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6/29 축구공에 담긴 세상 이야기
  2. 2010/03/05 엘리트스포츠는 생활체육의 적인가? (2)

                                                                                 글 / 이병진 (국민생활체육회 정보미디어부장)


남아공월드컵으로 지구촌이 떠들썩하다. 세상이 온통 축구공으로 보일 정도다. 눈을 뜨면 뉴스에서
축구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술좌석에서도 축구가 주 메뉴다.
도대체 축구가 뭐길래, 축구공이란 놈은 어떤 존재길래 우리를 이토록 흥분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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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종교보다도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하다

축구공은 마법을 지니고 있다. 함께 뛰어 놀 땐 즐거운 놀이인데, 함께 응원할 땐 종교가 된다. 선수가
드리블하거나 트래핑 할 때면 주위의 모든 시선은 온통 공 하나에 쏠린다. 마치 블랙홀처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빨아들인다. 어떤 이는 독수리의 눈으로 공을 노려보고, 더러는 몽환의 세계에 빠져
감각을 잃는다. 질식이라도 한 듯이 호흡이 멈추고, 손과 발이 마취된다.

주사바늘로 약을 투여하지 않고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일순간에 정지시킬 수 있다니. 정말이지
축구는 ‘발의 미학’이니 ‘그라운드의 예술’이라느니 이딴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묘약을
갖고 있다. 어느 종교가 이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갖게 하며, 또 어느 이데올로기가 이토록 강한 힘을
갖고 있으랴.

잠시 공 흐름이 바뀌고 한숨 돌린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빨려 든다. 골이 들어갔다. 우리는 기뻤다.
박수로는 그 기쁨, 그 열광을 쏟아낼 수가 없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고 감격했다.

한 골 먹었다. 순간 세상이 너무 슬퍼졌다. 그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은 너나 우리가 모두 비슷하다.
한없는 절망감에 빠졌다가, 이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야수처럼 난폭해진다. 다시 평정심을 찾으면
저마다 판사가 되어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형량을 부가한다. 그렇게 쉼 없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축구는 우리네 인생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 우리는 숙명처럼 공을 찬다

축구공은 절대군주다. 녹색 잔디 위에 공 하나만 던져 놓으면 모두가 그 공을 따라 움직인다. 말이
필요 없다. 독재자는 총칼로 사람을 움직이지만, 축구공은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카리스마, 아니
권능을 갖고 있다. 축구경기장에서는 공이 굴러가는 대로 무조건 움직여야 한다. 언어와 인종, 종교
따윈 필요가 없다.

모두가 동일한 조건이다. 마치 잘 만들어진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선수들은 호흡을
맞춘다. 유명배우의 연기나 발레리나의 안무,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축구는 각본 없이 감동을
만들어 낸다. 넘어지고 무릎 깨어지고 가슴 터질 듯 뛰고,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숙명처럼 공을 찬다.

월드컵축구대회와는 달리, 생활체육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는 축구는 자못 진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소 느슨하다. 동네 아이들이나 어르신들, 여성축구도 그러하고,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의 표정에는
익살이 묻어나고, 작은 실수마저 기쁨이 된다. 아이들에게 있어 축구공은 날개 없는 천사다. 공을 차며
아이들은 쑥쑥 자란다. 여성들은 축구를 하면서 저마다 하나쯤 갖고 있을 상처를 달랜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 땅의 아버지들은 축구장이 아니면 어디서 큰 소리 한번 쳐 보려나. 어르신들은
축구공 하나가 곧 희망의 끈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세월, 되찾고 싶은 젊음을 고스란히 축구장에서
쏟아낸다.


축구든 인생이든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축구공은 인생살이다. 우리는 둥글둥글한 세상을 꿈꾼다.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주눅 들지 않는 탄력
있고 옹골찬 삶을 꿈꾼다. 축구공은 둥근 세상, 야무진 삶을 가르쳐 주는 인생의 좌표다. 공을 몰고 쏜살
처럼 달려갈 땐 발끝에 달린 공이 희망이 되고 믿음이 된다. 이기고 있다고 해서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패색이 짙다고 해도 섣불리 좌절할 필요도 없다. 언제든 인터셉트를 해서 바람처럼 달려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골 먹으면 우리도 한 골 넣으면 되고, 패스를 잘못해 공을 빼앗기면 후방 수비수가 도와준다. 슈팅이
빗나갔다고 하더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 온다. 왼쪽 공격이 막히면 오른쪽에서 공격하고, 측면이
뚫리지 않으면 중앙으로 공격하면 된다. 상대편 수비수가 밀집해 있으면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려야
한다.

