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박현애(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유명한 이솝우화 중 하나로 토끼와 거북이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빠른 동물의 대명사인 토끼와 느림의 대명사인 거북이가 달리기 경기를 하게 되고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있던 토끼가 경기 도중 잠이 들고 꾸준히 경기에 임한 거북이가 승리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토끼와 거북이 이솝우화는 자신을 과신한 사람과 꾸준히 일에 응한 사람의 결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달리기 경주를 통해서 알게 해주는 또 다른 다양한 이야기를 낳게 한다.

스포츠 상황에서 본다면,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경기할 일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스포츠에서의 경쟁은 우선, 공식적인 경기의 경우, 기량이 비슷하거나 혹은 비공식 경기에서는 신체적 발달상태가 유사한 경우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과 프로선수가 농구 경기를 하는 일도 없고, 진지한 스포츠 상황에 놓여지는 일은 만무하다. 또한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로 거북이는 토끼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깨우고 같이 경쟁해야 한다는 스포츠 윤리적 측면도 있으나 이러한 두 가지 전제를 차치하고 스포츠 상황에서의 토끼 같은 선수와 거북이 같은 선수에 대하여 스포츠가 주는 사회 본질 중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해 보고자 한다.


김동규
(2001)는 스포츠의 본질을 사회문화적 측면, 유물론적, 미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였다. 사회문화적 측면은 스포츠의 놀이의 본질에서 시작되어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제도화 되어 간다는 접근을 의미하며, 스포츠는 사회화를 통하여 문화로 발전을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물론적 측면은 노동을 위한 연습의 필요에 따라 스포츠가 생성되었다는 시각이다. 마지막으로 미학적 접근은 스포츠를 행하고 난 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을 중시한다. 미적체험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기도 하며 이는 주관적 체험으로서 체험의 유무와 정도가 개인에 따라 다르므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스포츠에 대한 가치를 논해야 함을 뜻한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접근은 사회문화적, 유물론적 접근으로 거북이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경쟁과 투쟁의 요소이다.

많은 학자들에게 스포츠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경쟁과 투쟁의 모습으로 정의되어 왔다. 따라서 스포츠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 신체활동을 통하여 내포된 경쟁에 우선적 가치를 둔다. 스포츠에서의 투쟁과 경쟁은 스포츠에 수많은 감동적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이는 다른 선수들에 귀감이 되거나 혹은 이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마음에 동요를 가져온다. 이는 스포츠 활동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스포츠가 제도화 되어 문화로 발전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 활동에 수반되는 은근과 끈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거북이와 같은 느릿해도 꾸준한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기량이 뛰어나지만 더 이상의 노력을 게을리 하는 토끼로 부터 자만감이 주는 위험성을 알게 된다
.

두 번째 접근으로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미학적 측면에서 다른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경기의
중요도를 떠나서 선수 개인의 경험에 집중하며
,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개개인 마다 다를 것 이고 이에 자유로운 접근을 통해 스포츠가 가지는 올바른 가치에 대한 의미가 재조명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로버트 짐러(1991)는 파라독스 이솝우화라는 책을 통해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다음은 로버트 짐러의 파라독스 이솝우화 중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내용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에게 다른 동물들이 이야기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토끼가 너 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
너만 빼놓고 다 아는 사실이야
”-한번 다른 상대를 이겼다고 도취되지 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고 할 수 있다
.-

단 한번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로 승자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거북이가 이길 수 있지만 그 외에 벌어질 수많은 경기에서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없다. 스포츠에서의 기록은 이솝우화와 같이 일회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북이가 한번 얻은 영예로 전설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거북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슈가 되는 중요한 대회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끈기를 보여주며 우승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러나 토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중요한 대회에서 성과가 좋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평가된 실력이 있으면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 경쟁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이에 도전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모든 선수들은 올림픽의 금메달을 따기 위해 운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요 대회가 갖는 의미는 인간의 숭고한 도전 외에도 지대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선수들이 무엇을 위해 운동하며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감내하는지에 대한 개인의 경험적 측면에서 심오한 고찰의 수반이 요구된다.

