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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4 6 PACK과 S-LINE만? 재미, 성찰, 주체성도!
  2. 2010/03/05 엘리트스포츠는 생활체육의 적인가? (2)

 

 

 

조남기(숙명여자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
 

포크송 세대에 가까운 세대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지상파 방송에서 송출하는 최근의 음악방송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혹여 부딪힐 지도 모르는 ‘한 곡조’의 기회를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그리고 이제 청소년의 시기로 다가서는 4학년이 된 딸아이와 함께 가끔 방송의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는 기회가 잦게 됩니다. 예전에 음악을 접할 때는 가수의 외모보다는 리듬과 가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지금 송출되는 음악 방송을 접하게 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출연하는 가수들 본인들뿐만 아니라, 진행자, 그리고 방청객에 이르는 다수가 방송인들의 외모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이 보여 주는 남성적 복근이나 여성적 S 라인과 같은 몸매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스포츠와 체육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다수 대중의 신체에 대한 관심이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과 우려의 눈길이 생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지금 관심이 1년을 푸르게 보내는 소나무 같은 것이 아니라 4월 한 달, 아니 4월 어느 한 주에 잠시 피었다가 떨어지는 벚꽃 같은 일시적 유행이 될까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보여 지는 이미지 향상을 위한 행동은 내가 보는 것을 향한 행동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신체활동을 하는 ‘나’는 잘 빠진 로봇이 아니라 머리(이성)와 가슴(정서)과 몸(신체)과 영혼을 소유한 완전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전인적 인격체인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행할 때 인간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말하는 ‘헬스’라는 단어를 ‘피트니스’라는 올바른 용어로 수정합시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피트니스, 스포츠, 체육에 대한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스포츠는
문화적 현상으로, 체육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피트니스는 스포츠와 체육에 포함되는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피트니스는 때로는 건강을 위해 그리고 때로는 체력을 위해 행하는 기능으로서의 부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스포츠와 체육은 다릅니다. ‘내’가 스포츠와 체육에 참여할 때에는 이성적, 정서적, 신체적, 그리고 때로 그 누구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해 볼까요.
완전한 인격적 만남이 없는 신체활동은 훈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지요.

최근의 다양한 연구가 신체활동의 신체적 긍정성뿐만 아니라 신체활동과 인지 능력 향상과의 비례적 관련성에 대한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체활동이 뉴런이라 불리는 뇌세포의 증식과 이들 뉴런간의 연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스포츠 활동을 통해 육성되는 리더십, 팀워크, 도전정신, 자기주도성, 페어플레이 정신 등과 같은 사회적 인성에 더해 참여자의 개인적인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결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외국 대학들의 입학 기준에 지원자의 스포츠 활동이 중요한 당락 기준의 하나로서 포함된다는 사실은 매우 타당하고 적절하게 보입니다.


이제 여러분 개인 차원으로 돌아가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이어트 참여 후의 관심 중 하나는 요요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에의 지속적 참여’, ‘효과적인 음식 섭취 방법’에 대한 설명이 넘쳐 납니다. 이제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다가가 봅시다. 스포츠와 같은 신체활동을 접하는데 있어 ‘나’의 정서적 반응이 수반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 봅시다.
성취감, 즐거움, 흥미, 대인관계의 정서적 긍정성이 여러분이 참여하고 있는 신체활동의 지속성이나
효과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을 빼야지!”라는 사람들의 의식은 보여 지는 것에 대한 ‘나’의 수동적 성향을 지향하게 할 뿐입니다. 이는 신체활동 또는 스포츠의 즐거움과 그를 통한 성취감의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체적 인간으로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사회의 관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민주적이고 주체적 열정을 소유한 시민의 육성이라는 목표는 겉으로만 보여 지는 6 Pack이나 S-line만을 보유한 사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또는 스포츠 기능이 월등한 사람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시민상은 긍정적 신체활동 또는 스포츠 참여에 있어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 반응에 충실한 그리고 그에 대한 성찰을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좋아하는 그리고 재미있는 운동을 통해 주체적인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그리고 여러분의 주변인을 장려 합시다. 운동문화의 환경에 녹아 있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체득될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개인적으로 획득되는 부수적 효과는 체중감소와 건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는 주체적 리더의 모습을 표출할 것입니다. 조기 축구를 할 때에도, 강변 걷기를 할 때에도, 동네 한 바퀴 자전거를 탈 때에도 “왜 하는지?” “무엇이 재미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느끼고 실천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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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정효 (신도봉중학교 교사) 

