에서 신체의 탁월성과 도덕적인 훌륭함이 조화롭게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인가?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 이에 답하기 전에 도덕적 훌륭함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아레테 의미의 하나인 덕(virtue)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쿠스 윤리학』에서 인간이 가진 ‘품성상태(hexis)'를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 아레테라고 설명한다. 이성적인 판단의 하나인 ‘중용(mean)’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의미와 가치는 동양에서는 德으로 설명한다. 서구의 덕(virtue)과 동양에서의 德의 지향점을 다르다. 서구에서의 덕(virtue)은 성품의 탁월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적론적 의미를 가진다면, 동양에서의 德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의 수양을 통해 습득된 것이 실천적 행위로 까지 전개되어야 하는 것을 포함한다.

 


2. 스포츠로서의 검도

신체의 탁월성과 덕의 의미가 조화롭게 구현될 수 있는 것은 동양무도이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서 보여주는 태권도, 유도의 동양무도는 승패를 다루는 ‘스포츠로서의 무도’의 요소를 강조한다.
무도의 궁극적 목적이 신체의 수행을 통해 심신일여를 이루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는 오늘날 승패를 가르는 경기지향점을 강조함으로서 무도본질이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무도는 경기에서의 승패가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권도, 유도, 검도경기에서 승리만이 유일한 가치임을 경기 속에서 보게 된다. 물론 경기에서도 이겨야 한다. 하지만 경기에서 우승한 것은 기술의 탁월성이 이지 인격적 탁월성은 아니다. 검도도 마찬가지다. 검도가 검을 통한 깨달음의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검도경기의 승부에 집착함으로서 진정으로 검도수행을 통해 가져야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포츠로서의 검도’와 ‘무도로서의 검도’를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스포츠로서의 검도’는 자신의 가지는 모든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발휘되어 드러나는, 즉 검도경기에서 氣, 劍, 體가 일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몸을 가진 기능이 최대한 발휘되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아레테의 의미 중 신체가 가진 탁월성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반면에 ‘무도로서의 검도’는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검을 통한 자기 수행이며 깨달음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동양무도의 궁극적 목적은 기술의 탁월성뿐만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 이는 동양적 의미의 덕을 체득함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 동양적 의미의 덕은 행위의 축적에서 나온 결과를 의미한다. 또한 깨달음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이다.

3. 무도로서의 검도
 
 ‘무도로서의 검도’란 무엇인가? 자신의 검도기술의 완성뿐만 아니라 인격완성에 따른 이타적인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는 동양적인 실천적인 의미인 德을 자신에게 체득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무도의 道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덕의 작용이 완성되어야 한다. 검도에서의 덕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자는 덕의 의미를 동양의 성리학의 교과서인 『近思錄』에 있는 仁義禮智信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인의예지신의 의미는 우리의 주의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사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숙청문(肅淸(智)門): 북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구성된다. 그 가운데 보신각(普信閣)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인의예지신의 의미가 자신에게 수행되고 체득되어 구현될 때 검도에서의 덕이 완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첫째, 검도에서의 仁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의 의미는 인간다움의 의미를 가진다.
검도에서의 인의 의미는 자기수행에 따르는 고통을 극복하고 경쟁에서 배제된 타자에 대한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경쟁에서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찾는 마음가짐이다. 검도에서의 인은 살인검에서 활인검이 되어야 한다.
 
둘째, 검도에서 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이 타자 지향적인 반면에 의는 내적 지향적의미를
가진다
.
승리만을 달성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싸우려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승리가 가져다주는 이익과 욕망에 따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검도에서의 예는 어떻게 달성되어야 하는가? 검도는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는 무도이다. 
즉 禮始禮終이다. 검도는 자신을 수행함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는 운동이다. 그 속에서 지켜야 할 예가 없다면 검도수행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넷째, 검도에서의 智는 어떠해야 하는가? 지는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여 아는 것이다.
知와 智는 다르다. 전자가 검도경기에서 이기는 방법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이유를 규명하여 지혜를 획득하는데 있다. 이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마음의 자세를 수행할 때 드러나는 것으로 검도에서는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한 본질직관의 의미를 가진다.

다섯째, 검도에서 信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신의 의미는 사람이 하는 말에 책임이 따라야 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
즉 언행일치이다.


이와 같이 ‘무도로서의 검도’는 검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의예지신의 의미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수행에 따른 인격완성의 도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서구에서 아레테의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현실적으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스포츠적 요소를 경시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검도가 가진 무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수행하는 것은 검도가 가진 궁극적인 깨달음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의 검도는 ‘스포츠로서의 검도’와 ‘무도로서의 검도’가 가진 의미가 통합되어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경기에서 탁월성을 발휘한 신기의 기술과 무도로서 검도가 추구하는 깨달음, 즉 도의 완성을 위한 인의예지신을 통한 실천적인 덕이 완성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길이 어렵고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검도수행자가 ‘무도로서의 검도’의 의미를 새롭게 반성하는 기회를 가질 때 검도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는 살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수행하는 운동과 무도가 무엇이던지 간에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하고 반성하려는 자세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사진출처: http://cafe.daum.net/meister.cb.konkuk (Photography by 고동수)
    논문: "검도에서 아레테와 德의 의미이상호, 이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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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강덕모(세종대학교 강사)

대학입학전형은 시대를 초월한 사회적 최대 이슈(issue)가 되어 왔다. 그 이유는 대학입학전형에는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진학을 위한 입학전형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공정한 절차에 의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다는 빛(긍정적 요소)이 존재하는 반면, 입학전형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과 그로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들이 그림자(부정적 요소)로 존재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는 얼핏 보아서 각기 다른 의미의 존재 성향을 띤 독립적 존재로 보일 수 있지만, 빛이 있음에 그림자가 존재하며, 그림자가 있음에 빛의 존재가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때, 대학입학전형에 있어서 빛과 함께 공존하게 되는 그림자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거나 빛의 존재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현행 입시제도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림자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림자가 지나치게 크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으로 일축될 수 있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대리시험 행위 및 cheating 등의 시험에 대한 공정성 위반은 사회적으로 큰 화두가 되어 왔으며, 2004년에는 대학수학능력평가에서 휴대폰 단말기를 이용한 수험생들의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범죄로 일단락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신체를 통한 체력 및 운동기능의 우열을 가리는 체육관련학과의 실기고사는 이와 같은 시험 자체의 형평성 및 공정성 측면에서 자유로운 것일까. 또한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 과정에 비윤리적인 요소가 팽배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의문으로 수행한 본인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여 본다면, 입시체육의 문화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입시체육의 문화에는 신체적 과훈련과 체벌의 습관화로 인한 ‘몸 학대의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하겠다. 입학실기고사라는 제도적 장치에 귀속된 수험생들은 도구화된 몸을 찬양하고 동경할 뿐, 몸에 대한 주체성 확보와는 요원한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체육관련학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다시 말해 체육 전공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전에 몸의 지위 타락과 상실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은 체육과 스포츠 현장을 어둡게 하는 그림자가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체적 훈련 과정에서 지속되는 체벌 또한 문제의 중심에 있다. 체벌의 효과에 대한 맹신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인 체벌 행위는 체육관련학과의 고질적인 체벌ㆍ폭력 문화를 견고히 지탱해주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는 체육인으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개인의 모든 역량과 가치를 투자하는 유의미한 행위에 신체적ㆍ정신적 학대를 가함으로서, 체육 및 스포츠 현장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고 있다.

둘째, 입시체육의 문화에는 약물복용과 관련된 ‘공정성의 문제와 윤리의식 부재의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하겠다. 신체적 기능과 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약물은 단기간에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부정적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즉 체육관련학과의 실기고사가 도덕 불감증에 심취된 사회 성원을 육성하는 타락된 입시제도가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하면서까지 신체적 완전함과 건강함의 학문을 탐구하려는 전공 분야에 입문하려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율배반적이며, 목표의식이 부재된 현실 도피적 진학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셋째, 입시체육의 문화에는 체육의 가치가 파괴된 ‘가치적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하겠다. 체육의 가치로 분류되는 생리적 가치와 심리적 가치 측면에서 그 그림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생리적 가치의 왜곡 현상이 매우 심각할 수 있다. 실기고사 종목이 체력적 요인에 편중됨에 따라,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수험생들은 체력의 극한 상태에 도달하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실시하게 되고, 이와 같은 과정의 연속은 건강상에 문제를 유발함으로서 종국에는 체육의 생리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이다. 다음은 심리적 가치의 파괴로서, 신체적 활동의 향유를 통해 보상받는 심리적 쾌감, 즉 즐거움의 결여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입시체육의 문화에 존재하는 수험생들의 모습은 신체활동으로 주어지는 즐거움의 추구와 심리적 안정을 꾀하기 보다는, 오히려 억지스런 신체활동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그 가치를 전락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대학 입학을 위해 실기고사를 준비하는 운동현장에 위와 같은 그림자가 형성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본인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선행연구와의 고찰을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각 대학에서 실시되고 있는 ‘실기고사 자체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실기고사는 운동기능보다는 체력 위주의 항목을 평가 요소로 지정하고 있으며, 체력적인 요인 또한 한 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운동기능이란 운동의 소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선천적 영향과 장기간의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실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특정 체력 요인에 집중 평가되는 실기고사는 체육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원인이 된다.

둘째, 입시체육의 그림자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학교 체육교육의 부실화’와 ‘체육관련학과 진학에 대한 공교육의 무관심’을 들 수 있다. 12년이라는 시간동안 받아온 공교육에서 체육교육의 비중은 매우 적으며, 그 실상은 더욱 참혹하다. 학교 정규 교과목으로서 자생력을 상실한 채, 파행적으로 진행되는 체육 수업은 심동적 영역의 체육 목표마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모든 학생들에게 체육의 의미 및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뿐 아니라, 체육관련학과의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는 치명적인 손해를 가하게 된다. 즉 체계화된 체육 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체육이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함으로 인해 체육의 몰가치를 조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공교육으로서의 체육교육 부실화는 학내에서 체육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입지를 축소시키게 되어 수험생들을 사설 입시기관으로 내몰고 있다.