, 그렇다면 토끼와 거북이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일까. 끈기의 모습을 보인 거북이와 절대적 실력을 갖춘 토끼 중 진정한 승자를 정하는 데에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선수가 토끼와 같은 절대적 능력을 갖춘 강자가 되기 위해 거북이처럼 인내하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경기의 실적만을 매스컴을 통해 인지하면서 우리가 간과해 온 훌륭하지만 불운한 선수가 있지는 않은지, 스포츠의 문화적 측면이 주요 경기나 주요 실적에 편향되어 스포츠의 경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재고해 봐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경쟁과 그 안의 숨겨진 다채로운 의미를 이야기할 때, 거북이형 노력과 토끼형 재능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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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김정효
(서울대학교 강사)

 

야구만큼 재미있는 스포츠가 따로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발끈할지 모른다. 그래도 한국의 프로야구는 재미있다. 오죽 했으면 야구 경기를 한 편의 드라마나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겠는가. 야구 경기에는 확실히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복기의 묘미가 있다.
 
무사만루의 찬스에서 득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9회말 투아웃에서 승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것이 야구의 재미를 증폭시키는 주요한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승부의 향방과 감동은 야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스포츠는 재미와 감동의 DNA를 갖는다. 그런데 왜 유독 프로야구에만 구름관중이 몰리는 것일까.


2011년 프로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600백만을 넘어서더니 어느새 1,000만의 목표치를 내걸고 있다. 머지않아 허세가 아님을 입증할 날이 올 것 같다. 이런 호시절에 프로야구의 인기 비결을 묻는 일은 새삼스러울지 모른다. 혹자는 WBC의 준우승과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을 거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IT의 수준만큼 프로야구의 플레이 자체가 향상되었고, 이것이 재미를 배가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미디어의 분석은 상투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지적은 아니라는 의미다. 왜냐하면 같은 잣대를 축구에 적용하면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와 현재 프로축구 경기장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우생순의 여자 핸드볼은 또 어떤가. 프로야구의 재미와 감동을 말하기 위해서는 여타의 스포츠 종목과 다른 프로야구만의 특별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다름의 구조를 설명하지 못할 경우 스포츠의 일반적 특징을 동어반복으로 열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야구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재미와 감동의 원인이 드러난다. 기호학이란 사회현상을 기호로 간주하고 그 의미작용을 밝히는 학문이다. 가령 강남은 한강 이남을 뜻하는 행정단위이지만 그 단어의 의미는 일의적이지 않다. 어떤 이는 '부자 동네''부동산'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룸싸롱'을 연상할지 모른다. 이처럼 강남이라는 기호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기표(記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e)의 자의성 때문이다. 프로야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야구장을 찾고 TV 중계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이라는 기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전하는 기의를 해석하고 공유한다. 프로야구의 문화기호학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프로야구의 재미는 무엇보다 경기의 진행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시즌이 시작될 즈음 미디어의 프로야구에 대한 홍보는 새로운 시즌의 개막혹은 대장정의 시작으로 표현된다. 이때 개막(開幕)이라는 기표 속에는 흥행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뿐 아니라 대서사시의 막이 오른다는 두근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대서사시란 무엇인가? 군웅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모험과 대결의 파노라마가 아닌가.

프로야구의 시즌 전체가 서사시적 성격을 갖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시리즈의 우승이라는 목표를 두고 펼치는 각 팀의 대결이 전쟁의 웅장한 서사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지나 여타의 무협지와 다른 긴장을 환기시킨다. 무협지가 중원정복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일회적이고 완결된 구조로 보여주는 것임에 반해 프로야구의 이야기는 1년을 주기로 반복되어진다. 여기에 지난 시즌의 영광과 좌절, 도전의 희망과 복수에 대한 염원, 그리고 패권(覇權)의 기호들이 뒤얽히면서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장정의 기표가 프로야구만큼 어울리는 스포츠는 달리 없다.