최종 수비수는 절대 안전하게 볼을 다뤄야 하고, 불행의 싹은 미드필드에서 아예 잘라버려야 한다.
학교공부도 마찬가지고,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변화가 심해 정형화된 방법이 없다. 숱한
응용의 연속이다.

다만 몇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페어플레이 해야 한다는 것, 합심 단결
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 상대선수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 등. 이것들은 축구든 인생이든
공통으로 적용되는 불변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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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정효 (신도봉중학교 교사) 

김연아의 환상적인 ‘점프’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마지막 동작이 멈춘 후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도발적인 표정은 마치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를
되묻는 듯 하지 않는가. 혹자는 시상식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더불어 게양되는 대한민국의
위상에 가슴 뿌듯해 하기도 한다. 어느새 김연아는 꿈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전령사는 그녀뿐이 아니다. 박지성과 장미란,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던 베이징올림픽의 야구선수들도 모두 그녀에 버금가는 희망의 전령사들이었다.
이들을 흔히 우리는 ‘엘리트스포츠 선수’라 부른다. 그리고 미디어는 시청자들을 흥분시킨
그들의 공적을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들이 국민에게 안겨준 꿈과 희망의 질량을
계산하면 이러한 찬사는 수사학적 미사여구나 언론의 자극적 선동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길러낸 우리 사회의 스포츠인프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얼버무린다. 말하기는 한다. WBC의 준우승 이후 돔구장의 부재가 마치 우승을 놓친 결정적인
이유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는 했다. 왜 김연아의 우승에는 열광하면서 제2의 김연아를
만들어 낼 물적 토대와 정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차라리 후진적 환경을 적당히
방치함으로써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승리의 시나리오를 즐기는데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혹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의 스포츠정책이 너무 엘리트스포츠에
편중되어 있다고. 이제 체육정책의 방향은 엘리트스포츠라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즐기는 생활체육, 혹은 사회체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따끔한 질책과 비판에는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엘리트스포츠가 생활
체육과는 전혀 다른 원리적 토대를 가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경우 엘리트스포츠는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스포츠문화로서 그 한계를 가진다.

박태환의 금메달이 잠시 국민을 흥분시키는 국가적 오락이거나 실체 없는 민족주의의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김연아와 박태환, 박지성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니다. 가령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가 당시 체제 이데올로기의 선전에 커다란
몫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메달은 한국의 레슬링 문화의 중요한 성과이며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요컨대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유효기간을 갖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이나 그 문화적 내용은 역사적이고 또한 현재적이다.

스포츠는 문화의 형태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문화 외적인 것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만큼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에서 비롯할 뿐이다. 자연인이 아닌 스포츠 선수로서의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의 신체능력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운동문화를 매개로
극한까지 펼쳐지며 이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은 보다 진일보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사인
볼트의 개인적인 신체능력에 의해 100m의 기록이 갱신되듯이.

엘리트스포츠가 생활체육과 준별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엘리트스포츠가 이미 존재하는
운동문화, 즉 개별 스포츠 종목에 참여하는 개인의 뛰어난 신체능력을 통해 보다 발전된
운동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라면, 생활체육은 한 개인의 신체능력이 특정 스포츠 종목을
행함으로써 보다 발전된 신체능력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마라톤이 생활체육에서는 심폐지구력과 체중감량 등의 개인적
신체능력의 향상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엘리트스포츠로 전환하면 마라톤 자체의 질적 변화
즉 새로운 기록 작성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체육은 각기 문화적
위상을 달리 한다. 엘리트스포츠가 해당 스포츠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생활체육은
그 양적 변화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런 까닭에 생활체육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엘리트
스포츠의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트스포츠에서 필수적인 고도의 신체능력은
전문성과 체계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동호회의 양적 팽창과 ‘이용대’라는 걸출한
엘리트 선수의 배출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생활체육의 저 발전을 엘리트스포츠의 비대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끌어 올리는 정책과 인식의 전환이다. 엘리트스포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생활체육의 질을
견인한다. 아니 견인하여야 한다. 은퇴 후의 김연아와 박태환이, 혹은 그들을 롤 모델로 삼았던
엘리트 선수 출신들이 어린이와 직장인을 대상으로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을 가르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엘리트스포츠는 생활체육의 적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피드백의 고리를
어떻게만들 것인가가 향후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엘리트스포츠에 더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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