셋째, 공교육의 체육교육 부실화로 인해 파생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서 ‘체육입시전문학원의 상업화’를 들 수 있다. 시대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체육계열 전공자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체육관련학과로의 입학을 희망하는 수험생도 증가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은 전문성이 결여된 입시체육전문학원의 난립을 유도 하였으며, 학원 간의 과도한 경쟁체제를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쟁체제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수험들의 합격률을 높게 유지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학원의 경제적 이득 및 경쟁력 확보를 위해 수험생들을 볼모로 하여 비윤리적이며 몰가치적인 신체적 훈련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림자를 빛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즉 그림자의 원인을 제거하고 입시체육의 운동문화에 밝은 빛을 비추게 할 수 있는 방안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체육관련학과 실기고사 종목의 대폭적인 재편성이 실시되어야 한다. 거의 모든 대학에 있어서 입학전형 요소 중 실기고사의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서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일부 체력요인에 집중된 실기고사는 체육관련학과의 입학 전형으로서 무의미하다. 따라서 체력의 다각적인 측정과 개인의 운동기능을 총괄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대학의 입학전형에 있어서 도핑 테스트에 준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객관적인 심사기준을 마련하여 엄격한 고사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도핑 테스트가 실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물론 도핑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에서 도핑의 반대론에 대한 정당성이 모호하다는 논박도 존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핑이 심신의 장애를 유발하고 공정성을 위배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실기고사에 응시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최대한 동일한 조건하에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셋째, 공교육으로서의 체육 교육의 정상화 및 학교 차원에서의 진학 지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주지의 사실이듯이 학교에서의 체육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 않고 있는 현상은 학생들의 체력 저하를 유발시키고 있다. 또한 공교육의 현장에서 학생들의 실기 및 진학지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체능계열의 경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사설 교육기관을 통해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꿈꾼다. 학생들에 대한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공교육의 태도가 사교육의 활성화를 조장시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체육관련학과로의 진학을 위한 입시체육의 운동문화 개선을 위해서는 공교육이 앞장서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체육관련학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 철학, 윤리학 및 인문학 등의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며, 신체활동의 가치를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현재 체육계의 상황은 인문학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거나 더욱 악화된다면 체육 및 스포츠 현장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기란 영원히 요원해질 것이며, 스포츠 윤리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실기고사를 준비하는 수험생들 사이에 형성된 그릇된 운동문화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철학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는 철학교육이 현재 체육관련학과의 재학생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실시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들이 지도 현장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교육적 효과가 빛을 발하게 되어 입시체육의 운동문화도 밝아질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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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영갑(동양대학교 생활체육학과)

현 정부의 핵심기조는 녹색성장이다. 성공적인 녹색성장이 녹색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듯이 대한민국의 미래성장은 교육정책의 선진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교육정책의 선진화는 패러다임 시프트가 요구될 만큼 어려운 난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정부주도의 교육정책은 ‘주지주의적 교육관과 신자유주의적 경제효율성’ 목표 아래 기계적 인간의 양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정부의 교육시장화 정책으로 지역과 학교 간 경쟁이 서열화되는 교육환경 속에서 학교체육은 위기의 연속일 뿐이다. 스포츠력(sports power)이 국력과 동일시되었던 한국사회에서 국가가 책임져야할 제도권의 학생을 최소한의 신체활동도 보장하지 않는 현실은 역설적 사회의 일면인 것이다. 

학교체육은 계획적인 신체활동을 통해 자발성의 인지로 연계될 뿐 아니라 선진화된 스포츠문화 확립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지금까지 학교체육 전문가들은 학교체육의 현실을 총체적인 위기로 진단하고, 많은 교육해법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제도적 확립의 실천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 글에서는 한국 스포츠문화의 기저층인 학교체육의 진보를 제약시킨 환경적 요인을 비판적으로 직시하고, 새로운 학교체육 만들기의 대응과제를 고민해고자 한다.
 

<학교체육 진보의 걸림돌 : 편향된 이데올로기>

첫째, 성장제일주의

우리는 압축적 근대성장으로 팽창된 경제성장의 사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중대한 장애요인도 함께 발생하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노벨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지속가능성, 보건 및 교육 불평등, 소득분배 등의 측정지표가 배제된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의 허상을 지적하면서 성장제일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성장제일주의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소통을 통한 통합적 시각은 결여될 수밖에 없다. 고착화된 성장제일주의적 시각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2010년 체육정책에 대한 체육인들의 관심이 모아졌지만 30쪽에 달하는 2010년 업무계획에는 ‘스포츠산업 육성기반 마련’, ‘스포츠 글로벌 경쟁력 제고’ 방안에 현황과 목표를 담은 2쪽이 전부였다. 그나마 학원스포츠 정상화를 위한 축구, 농구 주말리그제 시행은 2009년부터 추진된 계속사업이었고, 신규 사업이라면 체육수업 내실화를 위해 초등학교에 스포츠강사 887명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여전히 국가정책(체육정책) 수립은 경제효용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학교체육 선진화를 향한 시선이 성장제일주의 이데올로기로 굴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장제일주의는 한국의 경제수준을 선진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성장가치가 최고선으로 인식된 미숙한 의식으로 학교체육 정책결정과 집행의 일관성이 결여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의적으로 학교체육의 선진화를 확립시키고, 광의적으로 교육 강국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정치논리에 수반된 성장제일주의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평가하고, 선진화된 의식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의지가 요구된다.

둘째,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의 핵심 이데올로기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도입된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따라서 성장제일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밀접한 역학적 관계를 유지한다. 세계화의 맥락 속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논리가 핵심이며, 교육정책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논리가 우선된다. 교육이 곧 시장과 경쟁인 것이다. 따라서 취약한 교육환경에서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인 경제적 효율성(비용-편익 분석)에만 의존할 경우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인 문제가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신자유주의 교육경쟁의 지속은 교육부실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학교체육에도 현실화되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이미 입시경쟁이 시작돼 학생들은 방과후에도 사교육을 받느라 뛰어 놀기는 생각도 못한다. 더구나 2000년 시작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 대학입시를 위한 체력장 제도가 폐지되고, 내신에서도 체육비중이 줄어 체육은‘안 해도 되는 과목’으로 인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질병관리본부가 조사한 중고교생 비만율은 2005년 8.8%에서 2009년 9.6%로 증가추세이고,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6개 종목으로 구성된 신체능력 검사에 가장 낮은 등급인 4, 5등급 비율은 2000년 31%에서 2008년 42%로 증가하였다. 학생들의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비만은 늘고, 체력은 점차적으로 떨어지고 있음이 확연하다.

체육의 명분은 국민건강과 직결된다는데 있다. 국민이 건강하지 못해 나타날 수 있는 손실비용을 계산해보면 체육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2009년 국가 전체예산은 273조 8,000억 원인데 이중 체육예산은 6,372억 원 책정으로 0.23%에 불과하다. 반면 국민의 의료비 지출은 연간 31조원이 넘는다. 고령화 사회가 진행됨에 따라 65세 이상 노인의료비는 최근 20년간 10배 이상 증가했다. 스포츠의 생활화로 국민이 조금만 더 건강해져 연간 의료비를 2%만 줄일 수 있다면 한 해 체육예산에 해당되는 금액을 절약할 수 있다. 교육의 시장화 정책으로 초래된 학교체육의 결핍은 국가 미래의 역동성과 건강주권을 저해하는 핵심요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교육의 공공성 확보차원인 보편적 교육복지로 접근해야 한다.
 

<학교체육의 돌파구 : 과제>

지금까지 제시된 학교체육 정상화를 위한 발전과제는 대부분 학교체육 시설확충, 사회적 인식전환, 교사의 책무성 강조, 정책적 지원 등으로 요약된다. 기존 요구사항에서 사회적 인식전환이 정당성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파생적 의미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대통령의 결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냉전해체 이후 엘리트스포츠를 통한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적 전략 패러다임이 쇠퇴하면서 선진국은 학교체육과 대중스포츠의 정책에 집중하여 자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내실을 도모하였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성장논리가 합리화되어 개발도상국 당시의 체육정책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은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 속도를 걱정하고, 이를 봉합하고 속도를 늦추려는 국가의 의지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교육 불평등도 마찬가지이다. 교육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사각지대에 위치한 학교체육을 선진화시켜 동시에 다자간(학교체육, 생활체육, 엘리트스포츠)의 역동성을 결집시키기 위한 체육정책의 수립이 절실하다. 이러한 해법 찾기는 대통령의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학교체육의 문제를 정비하고 선진화 프로그램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학교체육 국가행동계획(학교체육 변혁의 틀)’의 선포를 이끌어내야 한다.

100여 년 전 폭력과 부정행위로 얼룩진 미국 학원스포츠를 개혁한 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학생선수가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대학 총장을 소집하여 현황파악, 규칙제정, 통제를 위한 조직으로 미국대학스포츠연맹(NCAA)을 출범시켰고, 이후 미국 학원스포츠가 철저하게 교육적 가치를 중시하도록 제도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NCAA 교육철학을 확립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결단은 우리 학교체육 선진화의 시작점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둘째, 시민사회단체의 공조가 필요하다

한국은 짧은 민주화 경력으로 아직까지도 막강한 대통령의 권력에 비해 시민사회의 결집과 대항력이 미약한 편이다. 소비문화가 득세하면서 시민사회가 공간적으로 확대되었지만 오히려 변혁을 향한 관심은 줄어들었다. 체육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를 할 수 있고, 정책제안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다수의 시민사회단체의 출현이 절실하다. 학교체육, 학생선수 인권, 장애인스포츠, 제도개선 등의 문제는 우리의 노력뿐만 아니라 협력관계로서 시민운동을 수반해야 한다. 즉 세계화 맥락 속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과 학교체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시민사회단체의 시민교육적 대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학교체육의 개혁주체로서 대통령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시민사회의 관심과 공조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정부의 교육정책 견제와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공유시킬 수 있는 영역이 시민사회이다. 그동안 엘리트스포츠에 적극 투자한 체육정책은 시프트다운(shift down)이 요구되며 사각지대에 놓인 학교체육을 시프트업(shift up) 시키면서 균형을 유지하자는 주장도 시민사회에서 공론화되어야 될 것이다. 시민은 건강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최근 KBS에서 보도된 새로운 학교체육을 만들기 프로그램이 시민사회를 자극하고, 관료들의 시선을 환기시켜 학교체육 선진화의 교감이 형성되는 분위가라 다소 위안을 삼는다.