1년 주기의 페넌트레이스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것이 일상적인 삶의 주기와 겹친다는 점에 있다.
프로야구는 개화의 봄에 시작해서 늦은 가을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이 시합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거르지 않는 게임의 진행은 이벤트성이 강한 축구와 대비되는 야구만의 특성이다. 축구는 게임의 성격 상 매일 진행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게임 결과에 대한 희비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다. 요컨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과 다음 주를 기약하는 것에는 많은 긴장과 흥분의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페넌트레이스는 경기의 결과를 일상 속 깊숙이 개입시킨다. 그것은 전날 벌어진 시합의 내용과 결과에 대한 갑론을박에서 샐러리맨들의 아침 대화가 시작되는 살가운 풍경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즌의 진행과 일상의 깊은 관계는 승수의 축적이라는 또 다른 기호를 통해 드러난다. 페넌트레이스의 중요한 전략이 여기에 숨어 있다. 1위부터 꼴찌까지의 순위와 게임차는 응원하는 팀에 대한 희망의 게이지이며, 이 수치의 등락과 더불어 팬은 일희일비하고 어느새 대장정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승리의 축적과 순위의 상승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기호가 바로 가을야구이다. ‘가을이라는 기표는 수확의 기의와 함께 서사시의 결말 부분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바람과 우승에 대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염원의 메시지가 투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야구는 게임이 갖는 판타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으로서의 판타지성은 컴퓨터 게임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한다는 것과 가상이 아닌 현실의 판타지라는 점이 2차원의 평면 공간에서 펼쳐지는 놀이로서의 게임과 다르다. 그리고 이 판타지는 전쟁이라는 기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프로야구에는 다른 스포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전쟁의 기표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가령 단타를 소총으로, 홈런을 대포로 비유하거나 투수에 따라붙는 폭격기잠수함등의 기표들은 모든 포지션을 전투의 진지로 만든다. 그래서 감독은 쉽게 야전사령관으로 분()하게 되며, 그가 펼치는 작전과 선수의 기용을 통해 게임 전체를 전장(戰場)으로 탈바꿈시킨다. 전쟁의 판타지는 팬들로 하여금 더불어 싸운다는 일체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관중의 동원이라는 기표 속에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응원하는 민초의 함성이 교묘히 깔려 있게 되는 것이다. 응원의 함성은 승전보를 바라는 민초들의 고함에 다름 아니며, 프로야구는 이런 숨어 있는 전쟁의 알레고리를 통해 관중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은다.

프로야구는 가상이 아닌 3차원의 공간에서 남성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상력을 구현한다. 허구적이지 않은 판타지의 미학. 이것이 프로야구가 갖는 게임의 이중성이며 이 역설적인 미학 때문에 팬은 매 경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판타지에 대한 열광은 현실의 팍팍함과 일상의 고단함이 더할수록 날로 증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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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서울대학교 강사)


우리 옛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즉, ‘외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데 속마음 또한 슬기롭고 똑똑하다!’라는 한자성어 ‘수외혜중(秀外惠中)’의 의역에서 나온 속담이다.

‘보기 좋은 떡’이 왜 ‘맛도 있는 것’일까? 음식의 경우, 맛과 영양은 음식의 제1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에 음식의 부차적인 조건인 시각적 효과까지 좋다면 그 음식은 군침이 생기고 식욕을 자극하여 더 맛있게 느껴져서 그럴 것이다!

이렇듯 음식에서 외적 형식은 음식의 본질인 맛과 영양에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다시 말해 보기 좋은 외적 형식으로서의 시각적 효과가 대상의 본질적 내용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다.

예술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이중주라고 한다. 즉 내용을 담는 그릇이 형식이요, 그 그릇으로서 형식에 의미가 담겨지는 게 내용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의미 있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물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디자인분야에서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형식주의 모토가 있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작품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바로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디자인의 결과로서 조형작품은 기능을 최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곧 기능주의와 연결되어, 장식이 없는 순수한 미적 형식만을 고집하는 병폐를 낳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던 ‘예술은 예술 이외의 일체의 것과 무관하다!’는 관점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운동으로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명하여 예술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순수주의를 주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술의 기능주의도 그리고 순수주의도 너무 한쪽의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스포츠에 대해서도 형식과 관련된 이러한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스포츠를 관전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각적 형식에 집중한다. 즉 경기장을 찾은 관중이나 텔레비전의 중계를 지켜보는 관람자 모두 눈앞에 펼쳐지는 스포츠맨의 몸놀림에 눈을 빼앗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스윙에서, 그리고 피겨여왕 김연아의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우리는 형식적으로 완벽한 폼(form)에 매료당해 감탄하며 찬사를 보낸다.