김연아의 환상적인 ‘점프’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마지막 동작이 멈춘 후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도발적인 표정은 마치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를
되묻는 듯 하지 않는가. 혹자는 시상식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더불어 게양되는 대한민국의
위상에 가슴 뿌듯해 하기도 한다. 어느새 김연아는 꿈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전령사는 그녀뿐이 아니다. 박지성과 장미란,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던 베이징올림픽의 야구선수들도 모두 그녀에 버금가는 희망의 전령사들이었다.
이들을 흔히 우리는 ‘엘리트스포츠 선수’라 부른다. 그리고 미디어는 시청자들을 흥분시킨
그들의 공적을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들이 국민에게 안겨준 꿈과 희망의 질량을
계산하면 이러한 찬사는 수사학적 미사여구나 언론의 자극적 선동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길러낸 우리 사회의 스포츠인프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얼버무린다. 말하기는 한다. WBC의 준우승 이후 돔구장의 부재가 마치 우승을 놓친 결정적인
이유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는 했다. 왜 김연아의 우승에는 열광하면서 제2의 김연아를
만들어 낼 물적 토대와 정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차라리 후진적 환경을 적당히
방치함으로써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승리의 시나리오를 즐기는데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혹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의 스포츠정책이 너무 엘리트스포츠에
편중되어 있다고. 이제 체육정책의 방향은 엘리트스포츠라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즐기는 생활체육, 혹은 사회체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따끔한 질책과 비판에는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엘리트스포츠가 생활
체육과는 전혀 다른 원리적 토대를 가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경우 엘리트스포츠는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스포츠문화로서 그 한계를 가진다.

박태환의 금메달이 잠시 국민을 흥분시키는 국가적 오락이거나 실체 없는 민족주의의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김연아와 박태환, 박지성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니다. 가령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가 당시 체제 이데올로기의 선전에 커다란
몫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메달은 한국의 레슬링 문화의 중요한 성과이며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요컨대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유효기간을 갖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이나 그 문화적 내용은 역사적이고 또한 현재적이다.

스포츠는 문화의 형태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문화 외적인 것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만큼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에서 비롯할 뿐이다. 자연인이 아닌 스포츠 선수로서의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의 신체능력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운동문화를 매개로
극한까지 펼쳐지며 이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은 보다 진일보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사인
볼트의 개인적인 신체능력에 의해 100m의 기록이 갱신되듯이.

엘리트스포츠가 생활체육과 준별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엘리트스포츠가 이미 존재하는
운동문화, 즉 개별 스포츠 종목에 참여하는 개인의 뛰어난 신체능력을 통해 보다 발전된
운동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라면, 생활체육은 한 개인의 신체능력이 특정 스포츠 종목을
행함으로써 보다 발전된 신체능력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마라톤이 생활체육에서는 심폐지구력과 체중감량 등의 개인적
신체능력의 향상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엘리트스포츠로 전환하면 마라톤 자체의 질적 변화
즉 새로운 기록 작성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체육은 각기 문화적
위상을 달리 한다. 엘리트스포츠가 해당 스포츠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생활체육은
그 양적 변화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런 까닭에 생활체육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엘리트
스포츠의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트스포츠에서 필수적인 고도의 신체능력은
전문성과 체계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동호회의 양적 팽창과 ‘이용대’라는 걸출한
엘리트 선수의 배출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생활체육의 저 발전을 엘리트스포츠의 비대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끌어 올리는 정책과 인식의 전환이다. 엘리트스포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생활체육의 질을
견인한다. 아니 견인하여야 한다. 은퇴 후의 김연아와 박태환이, 혹은 그들을 롤 모델로 삼았던
엘리트 선수 출신들이 어린이와 직장인을 대상으로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을 가르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엘리트스포츠는 생활체육의 적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피드백의 고리를
어떻게만들 것인가가 향후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엘리트스포츠에 더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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