* 새로운 학교체육의 시작 *

학교체육의 위기는 내부와 외부의 심층적인 요인이 상호 작용된 결과로 이해된다. 물리력이나 영향력이 큰 외부요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학교체육은 정치논리에 수반된 성장제일주의로 인해 국가정책에서 소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장논리에 부합되는 영역만이 합리화된 개발독재시대에 학교체육은 정치논리에 의해 운영된 수동적 영역이었다. 또한, 학교체육은 급격한 세계화과정에서 시장의 수월성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시행과 함께 더욱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체육교사의 전문성과 책무성의 결여가 위기의 내부적 요인임은 물론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도 요구된다. 그동안 학교체육 위기담론의 대응과제가 체육교육 전문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정부는 무관심과 미온적인 태도만을 관철시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학교체육 위기담론의 학술적 대응과제도 중요하지만 학교체육의 선진화를 실천시키기 위해선 과거에 머물고 있는 교육 관료의 권위주의와 맹목적 시장주의를 경계하고, 확고한 교육 평등주의(educational egalitarianism)를 정립하려는 대통령의 결단과 시민사회의 공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글쓴이의 희망이 실효성과 구체성을 갖추기 위해선 우선 내부적 동의와 전략의 수립에 근거한 미래적 비전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학교체육을 향한 미래적 비전(학교체육 행동계획)은 대통령의 결단을 유도하고,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강화시키는 촉매제로서 학교체육의 변혁적 패러다임 전환의 필수적 전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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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오륜 (부산대학교 스포츠과학부 교수)

 요가라 함은 원래 명상을 위한 수행이다. 오랜 명상을 하기 위한 좌법수행의 어려움을 덜고자 만들어진 것이 신체수행이었고, 그것이 요가 아사나(Asana)이다. 그러나 현대의 요가는 본질적 목적에서 벗어난 수행이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으면서 서로 정통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가 정통이다 정통이 아니다 에 비중을 두다 보니 오히려 대중들에게 요가수행의 진전을 일깨워 주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운동만 하면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다고 여기며 그러한 생각이 현대인들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다(이학준, 2006). 요가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요가만 하면 건강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통이고 정통이 아닐까? 인도에서 수행을 하고 왔다고 해서 아니면 명성 높은 단체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통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요가의 신체적 움직임을 과도하게 수행하고, 유연성만을 강조하여 고난도 동작들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통성을 가진 요가수행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가의 철학적 관점에서 수행은 심신일여이며, 범아일여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가의 철학적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요가 수행에서 일어나는 원리를 알아가는 것과 그것들을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행동, 즉, 행위의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에는 행위 그 자체로 인식되어지는 행위에 대한 평가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행위에 대한 평가의 기준척도는 행위의 근거를 정당화하는데 있을 것이다.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우리가 실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현실과 동 떨어진 행위는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질감만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가가 가지는 철학적 의미의 난해하면서 사변적이고 이론적 경향이 아닌 현장에 적용되어지는 철학의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철학이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괴리는 철학적이지 못한 것이며, 요가 철학에서 밝히는 실천철학적인 관점에서도 벗어나는 것이 될 것이다.
 요가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의 완성은 수행이라는 실천적 행동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이정학, 2009). 앎이 행동으로 이루어져 실천해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실천하기 힘든 과제이며, 현대 요가수행의 과제에 있어서도 지행의 괴리는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앎과 행위의 관계를 철학적 사색이 아닌, 경험적 실증으로 하나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요가수행의 완성에 도달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앎과 행위를 요가수행 완성의 관점에서 선택하고 수행하기 때문에 최고의 수행자는 올바른 앎과 행동을 요가수행의 완성과 최고의 관점에서 실행하게 된다(이정일, 2009). 이렇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올바르게 극복 될 때, 요가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요가수행의 정도로 가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스포츠 문화로서 요가에 대한 바른 인식과 함께 그것을 올바르게 실천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실천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세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요가수행에 필요한 윤리적인 규범을 준수하여 덕망을 쌓고, 요가 수행에 요구되는 총체적인 지식의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요가수행의 첫 번째 길은 윤리적인 수행이며, 이러한 윤리적, 도덕적 고지는 단순히 내적인 수행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며, 외적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요가수행에서의 윤리적 수행은 요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일반적으로 지켜야 할 의식이며, 첫 번째의 관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상업적인 요가는 요가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인 규범에서 어긋난 행동들이다. 현대의 물질만능주의는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수록 버리기가 싶지 않은 것처럼 요가수행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규범들을 알고 있지만 상업적으로 변화되는 수행에 대해 묵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지켜야 할 미덕이 있듯이, 요가수행자들도 수행에 필요한 규범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기를 노력하고, 요가에 필요한 총체적인 지식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올바른 규범과 지식의 이해가 바탕이 된다면, 수행의 과정이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둘째, 요가수행에 있어 신체수행과 호흡수행은 상호불가분의 관계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실천하여 효과성을 발휘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디 요가수행은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원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올바른 호흡수행은 생활 속의 편안한 호흡보다는 명상 중에 편안하고 고요한 호흡을 유지시키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며, 신체와 정신이 집중되어 뇌와 신체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 할 것이다(박지명 역, 2002). 자신을 알고 싶다면 호흡법부터 배워라 는 말이 있다. 이는 올바른 호흡법의 실천을 통해서 평온함을 느끼게 되고 이를 체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나를 실감한다고 한다. 또한 이런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평온함을 일상생활에 영위한다면 고민이 사라 질 것이며, 호흡법은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방법이 될 것이다(박문성 역, 2007).
 셋째, 신체수행 시 수준에 따라 다양한 동작의 신체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하고 극한의 경험에 목적을 두지 않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수행자의 수준에 따라 극한의 경험은 다르게 나타나 일반화하기 어렵겠지만, 극한이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 신체의 중심을 잃은 상태의 범위를 뜻하는 것이다. 현대의 요가수행은 많은 동작을 수행하기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극한을 경험하려 한다. 그러한 행위는 신체의 평온한 상태를 위한 수행이 아니라, 신체의 불필요한 움직임을 통해 신체의 정렬이 아닌 불균형적인 신체를 만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적당한 움직임 속에서 신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인지하고, 신체 움직임의 극한이 아닌 절제가 되어 질 때, 신체의 중심이 잡히는 것이다.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인지한다는 것은 집중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신체의 조절력을 키우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신체가 조절이 되고, 신체 안의 움직임이 조절이 된다면 요가수행에서 바라는 깨달음을 아는 것이 될 것이다(김선희, 권오륜, 2009). 깨달음이란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요가수행을 바르게 알고 실천한다면 마음과 신체 움직임의 평온함을 느끼게 할 것이며, 신체와 정신이 서로 자유로워지면서 신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심신일여, 또는 지행일치를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요가가 추구하는 깨달음의 철학적 의미를 일상생활 속에서 이해하는 기초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대 요가수행자들은 지행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총체적 지식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행을 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수행자의 모습이 본보기가 되어 요가의 발전이 향상되고 올바른 저변확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요가수행자 스스로가 인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 요가의 실제를 개선하는데 노력하여, 요가에 내재된 가치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과 함께 요가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스포츠둥지

( 이 글은 2010년 9월 한국체육철학회지, 18(3), 173-184 에 게재된 김선희․ 권오륜의 “요가의 실천수행 과제에 대한 소고”의 논문을 발췌,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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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영갑(동양대학교 생활체육학과)

한국 스포츠문화의 중요한 해석적 틀은 학교체육, 대중스포츠, 엘리트스포츠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학교체육과 엘리트스포츠는 태생적 한계에 따른 의식부재로 외부변화에 둔감하다. 근현대사의 공포정치 기간 동안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체육정책이 수립되어 시행다보니 선진화의 속도가 더디다. 양축은 문민정부 이후 체육정책의 탈권위적인 발상을 기대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일관성이 결여된 채 유지되고 있다. 오히려 사회통합이라는 명분아래 엘리트스포츠는 강화되고 있으나 학교체육은 교육정책에서 더욱 주변화 되었다. 경제변동에 의한 스포츠문화의 외형적 프레임이 확장되었음에도 스포츠문화의 중핵구조인 학교체육은 오히려 소외되는 역설의 시대인 것이다.
 
더 이상 학교체육을 방치할 수 없다는 내부의 반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개진되어 왔다. 결핍된 학교체육에 관한 내부의 성찰과 비판만으로는 현실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음도 지각하게 되었다. 동조세력의 결집이 필요한 시기에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통한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음은 이전보다 희망적이다. 최근 학교체육 비판의 주체가 안과 밖의 만남으로 확장되면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학교체육 개혁을 염원하는 학자로부터 방송사, 언론기관, NGO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회적 결집이 형성되고 있다. 대표적인 소통의 결과가 학생운동선수의 인권침해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최근 체육계의 인권침해 문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도할 정도로 사회적 의제로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한걸음 내단 실천과제가 학교체육법의 제정이다. 학교체육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다양한 공청회를 거쳐 안민석 의원에 의해 발의되었으나 2010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었다. 일부 학원스포츠 종목에서 공부하는 선수를 지향하기 위해 주말리그제를 시행하여 타 종목으로 확산되려는 상황과 학교체육법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향하는 학원스포츠의 방향과 내용과도 일정부분 일치함에도 부결되었다는 것은 아쉬움이 크다. 따라서 한국 스포츠문화의 구조적 프레임 간의 연계성이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스포츠문화의 대전환은 학교체육법의 제정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학교체육법의 논쟁거리

학교체육법 표결에 있어 반대의견을 제시했던 박영아 의원은 내용의 절반이상을 법 심의과정이 부실하다는 절차상의 문제에 집중하였고, ‘엘리트스포츠의 축소 위험, 특정과목 진흥을 위한 개별 법률의 필요성 의심, 구체적인 재원 확보 방안의 미비’ 등에 원론적인 내용만을 주장하였다. 학교체육법 반대논리는 이미 2010년 3월 15일자 남상우 박사의 칼럼에서도 확인된다. 중요한 두 가지 주장에 집중하여 반대논리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학교체육법: 특정과목만을 위한 개별 법률이 필요한가?