                        타이거 우즈의 정확한 티샷은 그의 멋진 폼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경기수행을 위한 스포츠맨의 멋진 폼은 폼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즈의 멋진 티샷은 그것 자체로 훌륭한 형식으로서의 폼을 보여주지만, 그 폼은 공을 멀리 그리고 정확한 위치에 안착시키려는 기술의 시각적 제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연아의 점프 또한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기본점수 9.5)’의 첫 점프를 ‘트리플 러츠(기본점수 10.0)’로 바꿔 기본점수를 높이고, 트리플 플립을 이후 단독 점프로 구사하기 위한 기술의 형식적 폼이기 때문이다.

 

                              김연아의 완벽에 가까운 점프기술은 아름다운 폼과 감정 어린 
                              표현을 가능케 한다.

 

결국 스포츠에 있어서도 폼과 기술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앙상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폼 없는 기술은 공허하고, 기술 없는 폼은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에 있어서 아름다운 폼은 더 높이,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한 기술의 미적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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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승건 (서울대학교 강사)


인간의 육체, 즉 인체(human body)에 관한 인류의 관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πάντων χρημάτων μέτρον ἐστὶν ἄνθρωπος)’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그들 삶 속 여기저기 즉 학문, 종교, 예술 등 문화전반에 스며들게 했다. 이와 같은 인간 척도론은 조형예술분야와 신체문화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추구되어, 전자의 경우 이상적 인체의 표현으로 그리고 후자의 경우 올림픽이라는 인체의 제전으로 나타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체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미네르바 여신의 은총으로 사계절의 온화한 기후를 얻어 일상생활에서도 인체를 드러내는 일이 잦았고, 그럼으로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gymnos)’을 자연스럽게 목격하게 되어, 인간의 벗은 몸에서 이상적인 인체를 발견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아름다운 인체를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몸의 여기저기를 압박하여 아름다운 형체를 방해하는 옷을 피했다는 점과 각종 운동 경기의 심판관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보고 자라난, 그리고 그 인체를 아름답게 소묘했던 젊은이들의 눈에 거스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선출했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른 체자리아노의 ‘정방형의 인간’, 1521년



고대 그리스의 인체에 대한 탐미는 1세기경 카이사르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에 의해서 구현되었다. 그는 원과 사각형에 의한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으로써 ‘이상적 인체’(the ideal human body)를 도해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잘 다듬어진 인간은 두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벌려 정사각형을 만들고, 그 사각형의 꼭짓점을 서로 교차시키면 배꼽에서 만나며, 그 배꼽을 중심으로 사각형의 한 꼭짓점을 반지름으로 하여 원을 돌리면, 사각형에 외접하는 원이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원과 사각형의 인체(aner tetragonos)’는 ‘호모 콰드라투스(homo quadratus)’, 즉 ‘정방형의 인간’이라고 불리며 이상적 인체 표현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트루비우스의 것에 수정, 보완을 가하면서 그의 장방형의 인간은 비트루비우스의 것보다 더 유명해져 인체미를 논하는 자리라면 항상 언급되는 인체미의 전거로 인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체육활동을 통해 인체를 단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올림피아 제전은 경기가 열리는 바로 그 지역인 엘리스에서만 10개월 가량 연습기간을 가질 정도로 그리스에서 펼쳐지는 각종 운동경기는 모든 그리스 청소년에게는 인체를 단련시키는 강력한 자극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체를 단련시킨 그리스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축제에 아름다운 인체로써 참가하며 기량을 뽐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올림픽을 관전했던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들에 의해 고스란히 작품으로 남겨져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고대 5종 경기 중 하나인 창던지기 선수를 이상적인 비례로 표현한 조각품