박영아 의원은 전인교육이라는 목표에서 보자면 모두 중요 교과목들이기 때문에 학교체육법의 형평성과 균형 감각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교육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심각한 격차가 존재한다. 대학입시에서 단위 배점이 높은 국·영·수 교과목만 중요시되고 비입시과목은 뒷전인 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다. 최근 역사인식의 부재를 개선하기 위해 국사과목을 필수로 전환시키기 위한 ‘역사교육 의무화법안’이 여야 의원 17명에 의해 공동 발의한 상태다. 또한 올해 2월 18일 ‘태권도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이하 태권도진흥법)’ 개정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 본회를 통과했다. 역사교육 의무화법안은 역사인식의 심각한 문제점이 도출된 반작용이며, 태권도진흥법은 민족문화의 고유자산인 태권도를 통해 한국적 가치와 위상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학교체육법의 제정도 마찬가지다. 학교체육의 결핍이 더욱 심각하게 진행될 경우 투입될 사회적 건강비용이 증가하여 다양한 사회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복지적 차원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학교체육은 특정과목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기보다 국민의 건강양극화를 좁혀 건강한 사회를 조성하는 밑거름이라는 필요성을 인식해야 된다. 따라서 학교체육법 제정이 특정과목 진흥을 위한 개별 법률로 이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인 것이다.

둘째, 엘리트스포츠의 몰락

학교체육법 부결에 대한 안민석 의원의 보도자료를 보면 학교체육법은 두 가지의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학생선수들에게 최소한의 학업을 요구하는 최저학력제 실시(A)와 일반학생들의 체력증진을 위한 학교스포츠클럽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B)에 관한 것이다. A의 내용은 학생선수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합숙훈련을 금하고, 훈련도 방과 후와 주말에만 하게하며 일정학력 수준에 미달하는 선수는 대회출전을 제한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특히 A와 관련해 박영아 의원은 체육계의 우려와 염려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며 엘리트스포츠의 장점을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학교체육법이 부결되어야 됨을 호소하였다. 체육계의 근심이 크다는 주장만 있고, 이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일부 엘리트스포츠 추종자들의 주장을 마치 체육계 전체의 입장인 것처럼 대변한 것에 불과하다. 운동과 학업은 학생의 몫이며 오히려 국제스포츠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운동시간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교체육법이 시대를 역행하는 법안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체육학계에서는 엘리트스포츠를 개선하기 위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개진되어 왔다. 주로 제시되었던 방향의 하나가 학생선수들의 학습권 보장이다. 최저학력제의 실시는 고사된 학생선수의 학습권 보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된 조치인 것이다. 학습권은 학생으로서 교육받을 권리이며 넓게는 인간답게 살아갈 기본권으로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가와 엘리트스포츠 추종자들이 만든 프로젝트로 성공한 운동선수 1%만 존재해왔고, 국민들도 그들만 기억하며 즐거워했다. 그렇다면 99%의 낙오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현실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학생선수의 인권문제를 무시한 채 엘리트스포츠의 투자에만 집중한다면 현재의 스포츠력(sports power)을 유지하면서 국민들에게 일시적 감동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한 사회통합적 효과도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국격 제고와 선진화를 모색하는 현실에서 엘리트스포츠의 미래는 반드시 선진국처럼 건강한 학교체육에 기반을 두어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학교체육법

경쟁과 수월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의 교육현실은 교육격차에 따른 계층격차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교육인사부패, 일제고사 부활, 국제중과 자율형 사립고 설립, 입시사교육 열풍 등이 주요한 교육 부조리 현상으로 진단된다. 신자유주의식 교육정책이 수립되어 시행되다보니 공교육은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교육은 시장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지금의 교육정책은 시장의 경쟁을 조정해주는 사회복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필요가 있다. 교육 불평등으로 폐쇄된 사회이동성(closed social mobility)을 우려하는 현실에서 공교육은 실질적인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방향성 설정이 중요한 과제이다. 2009년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희삼 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종전에는 교육을 통해 부의 대물림이 상쇄되어 불평등 구조를 완화해왔지만 이제는 오히려 교육으로 부의 대물림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경제력과 교육력(educational power)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의 방치는 사회전체의 신뢰도, 교육성취도, 건강수준을 하락시켜 다양한 사회문제를 노출시킬 수 있다. 지금의 교육현실에서 학교체육의 위기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학교체육을 선진화시키려는 노력인 학교체육법의 제정은 사회전체의 건강욕구 충족과 삶의 질 향상에 직결되므로 사회복지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비뚤어진 학교체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을 지향하는 학교체육법은 더 높은 차원의 평등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려는 비경제적 보장의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스포츠문화의 위대한 전환 : 학교체육법 제정

‘위대한 전환(great transition)’은 미국의 텔어스연구소가 2002년 발간한 미래예측보고서의 제목에서 인용한 것이다. 2015년 지구촌에 대위기가 올 것임을 전망하면서 대변환을 통해 부활의 긍정적 시나리오를 모색해야 함을 경고한다. 칼 폴라니의 저서인 ‘거대한 전환’도 같은 맥락으로써 다가올 경제위기에 다양한 사회문제가 발생됨으로 현재부터 미래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스포츠문화의 위대한 전환도 인식과 제도의 대전환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자는 의미이다. 참된 스포츠문화의 조성은 학교체육의 선진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체육의 현실성을 반성한 학교체육법의 제정은 미래 스포츠문화를 염려하는 현재의 실천적 노력인 것이다. 대통령의 선진화 선언이 경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특히 경제정책은 교육, 노동, 복지 등 유사분야의 정책이 수반되어야만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학교체육법 제정도 교육의 영역에서 선진화 논리의 한 지류인 것이다. 비정상적인 학교체육의 전반적인 문제를 제도화시키겠다는 의지가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실현될 때 건강한 미래 스포츠문화의 틀이 확립될 것이다. 이를 위해선 스포츠문화의 위대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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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서울대학교/시간강사)


현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스포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거의 매일 중계 방송되는 프로 스포츠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고, 스포츠 관련 산업은 타 산업을 앞지르며 경제의 중심에서 우리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게다가 프로 스포츠맨은 여느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스컴의 표적이 되어 공인으로서 대접을 받는 등 이제 스포츠는 특정 운동인의 전문영역으로서 국위를 선양하는 분야를 넘어서 선망의 인기 직종으로 부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대의 스포츠에 대한 호감은 대중과 호흡하려는 현대의 대중성이 갖는 취미(趣味, taste)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현대 이전의 문화는 엘리트 중심의 고급문화였다. 예술 역시 순수예술(fine-art)이 주도하는 지성중심의 고도의 세련된 고급문화가 예술사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여기에서는 미가 예술의 주제였다.


                               고대 그리스의 항아리에 표현된 레슬링 장면. 생활 용기에 
                               그려질 만큼 그들의 스포츠 문화는 일상이었으며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예술에서 추구하던 미란 무엇일까? 일상에서 우리는 ‘미인(美人)’, ‘아름다운 꽃’ 등을 언급한다. 즉 ‘사람인데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고 ‘꽃인데 미적 요소가 특질로 있는 꽃’을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위에서 말한 ‘미인’과 ‘아름다운 꽃’은 정말 ‘아름다운 것(the beautiful)’일까? 이것들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만한 미적 특질(aesthetic quality)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근대미학에서부터 ‘미적 특질의 결과로서 미’라는 관념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즉 칸트는 대상에서가 아니라 ‘어떤 대상의 현존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에서 미를 찾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미란 대상의 특질이 아니라 그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주관의 판정능력으로서 ‘취미’를 의미한다. 그것도 그 규정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성적(aesthetic)’인 역할로서 말이다.


스포츠맨은 자기만족에서 기쁨을 얻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미학사에서는 두 가지 미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하나는 미적 특질로서 객관적인 미와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측면으로 파악되는 주관적인 미가 그것이다.


                                           스포츠맨은 자기만족에서 기쁨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미는 인간의 정신활동 중 예술 속에서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 즉 예술은 성스러움(聖)을 추구하는 종교, 선(善)함을 추구하는 도덕, 진실다움(眞)을 추구하는 학문과 더불어 인간의 정신활동으로서 미를 추구하는 가치 활동이라고 규정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영역에 스포츠를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스포츠는 인류의 오랜 동반자이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여명기에 있어서도 스포츠는 그들 문화 속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육체적 활동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던 서양의 중세시대에도 스포츠는 여전히 인기를 누르며 행해졌으며, 사유의 세계를 인간 최고의 영역으로 간주하던 근대시대마저도 스포츠 문화의 꽃으로서 올림픽의 재정비가 있었다.        

   

                              스포츠 관람객 역시 멋진 플레이에 박수를 보내며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스포츠 세계에서의 미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객체적 대상으로서 스포츠에서의 미적 특질과 관계되는 미를 언급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대상과 나를 연결시켜 거기에서 표상되는 나의 만족이라는 주관적 판단, 즉 개인의 취미판단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눈높이와 취미에 걸 맞는 문화에로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미를 추구하던 인간의 활동으로서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미를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 즉 진지한 것, 고상한 것 보다는 가볍고, 흥미롭고, 매력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문화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의 주변부로 여겨져 왔던 스포츠도 대중문화의 일부로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현대적 문화상황 속에서 스포츠의 미적 세계를 파악해 볼 수 있겠다. 즉 스포츠는 예술 못지않은 인간의 정신 영역으로서 미의 가치에 대한 흠모의 활동이며, 그 결과 스포츠를 실행하는 사람은 물론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에게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환기시키는 문화 활동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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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 (서울대학교 강사)


현대철학자들 중에는 현대화의 과정을 이성을 통한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보곤 한다. 특히 이러한 합리화의 가장 빛나는 실현은 과학․공업․기술의 발전을 통한 자연의 정복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화의 합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자멸의 수렁으로 몰고 갔다는 패러독스 또한 지적되고 있다.

즉 지금까지 과학적 학문과 기계적 발명의 발전을 인간 상태를 구제해 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찬양해 온 모더니스트들이 관점에 대해 반-모더니스트들은 기계의 인간화가 인간성의 기계화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는 우려의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기계화에 대한 해독제로서의 예술에 대해 그 현대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술(技術)과 예술(藝術)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불구대천의 원수관계처럼 보인다. 아니, 기계화의 과학시대에 대해 예술의 감성(pathos)이 온전치 못한 사회 상태를 치유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언제부터 이러한 관점이 나타난 것일까?



                                     우리 전통문화에서 기술(공예)를 상징하는 치우천황



원래 예술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ē)’를 번역한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테크네와 아르스가 오늘날 ‘아트’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시대의 테크네 ― 로마와 중세, 심지어는 근대 초기인 르네상스 때까지도 쓰였던 아르스 ― 는 솜씨, 즉 물품, 가옥, 동상, 배, 침대, 단지, 옷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솜씨뿐만 아니라 군대를 통솔하고 토지를 측량하며 청중을 사로잡는데 필요한 솜씨까지를 뜻했다. 이 모든 솜씨들이 ‘테크네’라 지칭되어 건축가, 조각가, 도공, 양복장이, 전략가, 기하학자, 변론가 등의 ‘테크네’라 불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술의 용어에 관한 현대 이전의 개념 속에는 예술과 기술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때의 솜씨는 규칙에 대한 지식에서 발휘되는 것이어서 규칙과 법칙 없이는 테크네도 존재할 수 없었던 터라, 예술 또한 지식의 결과로서 즉 이성(logos)의 산물로서 과학기술과 구별될 수 없었다. 결국, 현대화의 합리성으로서 기술에 대한 경계는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기술을 상징하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그렇다면 스포츠에 있어서 기(技)와 예(藝)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포츠가 기술의 결과인지 예술의 결과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 열광하며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아쉬워하며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스포츠의 어떤 면이 우리를 이와 같은 상태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 바로 스포츠맨의 경기를 이끌어가는 플레이와 플레이로서 진행되는 경기 그 자체가 우리를 열광케 하는 것이다. 즉 어떤 때는 스포츠맨의 멋진 플레이에 매혹당해 그에게 그리고 경기 자체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또 어떤 때는 어처구니없는 그의 플레이에 실망하여 그 경기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스포츠맨의 플레이는 기술로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술로 읽어야 하는가? 모든 스포츠맨은 자신의 분야에서 경기력 향상을 위해 경기기술을 갈고 닦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연마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할 것이다. 스포츠맨은 스포츠 경기와 관련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하여 관중 앞에서 경기를 치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스포츠는 스포츠맨에 의한 경기기술의 완벽한 소화라는 명제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포츠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본디 예술은 창작자와 감상자 그리고 그 창작의 결과로서 작품이라는 기본 구조 속에서 성립된다. 스포츠 또한 경기수행자로서 스포츠맨과 관중 그리고 관람꺼리로서 경기 자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스포츠맨은 마치 예술분야에서의 창작자가 그러하듯이 숙련된 기술과 결합된 결과로서 경기 그 자체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관중들은 스포츠맨들에 의해 제공되는 관람꺼리로서 경기를 관전하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는 감정의 체험을 겪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의 표현으로 감성(예술)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스포츠에 있어서 기(技)와 예(藝)는 현대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두 성질로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심동체(異心同體)인 것이다. 마치 이것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의 기술을 상징하는 헤파이스토스처럼, 그의 기술력이 만든 올림포스의 신전과 공예품들이 더 없이 아름다웠다고 하는 찬사 속에서 확인되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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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서울대학교 강사)


우리 옛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즉, ‘외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데 속마음 또한 슬기롭고 똑똑하다!’라는 한자성어 ‘수외혜중(秀外惠中)’의 의역에서 나온 속담이다.

‘보기 좋은 떡’이 왜 ‘맛도 있는 것’일까? 음식의 경우, 맛과 영양은 음식의 제1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에 음식의 부차적인 조건인 시각적 효과까지 좋다면 그 음식은 군침이 생기고 식욕을 자극하여 더 맛있게 느껴져서 그럴 것이다!

이렇듯 음식에서 외적 형식은 음식의 본질인 맛과 영양에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해 보기 좋은 외적 형식으로서의 시각적 효과가 대상의 본질적 내용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이중주라고 한다. 즉 내용을 담는 그릇이 형식이요, 그 그릇으로서 형식에 의미가 담겨지는 게 내용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의미 있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물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디자인분야에서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형식주의 모토가 있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작품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바로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디자인의 결과로서 조형작품은 기능을 최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곧 기능주의와 연결되어, 장식이 없는 순수한 미적 형식만을 고집하는 병폐를 낳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던 ‘예술은 예술 이외의 일체의 것과 무관하다!’는 관점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운동으로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명하여 예술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순수주의를 주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술의 기능주의도 그리고 순수주의도 너무 한쪽의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스포츠에 대해서도 형식과 관련된 이러한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스포츠를 관전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각적 형식에 집중한다. 즉 경기장을 찾은 관중이나 텔레비전의 중계를 지켜보는 관람자 모두 눈앞에 펼쳐지는 스포츠맨의 몸놀림에 눈을 빼앗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스윙에서, 그리고 피겨여왕 김연아의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우리는 형식적으로 완벽한 폼(form)에 매료당해 감탄하며 찬사를 보낸다.



                        타이거 우즈의 정확한 티샷은 그의 멋진 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경기수행을 위한 스포츠맨의 멋진 폼은 폼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즈의 멋진 티샷은 그것 자체로 훌륭한 형식으로서의 폼을 보여주지만, 그 폼은 공을 멀리 그리고 정확한 위치에 안착시키려는 기술의 시각적 제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연아의 점프 또한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기본점수 9.5)’의 첫 점프를 ‘트리플 러츠(기본점수 10.0)’로 바꿔 기본점수를 높이고, 트리플 플립을 이후 단독 점프로 구사하기 위한 기술의 형식적 폼이기 때문이다.

 

                              김연아의 완벽에 가까운 점프기술은 아름다운 폼과 감정 어린 
                              표현을 가능케 한다.

 

결국 스포츠에 있어서도 폼과 기술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앙상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폼 없는 기술은 공허하고, 기술 없는 폼은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에 있어서 아름다운 폼은 더 높이,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한 기술의 미적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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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 (서울대학교 강사)


인간의 육체, 즉 인체(human body)에 관한 인류의 관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πάντων χρημάτων μέτρον ἐστὶν ἄνθρωπος)’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그들 삶 속 여기저기 즉 학문, 종교, 예술 등 문화전반에 스며들게 했다. 이와 같은 인간 척도론은 조형예술분야와 신체문화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추구되어, 전자의 경우 이상적 인체의 표현으로 그리고 후자의 경우 올림픽이라는 인체의 제전으로 나타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체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미네르바 여신의 은총으로 사계절의 온화한 기후를 얻어 일상생활에서도 인체를 드러내는 일이 잦았고, 그럼으로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gymnos)’을 자연스럽게 목격하게 되어, 인간의 벗은 몸에서 이상적인 인체를 발견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아름다운 인체를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몸의 여기저기를 압박하여 아름다운 형체를 방해하는 옷을 피했다는 점과 각종 운동 경기의 심판관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보고 자라난, 그리고 그 인체를 아름답게 소묘했던 젊은이들의 눈에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선출했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른 체자리아노의 ‘정방형의 인간’, 1521년



고대 그리스의 인체에 대한 탐미는 1세기경 카이사르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에 의해서 구현되었다. 그는 원과 사각형에 의한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으로써 ‘이상적 인체’(the ideal human body)를 도해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잘 다듬어진 인간은 두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벌려 정사각형을 만들고, 그 사각형의 꼭짓점을 서로 교차시키면 배꼽에서 만나며, 그 배꼽을 중심으로 사각형의 한 꼭짓점을 반지름으로 하여 원을 돌리면, 사각형에 외접하는 원이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원과 사각형의 인체(aner tetragonos)’는 ‘호모 콰드라투스(homo quadratus)’, 즉 ‘정방형의 인간’이라고 불리며 이상적 인체 표현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트루비우스의 것에 수정, 보완을 가하면서 그의 장방형의 인간은 비트루비우스의 것보다 더 유명해져 인체미를 논하는 자리라면 항상 언급되는 인체미의 전거로 인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체육활동을 통해 인체를 단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올림피아 제전은 경기가 열리는 바로 그 지역인 엘리스에서만 10개월 가량 연습기간을 가질 정도로 그리스에서 펼쳐지는 각종 운동경기는 모든 그리스 청소년에게는 인체를 단련시키는 강력한 자극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체를 단련시킨 그리스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축제에 아름다운 인체로써 참가하며 기량을 뽐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올림픽을 관전했던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들에 의해 고스란히 작품으로 남겨져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고대 5종 경기 중 하나인 창던지기 선수를 이상적인 비례로 표현한 조각품



                                                창을 든 사나이의 8등신 비례 체계


올림픽 경기, 특히 고대 5종 경기(달리기, 넓이뛰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창던지기, 활쏘기)와 관련이 있는 조각상 중에는 기원전 450년경에 폴리클레이토스에 의해 제작된 <창을 든 사나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조각의 미학자 빈켈만의 지적대로 ‘미의 최고의 법칙’으로 손상이 없다. 그가 직접 저술한 『카논』(비례규범)에 따르면, 완벽한 인체조각상은 전체 신체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 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가 비례적으로 조화로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정지해 있지 않는 움직이는 신체의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임에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게다가 머리를 기준으로 하여 전체 신체가 8등분으로 나뉘는, 소위 8등신으로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배꼽을 중심으로 하반신과 상반신은 황금비율(0.618 : 0.382)로 나뉠 뿐만 아니라, 힘을 주고 있는 한쪽 다리와 힘을 빼고 있는 다른 쪽 다리의 힘의 균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머리는 그 움직임을 자유스럽게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살짝 기울여져 있고, 다리 또한 엉덩이와 함께 축을 이루며 힘을 분산하고 있기에 옆에서 볼 때 신체의 실루엣은 S자 곡선을 그리는 등 매우 유연한 자세 이른 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렇듯 창을 던지는 운동선수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고전기의 대표적인 이 조각상은 벌거벗은 아름다운 인체, 즉 움직이는 신체를 묘사한 누드의 전형으로서 완벽한 수적 질서와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 조각상은 이후 시대의 미술가들이 인체를 묘사함에 있어서 두고두고 참고하는 모범으로서 ‘누드의 카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운동선수의 신체단련을 통한 건강한 인간의 신체성의 전형 또한 이 조각상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이상적 인체의 카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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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안용규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건강복지학부 교수)

아레테(aretē)와 테크네(technē)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철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일반
적으로 아레테(aretē)는 덕, 탁월성으로 번역을 하고, 테크네(technē)는 기술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 아레테와 테크네는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아레테와 테크네의 개념은 호메로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탁월성, 덕, 기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레테와 테크네는
각각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협력적인 관계에 있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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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으로 신체의 아레테를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의
5가지로 명시하였다. 이 5가지의 신체의 아레테는 자연적인 신체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아레테를
의미하며, 또한 이 신체의 아레테는 테크네의 도움 없이는 현실화되기 어렵다.