                                                창을 든 사나이의 8등신 비례 체계


올림픽 경기, 특히 고대 5종 경기(달리기, 넓이뛰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창던지기, 활쏘기)와 관련이 있는 조각상 중에는 기원전 450년경에 폴리클레이토스에 의해 제작된 <창을 든 사나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조각의 미학자 빈켈만의 지적대로 ‘미의 최고의 법칙’으로 손상이 없다. 그가 직접 저술한 『카논』(비례규범)에 따르면, 완벽한 인체조각상은 전체 신체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 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가 비례적으로 조화로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정지해 있지 않는 움직이는 신체의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임에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게다가 머리를 기준으로 하여 전체 신체가 8등분으로 나뉘는, 소위 8등신으로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배꼽을 중심으로 하반신과 상반신은 황금비율(0.618 : 0.382)로 나뉠 뿐만 아니라, 힘을 주고 있는 한쪽 다리와 힘을 빼고 있는 다른 쪽 다리의 힘의 균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머리는 그 움직임을 자유스럽게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살짝 기울여져 있고, 다리 또한 엉덩이와 함께 축을 이루며 힘을 분산하고 있기에 옆에서 볼 때 신체의 실루엣은 S자 곡선을 그리는 등 매우 유연한 자세 이른 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렇듯 창을 던지는 운동선수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고전기의 대표적인 이 조각상은 벌거벗은 아름다운 인체, 즉 움직이는 신체를 묘사한 누드의 전형으로서 완벽한 수적 질서와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 조각상은 이후 시대의 미술가들이 인체를 묘사함에 있어서 두고두고 참고하는 모범으로서 ‘누드의 카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운동선수의 신체단련을 통한 건강한 인간의 신체성의 전형 또한 이 조각상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이상적 인체의 카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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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안용규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건강복지학부 교수)

아레테(aretē)와 테크네(technē)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논의되어온 철학의 주요 관심사였다. 일반
적으로 아레테(aretē)는 덕, 탁월성으로 번역을 하고, 테크네(technē)는 기술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 아레테와 테크네는 일반적으로 번역되는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아레테와 테크네의 개념은 호메로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탁월성, 덕, 기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레테와 테크네는
각각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협력적인 관계에 있는 개념이다.



                                              콘텐츠출처 : 오픈애즈(http://www.openas.com)
                                             사전 허가 없이 콘텐츠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으로 신체의 아레테를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의
5가지로 명시하였다. 이 5가지의 신체의 아레테는 자연적인 신체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아레테를
의미하며, 또한 이 신체의 아레테는 테크네의 도움 없이는 현실화되기 어렵다.

 
현대 스포츠에서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를 가장 잘 발현시키는 선수는 대한민국의 김연아와 박태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김연아는 점프와 턴 기술을 보완하여 아사다 마오보다 더욱 완벽한 기술을 구사
하게 되어 오늘날 세계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박태환은 타고난 폐활량을 바탕으로 최첨단
수중촬영기술로 스타트의 문제점과 스트록을 완벽히 보완하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영광을
가져왔다.

 
또한 현대 스포츠는 최첨단 과학의 도움 없이는 기록단축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스
토텔레스가 언급한 신체의 아레테, 즉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에 최첨단
테크네의 접목이 오늘날 스포츠에서의 경기력향상이나 기록단축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키점프에서의 유니폼, 사이클에서의 헬멧, 수영에서의 전신수영복, 육상에서의 운동화는 점점 진화
및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스포츠가 기록을 단축시켜 전 세계인을 열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신체의 아레테와 테크네는 오늘날 스포츠에서 전 세계인이
열광하게 하는 근본 진리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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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량희 (전남대학교 강사)

 