 
현대 스포츠에서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를 가장 잘 발현시키는 선수는 대한민국의 김연아와 박태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김연아는 점프와 턴 기술을 보완하여 아사다 마오보다 더욱 완벽한 기술을 구사
하게 되어 오늘날 세계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박태환은 타고난 폐활량을 바탕으로 최첨단
수중촬영기술로 스타트의 문제점과 스트록을 완벽히 보완하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영광을
가져왔다.

 
또한 현대 스포츠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 없이는 기록단축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스
토텔레스가 언급한 신체의 아레테, 즉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에 최첨단
테크네의 접목이 오늘날 스포츠에서의 경기력향상이나 기록단축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키점프에서의 유니폼, 사이클에서의 헬멧, 수영에서의 전신수영복, 육상에서의 운동화는 점점 진화
및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스포츠가 기록을 단축시켜 전 세계인을 열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는 오늘날 스포츠에서 전 세계인이
열광하게 하는 근본 진리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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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안용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북유럽에서는 체육전공의 분야에 진학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재 대학 지원율이 점점 낮아
지는 영역은 전통적으로 학문성이 높았던 의학, 약학, 기계공학 등인데, 체육분야는 이미 그 위를
올라선 상태이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더 계속될 전망이다.

 
전통적인 학문은 늙어서도 남을 위하여 고된 일은 계속해야만 하는데, 이 나라의 GNP는 이미 3만
5천불을 넘어섰고, 실직수당도 신입사원 초봉에 버금가는 실정이다. 따라서 먹고 사는 문제가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다. 단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질이 첫 번째 관심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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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체육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이 스포츠산업, 경영, 관리, 운동처방, 의학 등을 연구하는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다. 뛰고, 달리고, 숨을 헐떡이고, 땀 흘리며 흡족해 하는 건강에 대한 비방은
이들 체육전공자들이 가지고 있다. 이들이 바로 사회체육의 선두주자들이다.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
길은 이길 저길 다양하겠지만 삶의 질로 따지자면 아무래도 몸 건강, 마음 건강을 수반하는 체육학
전공이 제1순위이다.

 
체육을 전공하는 모든 이에게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것은 기쁜 삶과 슬픈 삶을 기술한
『홍범(洪範)』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중국 성인인 기자(箕子)가 쓴 글인데,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서경(西經)에 들어있는 한 편이다. 홍범은 오행학설사에서 획기적인 저작이다.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융합되기 이전에 <홍범>은 오행에의 순응을 핵심으로 하는 경세의 대법칙을 체계적
으로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음양과 오행을 함께 붙여 말하지만, 이론적 발생은 다르다. <홍범>은
기자가 임금에게 진상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홍범구주에서는 아홉 가지 범주를
논하며 오행을 가장 앞세워 이야기하고 있다.

 
오행을 가장 앞세우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매개이자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오행설은 한대에 이르러 주역의 음양설과 더불어 생성되고 전개되었다. 그래서 오행을 논하지
않고서는 동양철학을 논하기 어렵다. 동양철학의 기본적 사유구조의 문화 유산은 오행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범구주는 “그 첫 번째 것을 오행이라고 한다”고 하여 오행을 첫머리로 다루고 있다. 오행의 순서,
오행의 성질, 오행의 맛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첫 번째는 수(水)이고, 두 번째는 화(火)이며, 세 번째는 목(木)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금(金)이고,
다섯 번째는 토(土)이다. 수는 아래로 젖어들고, 화는 위로 타오르며, 목은 휘어지거나 곧은 것이며,
금은 마음대로 구부릴 수 있고, 토는 곡식을 생산할 수 있다. 수는 짠맛을 띠고, 화는 쓴맛을 띠며, 목은
신맛을 띤다. 그리고 금은 매운맛을 띠고, 토는 단맛을 띤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물=수(水), 불=화(火),
목(木)=나무, 금(金)=쇠, 토(土)=흙 그대로이다. 오행의 성질이나 맛은 상징이나 은유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행의 체계는 동양사 2천년 동안 모든 사람들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며
사고의 한 코드로서 존재하고 있다.

 
인체의 장부에 오행을 배속하여 상생, 상극, 상모, 상화의 작용력을 통해 의학적 원리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행의 질서란 자연의 질서이며, 동양철학 고유의 기호논리학적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책명 끝에 ‘경(經)’자가 들어간 것은 신이 읊은 내용을 사람이 받아 쓴 글이라고 해서 ‘책중의
책’이라고 하며, 대단히 난해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홍범의 끝 부분에 체육철학을 전공하는 자에게
주는 글귀가 있다. 그 글을 살펴보면, 건강을 지녀야 오복(五福)이요, 건강을 잃으면 육극(六極)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선현들이 말했듯이 “재산을 잃거나 명예를 잃는 것은
부분을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홍범의 오덕, 육극과 맥을
같이하는 건강의 논리이다.

 
이러한 전제를 놓고 본다면, ‘삶의 질’과 체육 전공의 상관관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GNP가 2만불 이상 넘어가는 현재 우리는 체육을 전공하여 미래에서 가장 유망한 직종과 함께
가장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위치에 있는 것이다. 건강을 전도하고, 건강을 실천하여, 미래에는 체육
전공자가 가장 각광받는 전공이자 직업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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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량희 (전남대학교 강사)

 

Ⅰ. 노인문제
의료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에 의한 핵가족화로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오늘날 전통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노인문제들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노인들의 ①경제(經濟), ②건강(健康), ③무위(無爲)·
무료(無聊), ④사회적(社會的) 소외(疎外) 문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단체에서
노인 문제를 풀어가려 노력하지만 그 해결은 근본적으로 아직 미흡한 상태다. 노인에 대한 규정은
생물학적, 기능적 그리고 사회학적 관점에 따라 규정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노년기연령
(老年期年齡)에 관한 제도적 규정은 한 나라의 정년연령 및 연금개시연령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삶이 그렇듯 노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성공적 노화(老化)는
나이가 들더라도 신체적 정신적 장애와 위험이 적으며 자신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상태에 대해 만족하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요가(YOGA) 수행의 현대적 의미
인도의 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발췌된 ‘지고자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바가바드기타 2장
48절에는 ‘언제나 요가(하나됨) 안에서 살고 그리하여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는 평등한 마음으로써 행동하라’고 기술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마음을 일러
 요가라 하며 흩어진 정신을 통일한 자로서의 슬기로운 요가 수행자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지혜에 의해 안정되고 신 또는 아트만과 하나 될 때 요가를 성취하였다’고 설명한다.
즉 요가는 기쁨과 슬픔, 이익과 손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인생은 이중성의 속성으로 된 세상에서 영향 받아 고통을
느끼지만 요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요가의 구성
요가는 정신, 신체 정화법들과 금계(禁戒)와 권계(勸戒) 자세(아사나) 그리고 호흡조절
(프라나야마), 제감(프라티아하라), 집중(다라나), 명상(디아나), 삼매(사마디)의 요소로 되어있다.

1) 윤리적 규정
금계와 권계는 자신과 자신 이외의 관계를 규정한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인간적 규정이다.

2) 신체적 규정
아사나(자세)와 호흡조절은 육체에 관한 규정이다. 신체의 개선에 있어 호흡조절은 필수 요소다.
아사나를 수행함으로써 평형감각을 기르고 강하면서도 유연한 육체를 만든다. 또한 내분비선의
기능을 조정하고 근육과 신경계통이 조화를 이루게 하여 혈액 순환과 소화 기능을 개선한다.
결과적으로는 건강한 육체를 통해 마음이 평온해지는 목적을 지닌 신체에 대한 규정이다. 아사나는
움직임이 없는 명상 상태에서도 신체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그 효과는 매우 강하다.

3) 심리적․영적 규정
프라나야마(호흡조절)와 프라티아하라(제감)를 통해 육체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조절하여
정신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감각기관의 제어인 제감의 단계를 통해
집중에 이를 수 있으며 집중을 지속시킴으로써 선정의 상태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삼매 즉
초월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요가의 마지막 목표로써 심리적 영적 규정을 내포한다.

4) 사회 문화적 규정
인도인들은 마누법전 이래 고대로부터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artha), 까마(kama), 달마(dharma),
목샤(moksa)에서 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먼저, 아르타(artha)란
물건이나 대상 또는 질료를 뜻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부와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라는 뜻이며
이 가치로서 세속적인 삶에 필요한 부(富)와 명예 또는 권력을 성취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맺어
제반(諸般)의 현상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둘째, 까마(kama)란 좁은 의미로는 성적 욕망, 쾌락을
뜻하지만, 넓게는 음악, 연극, 미술 등 예술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을 의미하여 정신적,
육체적인 즐거움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며 삶을 보람 있게 살도록 한다. 셋째, 달마(dharma)는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하는 일종의 법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 목샤(moksa)는 해탈이며 더 이상 세간의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다. 그것은 쾌락 중의 쾌락이고, 행복 중의 행복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중의 최고의 가치다. 처음 세 가지가 세속적인 의무를 완성하는 가치라면
목샤는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한 영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이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해 마누법전에는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그 4개의 단계가 학생기(學生期),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捿期), 그리고 유행기(遊行期)다.

첫째, 학생기(學生期)는 태어나 대략 스물다섯 살까지로서 달마를 배우고 익히는 시기다. 이때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기 위해 육체적 감정적 에너지를 보존, 전환해야하며 그에 따라 생명력이
강해져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조절력이 건강해지고 안정된다.

둘째, 가주기(家住期)는 대략 25세부터 50세까지이며 아르타와 까마를 동시에 추구하는 시기다.
결혼과 활동적인 삶을 통해 명예나 부를 이루며 가족과 인간관계에서 즐거움들을 맛본다. 그리고
자녀 양육, 가족 보호, 직업에 대한 충실성, 스승들, 신과 조상,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온갖 의무를
충실하게 해야 하는 시기다.
 

셋째, 임서기(林捿期)는 50세 이후 대략 75세까지라 할 수 있으며 숲으로 들어가거나 집에 머물더라도
혼자 지내며 세속적인 걱정, 욕망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 또한 경전을 공부하고 수련하여 마지막
단계를 위한 준비를 한다.

마지막, 유행기(遊行期)는 온전히 수행하는 단계다. 75세 이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오로지 영적
수련에 집중하며 달마를 실현하여 해탈에 이르는 시기다. 부부가 같이 지낼 수 있지만 가능한 한
가족과 떨어져 오직 신과의 만남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 바친다. 이렇게 가족을 떠나 영적 수련에
집중하는 생활을 산야스라 하며, 이런 사람을 산야신(Sanyasin)이라고 한다. 오랜 인생을 겪은
그들은 지혜로 가득 차있으며 젊은이들은 그들로부터 지혜를 구하기도 하여 산야신들은 교육자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즉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서 존경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교육자로서의 산야신은
학교나 단체에 있는 교육자와는 다르며 영적 스승과 같은 개념이다. 이같이 심신을 수련하여 지혜에
이르는 삶은 고스란히 요가 수행과 연결되어 있다.


Ⅲ. 요가수행을 통한 노인문제의 극복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경제적 여유, 신체 건강과 마음의 평화, 외로움과 두려움의 극복과
더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와 함께 존재의 행복일 것이다. 이는 요가를 실천하여 얻을 수 있는
신체적, 심리적 건강과 요가 명상을 통해 얻는 요소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요가의 효과는 첫째, 신체의 기능을 강화할 뿐 아니라 마음을 조절해 준다. 요가는 상대적 관계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하며 그로부터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도록 돕는
실천철학이다. 따라서 요가 수행은 자기 육체의 문제를 인식 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를 파악하게
한다. 주의사항으로는 요가 아사나를 수행하기 전에 노인의 신체적인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
타인과의 경쟁을 하거나 처음부터 자세의 완성에 집착하면 노인의 신체 특성상 오히려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를 응용하는 순서는 심장에서 먼 곳부터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아사나를 행한다.
정화법으로 알려진 요가 기법들을 행해 몸을 구석구석 정화하고 아사나를 통해 척추를 강화하며
뇌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킨다. 이 모든 행법은 반드시 규칙적인 명상과 함께 행함으로써 내부에
잠재하는 타고난 생명력을 발현하게 하고 지혜를 쌓아간다. 하타요가프라디피카 1장64절에는
젊은이, 성인, 노인이나 병들고 허약한 이들 누구나 요가 수행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요가 명상으로 뇌의 노화를 멈추고 집중력을 얻어 지혜의 길을 찾는다. 뇌는 인간의 몸에서
육체적인 삶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을 하는데 직접 관여하는 기관이다. 나이가 들수록 뇌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복잡함과 갈등 요소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뇌의 노화는
더욱 가속화한다. 하지만 고요한 명상 상태에 든 사람들의 뇌파를 측정하면 대뇌피질의 흥분이
진정되고 고피질이나 간뇌의 기능이 활발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명상이 대뇌에 걸려 있는
과도한 부하를 없애고, 평온하고 유연한 의식 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셋째, 삶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내관의 힘을 길러준다. 육체적인 시각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삶의 초점을 맞춤으로서 현실에서 부족한 것들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생긴다.
따라서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 따라 그 누구도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요가는 이런 마음의 모순을 영성의 개념으로 해결하고 있다. 순수하고 참된 나의
본질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이다. 죽음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 활동의
일시적인 멈춤으로, 순수 상태의 정신은 육체가 노화하는 동안 열매를 맺고 더 높은 차원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요가는 이러한 심오한 우주 의지에 부합하고자 고안된 자기 훈련법이다.
이와 같이 요가 수행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상태의 질을 개선하여 성공적
노화(老化)에 이를 수 있게 함을 알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행복은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서 온다고 말한다. 예수, 석가모니 와
같은 '인류의 스승'들도 '존재의 삶의 방식'을 강조했었다. 그러한 삶은 나 이외의 대상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는 요가 수행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오랜 세월을 지내며 수행력을 지닌 노인에게서
젊은이들은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설 수 있는 가치관과 행법이 현실의 사회에 필요하며 그러한 환경 안에서 노인의 문제는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해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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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송형석 (계명대학교 체육대학 교수)


알맹이가 중요할까 껍데기가 중요할까? 당연히 알맹이가 중요하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느냐고 핀잔듣기 십상인 물음이다. 껍데기는 단순히 알맹이에 부수하여 그것을 돋보이고
꾸며주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알맹이가 껍데기보다 중요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중시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금의 소비 경향을 일컬어 “상징적 소비”라고 표현한다.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때문이 아니라
상징가치나 기호가치 때문에 상품을 구매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성능 때문이 아니라 외관과
디자인 때문에 자동차, 냉장고, 청소기 같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옷의 경우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의복의 본질적 기능, 즉 사용가치는 보온과 보호, 가림 기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색상이나 디자인 또는 상표 때문에 의복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명품”의 구매 심리에 이러한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 껍데기를 중시하는 경향은 모든 사회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경제 영역을 넘어서
정치, 나아가 개인의 일상 영역에까지 파죽지세의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에 올랐던 오세훈과 강금실의 대결에서 오세훈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의 훤칠한 외모와 멋진 몸매가 유권자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심어주었고, 주저 없이 그에게
한 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비밀이다. 당시 대중매체는 이를 두고
“감성정치”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지, 상징, 외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껍데기는 일상생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신입사원 선발, 나아가 사회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는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보다는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이, 즉 알맹이가
견실한 사람보다는 껍데기가 번지르르 한 사람이 선호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껍데기를 가꾸는 일은 일생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2006년 말 개봉되어 수 개월간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했던
 “미녀는 괴로워”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수이다. 가수에게 있어 알맹이는 목소리와
가창력이다. 반면에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양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일종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양자를 모두 겸비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꼭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어야만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자, 심수봉 등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은 대개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타고한 미성과
풍부한 가창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미녀는 괴로워”에서 진짜 가수는 찬밥
신세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는 립싱크가수가 인기를 독차지 한다. 진짜는 적절한 껍데기를 갖추지
못했기에 푸대접을 면치 못했고, 가짜는 껍데기가 좋아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결국 껍데기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주인공은 껍데기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성형과 스포츠로 자신을 완전히
재포장하여 신상품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껍데기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스포츠의 역할도 바뀌기 마련이다.
스포츠는 다양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몸짓의
활동으로 그치지 않고 몸짓을 통해 내면적인 그 무엇을 고양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협동심”, “인내심”, “극기의 정신” 등이 전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일련이 몸짓을 통해 고양시키려고 했던 내면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내면적인 것”에서 “외면적인 것”으로, 즉 알맹이에서 껍데기로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에로틱한 몸”이 스포츠참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포장 제조기로서의 스포츠 역할은 비단 개인의 몸 가꾸기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지역 사회나
국가 같은 집단은 물론이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재를
포장하여 결국에는 인정과 승인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재현 및 상징 기제의 역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은 단순한 월드컵 4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은근히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4강의 의미로까지 확장되어 해석된다. 100m 세계기록갱신은 단순한 선수 개인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체재가 추구하는 비가시적 인류 진보를 가시화시켜 주는
사건으로 재해석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포츠는 개인과 집단, 나아가 전 인류에게 기존 자본주의
질서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는 환상적인 껍데기 역할을 담당해왔다.

탈주술화, 합리화, 세속화의 기치 아래 효율성과 효용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 역할을 해왔던
근대화과정에서 이와 같이 신비주의화, 미학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이미 그러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그 상품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큰 맘 먹고 산 상품이 기대와는 다르게 전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구매는 일종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기대는 해석의
 방식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상품의 외관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판매자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기대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할 필요가 있다. 구매자를 유혹하는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상품의 외관을
미학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미학의 논리는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껍데기의 중요성이 역설되고 있다. 한편 껍데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과대 포장이 등장하였고, 나아가 알맹이와는 상관없는 껍데기, 소위
“탈맥락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껍데기 아닌 껍데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껍데기는
더 이상 알맹이를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가사세계와 가시세계, 원본과 이미지, 진리와 허구, 진짜와 가짜의 전도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과 관련하여 “확실히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 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리가 감소되고
환상이 증가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신성성은 더욱 고양된다고 여겨지고 있고, 그 결과 최고도의
환상이 최고도의 신성성이 되고 있다.”고 썼다.

알맹이가 중시되었던 문화에서 스포츠철학자들은 스포츠가 인격 같은 알맹이를 가꾸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애써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껍데기가 중시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스포츠가 껍데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해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입장에서 이러한 경향을 싸잡아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이러한 현상을 적절한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개인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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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우리나라 체육교과서를 보면 각종 스포츠는 YMCA를 통해서 도입되었다는 기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왜 스포츠의 역사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야구, 배구,
농구, 보디빌딩도, 라켓볼, 소프트볼 역사에도…. 이러한 역사는 미국 YMCA와 스포츠의 특별한
결속 관계를 암시한다.