Ⅰ. 노인문제
의료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에 의한 핵가족화로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오늘날 전통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노인문제들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노인들의 ①경제(經濟), ②건강(健康), ③무위(無爲)·
무료(無聊), ④사회적(社會的) 소외(疎外) 문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단체에서
노인 문제를 풀어가려 노력하지만 그 해결은 근본적으로 아직 미흡한 상태다. 노인에 대한 규정은
생물학적, 기능적 그리고 사회학적 관점에 따라 규정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노년기연령
(老年期年齡)에 관한 제도적 규정은 한 나라의 정년연령 및 연금개시연령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삶이 그렇듯 노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성공적 노화(老化)는
나이가 들더라도 신체적 정신적 장애와 위험이 적으며 자신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상태에 대해 만족하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요가(YOGA) 수행의 현대적 의미
인도의 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발췌된 ‘지고자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바가바드기타 2장
48절에는 ‘언제나 요가(하나됨) 안에서 살고 그리하여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는 평등한 마음으로써 행동하라’고 기술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마음을 일러
 요가라 하며 흩어진 정신을 통일한 자로서의 슬기로운 요가 수행자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지혜에 의해 안정되고 신 또는 아트만과 하나 될 때 요가를 성취하였다’고 설명한다.
즉 요가는 기쁨과 슬픔, 이익과 손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 초연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인생은 이중성의 속성으로 된 세상에서 영향 받아 고통을
느끼지만 요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요가의 구성
요가는 정신, 신체 정화법들과 금계(禁戒)와 권계(勸戒) 자세(아사나) 그리고 호흡조절
(프라나야마), 제감(프라티아하라), 집중(다라나), 명상(디아나), 삼매(사마디)의 요소로 되어있다.

1) 윤리적 규정
금계와 권계는 자신과 자신 이외의 관계를 규정한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인간적 규정이다.

2) 신체적 규정
아사나(자세)와 호흡조절은 육체에 관한 규정이다. 신체의 개선에 있어 호흡조절은 필수 요소다.
아사나를 수행함으로써 평형감각을 기르고 강하면서도 유연한 육체를 만든다. 또한 내분비선의
기능을 조정하고 근육과 신경계통이 조화를 이루게 하여 혈액 순환과 소화 기능을 개선한다.
결과적으로는 건강한 육체를 통해 마음이 평온해지는 목적을 지닌 신체에 대한 규정이다. 아사나는
움직임이 없는 명상 상태에서도 신체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그 효과는 매우 강하다.

3) 심리적․영적 규정
프라나야마(호흡조절)와 프라티아하라(제감)를 통해 육체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조절하여
정신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감각기관의 제어인 제감의 단계를 통해
집중에 이를 수 있으며 집중을 지속시킴으로써 선정의 상태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삼매 즉
초월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 요가의 마지막 목표로써 심리적 영적 규정을 내포한다.

4) 사회 문화적 규정
인도인들은 마누법전 이래 고대로부터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artha), 까마(kama), 달마(dharma),
목샤(moksa)에서 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먼저, 아르타(artha)란
물건이나 대상 또는 질료를 뜻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부와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라는 뜻이며
이 가치로서 세속적인 삶에 필요한 부(富)와 명예 또는 권력을 성취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맺어
제반(諸般)의 현상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둘째, 까마(kama)란 좁은 의미로는 성적 욕망, 쾌락을
뜻하지만, 넓게는 음악, 연극, 미술 등 예술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을 의미하여 정신적,
육체적인 즐거움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며 삶을 보람 있게 살도록 한다. 셋째, 달마(dharma)는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하는 일종의 법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 목샤(moksa)는 해탈이며 더 이상 세간의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다. 그것은 쾌락 중의 쾌락이고, 행복 중의 행복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중의 최고의 가치다. 처음 세 가지가 세속적인 의무를 완성하는 가치라면
목샤는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한 영적이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이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해 마누법전에는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그 4개의 단계가 학생기(學生期),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捿期), 그리고 유행기(遊行期)다.

첫째, 학생기(學生期)는 태어나 대략 스물다섯 살까지로서 달마를 배우고 익히는 시기다. 이때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기 위해 육체적 감정적 에너지를 보존, 전환해야하며 그에 따라 생명력이
강해져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조절력이 건강해지고 안정된다.

둘째, 가주기(家住期)는 대략 25세부터 50세까지이며 아르타와 까마를 동시에 추구하는 시기다.
결혼과 활동적인 삶을 통해 명예나 부를 이루며 가족과 인간관계에서 즐거움들을 맛본다. 그리고
자녀 양육, 가족 보호, 직업에 대한 충실성, 스승들, 신과 조상,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온갖 의무를
충실하게 해야 하는 시기다.
 