YMCA가 스포츠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한 마디로 미국 YMCA 운동과 스포츠의 관계
때문이다. 미국 YMCA는 많은 스포츠를 창안했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도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무엇 때문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스포츠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일까?”하는 의문은 남게 된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설명은 간단하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복음전략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YMCA는 청소년들을
YMCA로 끌어들여 복음을 전파하고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되었다. 미국 YMCA는 보디빌딩,
농구, 배구, 라켓볼 등을 창안했으며, 소프트볼을 재 조직화했다. 그리고 야구, 미식축구, 수영, 캠핑
등과 같은 스포츠클럽을 운영하였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YMCA 운동(YMCA Movement)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역사와 YMCA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보다 앞서 스포츠가 발달된 나라는 영국이었으며, YMCA가 탄생된 곳도 영국이었다. 영국의
윌리엄스(George Williams)는 런던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신앙심을 굳건히 하기위해
YMCA를 창립하였다. YMCA가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면서 YMCA운동의 프로그램이나 서비스
형태는 아주 다양했다. 여러 나라 및 공동체 조직에서 지역민들의 요구에 부합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러나 초기 세계 YMCA본부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스포츠를 YMCA운동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 YMCA가 ‘체육사업(physical work)’을 YMCA운동에 포함시킨 이래 19세기
말까지 미국 전역 YMCA에는 약 450여개의 체육관이 건립되었으며, 플레이그라운드운동, 산책 클럽
조직, 캠핑 운동, 체육지도자 양성, 야구․미식축구․수영보급 등과 같은 체육 사업이 펼쳐졌다. 보스턴
지회의 로버츠(R. J. Roberts)가 ‘보디빌딩’이라는 새로운 체력 증진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나
미식축구광이었던 네이스미스(James B. Naismith) 목사가 스프링필드 YMCA에서 복숭아 바구니에
공을 던지는 실험을 거쳐 농구를 창안한 일, 매사추세츠의 홀리요크YMCA(Holyoke YMCA)의 모건이
민토네트라는 게임을 창안하여 배구(volleyball)로 발전시킨 일, 코네티컷(Conneticut) 주 그린위치YMCA(Greenwich YMCA)의 소벡(Joe Sobek)이 라켓볼을 창안 한 일, YMCA 행정 간사였던 호이싱턴(Homer Hoisington)이 ‘다이아몬드 볼(diamond ball)', ‘플레이그라운드 볼(playground ball)', 키텐볼
(kittenball: 말괄량이 야구), 쉬시볼(sissyball : 여자애들 야구) 등으로 불리던 놀이를 ‘소프트볼
(softball)'로 명칭을 통일하고 재 조직화 시킨 일 등은 모두가 미국 YMCA의 스포츠 사회 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미국 YMCA를 통해 창안되거나 활성화된 스포츠는 YMCA 조직망을 통해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 농구, 배구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까닭도 이러한 역사와 직결되며, 스포츠 역사에 YMCA라는 단체가 많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강건한 기독교주의(Muscular Christianity)라는 접착제 때문이었다.
미국 복음주의 운동가들이 YMCA 체계 속에 스포츠를 수용하게 된 것은 영국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계몽사조의 영향이었다. 찰스 킹즐리가 주창한 강건한 기독교주의란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의 추구를
뜻하는 것으로 핵심 사상은 단체정신(team spirit)과 남성다움(manliness)의 함양이었다. 미국은 신교
국가였고, 일요일의 스포츠 금지를 의미하는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 전통이 강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19세기 영국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소위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스포츠 교육의 촉진제 역할을 했던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전격적으로 수용
하면서 스포츠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YMCA운동의 중심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기까지는 많은 논란이 따랐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신체적 활동’보다 복음주의적 정신활동에 무게를 둔 YMCA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체활동
프로그램의 수용에 반대했다. 신교도적 신앙에 이끌려 YMCA에 몸담게 된 북미 YMCA 지도자들은
YMCA가 단순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경쟁적인 스포츠를 장려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사조를 수용하고 각종 스포츠를 도입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많은 하층계급 청소년들은 안식일에 놀이를 금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안식일 엄수주의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YMCA가 놀이․스포츠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확대시키자 교회와 YMCA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1900년을 전후로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된 YMCA는 미국 스포츠
운동(sports Movement)의 메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YMCA는 정신(mind), 신체(body)에
 의해 지지되는 영(spirit)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YMCA 휘장을 고안했고, 스포츠 프로그램은 YMCA
운동의 주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연히 YMCA는 미국 스포츠의 요람이 되었으며, 세계
스포츠 역사 서적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체육교과서에 등장하는 YMCA를
 보는 순간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면 스포츠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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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박미영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재즈댄스는 꾸밈이 없이 가장하지도 인위적이지도 않는 신체의 제한받지 않는 다양한 동작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획득한 춤이다. 재즈댄스는 시대의 사회성에 영향을 끼치고
생활에 만족을 주면서,
나아가 전문인이 아닌 생활인에게도 쉽게 접근하면서,
흥미로운 동작으로 생활무용으로서의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방송국에서
방송무용수들의 동작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뮤지컬에서 재즈댄스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생활무용 중에서 일반 대중에게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재즈댄스는 슬픔과 고난을 잊기 위한
흑인 특유의 춤에서 출발하여 빠른 비트와 강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갖추며 발전하였다. 즉 재즈댄스는 여러 가지 무용기교를 포함한 혼합된 자유로운 춤으로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창조된 자기표현의 한 형식이다. 또한 자신의 가장하지 않은 본능적인
독특한 율동미와 리듬감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예술적 미감을 느끼게 한다.

요즘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가수 겸 배우인 손담비와 배우 겸 무용가인 이용우의
커플댄스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들은 각각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력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재즈,
섹시 댄스를 펼치는 바, 이미 가요계의 명실상부 섹시퀸으로 화려한 댄스 실력을 발산한 손담비와
산다라박과 커플댄스로 화제를 모은바 있는 이용우는 탄탄한 실력의 무용과 교수이다.
이들 ‘엣지남녀’가 선보이는 재즈댄스는 이제 대중적인 인기를 몰아 활발한 신체활동을 선보이며
‘엣지댄스’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에서 주인공들의
실감나는 연기나 주목을 끌기 위해 추는 춤이 바로 재즈댄스이다.
극적인 장면을 더욱 극화시키고 배우의 감정 표현을 최대화하고 사건의 전환을 위해서,
재즈댄스는 이미 방송계에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즉 재즈댄스는 제한받지 않은 폭넓은 감정의 표현과 율동으로 내재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신체운동에 의한 표현 예술로서 미적인 특질을 기반
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엣지’ 있는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 것이다. 

                                   MBC 주말 드라마 <잘했군 잘했어> 김정화의 재즈댄스 열연

이와 같이 재즈댄스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일반대중에 의해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감상자와 행위자 간의 일치성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칸트(Immanuel Kant)는 『판단력비판』에서
심미적 경험을 일상의 경험들과 관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그 경험들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즉 재즈댄스는 예술가(행위자)-감상자간의 미를 향유함에 있어서도 특정한 형식이나
대상에 얽매이지 않는 만족으로 칸트의 무관심적인 이론과 일치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경험과
관계하므로 심미적인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면에서 재즈댄스는 예술가(행위자)-감상자의
실제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시각적으로 생생한 심미감으로 미적 ‘쾌(快 pleasure)’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재즈댄스를 통해 얻어지는 개인마다의 독특한 신체의식과
흥분, 도전, 즐거움, 활동적, 예술적, 자기표현은 미에 대한 자유로운 경험을 갖게 하고
이러한 재즈댄스는 보여 지는 춤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향유하며 즐기는 춤으로서
예술가(행위자)-감상자 간의 동시성이 있다. 즉 재즈댄스는 과거에 특정인이 미를 향유하고
경험하는 것과는 달리 대중성을 갖고 일반인이 쉽게 향유하고 경험한다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재즈댄스 안무가이며 이론가인 마셀(Marshall)은
“재즈댄스는 인간의 믿음으로 표현된 인간감정의 흐름이다. 재즈댄스는 인위적이지 않은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과 다양한 문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예술의 극치를 보인다.”고 하였다.
예술이 미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대상의 고유성이 생생하게 파악될 때, 제한 받지 않고
자유롭게 유희하는 것은 예술의 고유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예술이론의 중심에는 늘 예술의 고유성이 존재한다. 예술이 새로운 개성의 예술을 추구하면서
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춤을 추는 시대에 이르자, 무용도 새로운 개성으로서 재즈댄스가 도입되면서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하였다. 재즈댄스의 관능적이고 즉흥적이고 창조적인 신체의 움직임이
감상자를 의식하거나 혹은 자신의 재발견을 통해 미적 체험을 하고,
개별적이고 고유한 스타일을 창출하면서 예술의 고유성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재즈댄스의 유쾌한 안무로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벤트 전문 재즈댄스 무용단 <에코>의 단원: 이병훈과 이수현


즉, 재즈댄스의 예술적 고유성은 일상에서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춤으로서 시각적으로 생생함이다.
결국 재즈댄스가 추구하는 것은 특별하진 않지만 일상적이고, 단순한 것 같지만
특별한 예술의 고유성을 경험하는 심미적 기초 위에서의 예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재즈댄스를 보면서 혹은 춤을 추면서 “이 동작은”,“저 테크닉은”하고 관심 있는
대상에 대해 우리가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는 능력은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심미적 경험에 수반되는 쾌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즉 일상의 삶과 마주하는 자연스러운
춤동작이나 테크닉을 통해서 그것이 “멋있다”, “재미있다”라고 하는 인식능력이 자유로운 유희상태에
놓일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춤을 추면서 혹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반드시 미를 경험하거나 쾌를 느껴야 한다는 필연적 이유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한 면에서 재즈댄스는 여타 장르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유희상태에서 심미적 경험과
미적 체험을 하는, 그야말로 ‘엣지’ 있는 예술이다.


참고문헌
전미례(2003). 우리나라 재즈댄스의 현황과 문제점에 따른 정책적 제언. 무용학회논문집. 36.
한수아(2000). 미국재즈댄스의 역사적 흐름을 통해 본 예술성과 대중성에 관한 연구.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대학원.
황경숙, 백순기(2003). 재즈댄스의 가치와 대중화 방안. 움직임의 철학: 한국체육철학회지.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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