셋째, 임서기(林捿期)는 50세 이후 대략 75세까지라 할 수 있으며 숲으로 들어가거나 집에 머물더라도
혼자 지내며 세속적인 걱정, 욕망을 버리는 연습을 한다. 또한 경전을 공부하고 수련하여 마지막
단계를 위한 준비를 한다.

마지막, 유행기(遊行期)는 온전히 수행하는 단계다. 75세 이후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오로지 영적
수련에 집중하며 달마를 실현하여 해탈에 이르는 시기다. 부부가 같이 지낼 수 있지만 가능한 한
가족과 떨어져 오직 신과의 만남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 바친다. 이렇게 가족을 떠나 영적 수련에
집중하는 생활을 산야스라 하며, 이런 사람을 산야신(Sanyasin)이라고 한다. 오랜 인생을 겪은
그들은 지혜로 가득 차있으며 젊은이들은 그들로부터 지혜를 구하기도 하여 산야신들은 교육자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즉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서 존경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교육자로서의 산야신은
학교나 단체에 있는 교육자와는 다르며 영적 스승과 같은 개념이다. 이같이 심신을 수련하여 지혜에
이르는 삶은 고스란히 요가 수행과 연결되어 있다.


Ⅲ. 요가수행을 통한 노인문제의 극복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경제적 여유, 신체 건강과 마음의 평화, 외로움과 두려움의 극복과
더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와 함께 존재의 행복일 것이다. 이는 요가를 실천하여 얻을 수 있는
신체적, 심리적 건강과 요가 명상을 통해 얻는 요소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요가의 효과는 첫째, 신체의 기능을 강화할 뿐 아니라 마음을 조절해 준다. 요가는 상대적 관계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하며 그로부터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도록 돕는
실천철학이다. 따라서 요가 수행은 자기 육체의 문제를 인식 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를 파악하게
한다. 주의사항으로는 요가 아사나를 수행하기 전에 노인의 신체적인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
타인과의 경쟁을 하거나 처음부터 자세의 완성에 집착하면 노인의 신체 특성상 오히려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를 응용하는 순서는 심장에서 먼 곳부터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아사나를 행한다.
정화법으로 알려진 요가 기법들을 행해 몸을 구석구석 정화하고 아사나를 통해 척추를 강화하며
뇌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킨다. 이 모든 행법은 반드시 규칙적인 명상과 함께 행함으로써 내부에
잠재하는 타고난 생명력을 발현하게 하고 지혜를 쌓아간다. 하타요가프라디피카 1장64절에는
젊은이, 성인, 노인이나 병들고 허약한 이들 누구나 요가 수행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완전한
성취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요가 명상으로 뇌의 노화를 멈추고 집중력을 얻어 지혜의 길을 찾는다. 뇌는 인간의 몸에서
육체적인 삶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을 하는데 직접 관여하는 기관이다. 나이가 들수록 뇌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복잡함과 갈등 요소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뇌의 노화는
더욱 가속화한다. 하지만 고요한 명상 상태에 든 사람들의 뇌파를 측정하면 대뇌피질의 흥분이
진정되고 고피질이나 간뇌의 기능이 활발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명상이 대뇌에 걸려 있는
과도한 부하를 없애고, 평온하고 유연한 의식 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셋째, 삶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내관의 힘을 길러준다. 육체적인 시각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삶의 초점을 맞춤으로서 현실에서 부족한 것들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생긴다.
따라서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 따라 그 누구도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요가는 이런 마음의 모순을 영성의 개념으로 해결하고 있다. 순수하고 참된 나의
본질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이다. 죽음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 활동의
일시적인 멈춤으로, 순수 상태의 정신은 육체가 노화하는 동안 열매를 맺고 더 높은 차원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요가는 이러한 심오한 우주 의지에 부합하고자 고안된 자기 훈련법이다.
이와 같이 요가 수행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 상태의 질을 개선하여 성공적
노화(老化)에 이를 수 있게 함을 알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행복은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서 온다고 말한다. 예수, 석가모니 와
같은 '인류의 스승'들도 '존재의 삶의 방식'을 강조했었다. 그러한 삶은 나 이외의 대상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는 요가 수행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오랜 세월을 지내며 수행력을 지닌 노인에게서
젊은이들은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설 수 있는 가치관과 행법이 현실의 사회에 필요하며 그러한 환경 안에서 노인의 문제는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해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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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송형석 (계명대학교 체육대학 교수)


알맹이가 중요할까 껍데기가 중요할까? 당연히 알맹이가 중요하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느냐고 핀잔듣기 십상인 물음이다. 껍데기는 단순히 알맹이에 부수하여 그것을 돋보이고
꾸며주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알맹이가 껍데기보다 중요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중시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금의 소비 경향을 일컬어 “상징적 소비”라고 표현한다.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때문이 아니라
상징가치나 기호가치 때문에 상품을 구매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성능 때문이 아니라 외관과
디자인 때문에 자동차, 냉장고, 청소기 같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옷의 경우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의복의 본질적 기능, 즉 사용가치는 보온과 보호, 가림 기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색상이나 디자인 또는 상표 때문에 의복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명품”의 구매 심리에 이러한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 껍데기를 중시하는 경향은 모든 사회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경제 영역을 넘어서
정치, 나아가 개인의 일상 영역에까지 파죽지세의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에 올랐던 오세훈과 강금실의 대결에서 오세훈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의 훤칠한 외모와 멋진 몸매가 유권자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심어주었고, 주저 없이 그에게
한 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비밀이다. 당시 대중매체는 이를 두고
“감성정치”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지, 상징, 외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껍데기는 일상생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신입사원 선발, 나아가 사회적 성공에 이르기까지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는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보다는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이, 즉 알맹이가
견실한 사람보다는 껍데기가 번지르르 한 사람이 선호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껍데기를 가꾸는 일은 일생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2006년 말 개봉되어 수 개월간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했던
 “미녀는 괴로워”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수이다. 가수에게 있어 알맹이는 목소리와
가창력이다. 반면에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양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일종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양자를 모두 겸비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꼭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어야만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자, 심수봉 등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은 대개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타고한 미성과
풍부한 가창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미녀는 괴로워”에서 진짜 가수는 찬밥
신세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는 립싱크가수가 인기를 독차지 한다. 진짜는 적절한 껍데기를 갖추지
못했기에 푸대접을 면치 못했고, 가짜는 껍데기가 좋아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결국 껍데기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은 주인공은 껍데기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성형과 스포츠로 자신을 완전히
재포장하여 신상품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껍데기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스포츠의 역할도 바뀌기 마련이다.
스포츠는 다양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활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몸짓의
활동으로 그치지 않고 몸짓을 통해 내면적인 그 무엇을 고양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협동심”, “인내심”, “극기의 정신” 등이 전통적으로 스포츠라는
일련이 몸짓을 통해 고양시키려고 했던 내면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스포츠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내면적인 것”에서 “외면적인 것”으로, 즉 알맹이에서 껍데기로 뚜렷하게 바뀌고 있다.
“날씬한 몸”, “근육질의 몸”, “에로틱한 몸”이 스포츠참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포장 제조기로서의 스포츠 역할은 비단 개인의 몸 가꾸기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지역 사회나
국가 같은 집단은 물론이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재를
포장하여 결국에는 인정과 승인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재현 및 상징 기제의 역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은 단순한 월드컵 4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은근히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4강의 의미로까지 확장되어 해석된다. 100m 세계기록갱신은 단순한 선수 개인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체재가 추구하는 비가시적 인류 진보를 가시화시켜 주는
사건으로 재해석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포츠는 개인과 집단, 나아가 전 인류에게 기존 자본주의
질서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는 환상적인 껍데기 역할을 담당해왔다.

탈주술화, 합리화, 세속화의 기치 아래 효율성과 효용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 역할을 해왔던
근대화과정에서 이와 같이 신비주의화, 미학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이미 그러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그 상품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큰 맘 먹고 산 상품이 기대와는 다르게 전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구매는 일종의 모험일 수밖에 없다. 기대는 해석의
 방식이다. 그것은 가시적인 상품의 외관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판매자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 가능한 한 많은 기대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할 필요가 있다. 구매자를 유혹하는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상품의 외관을
미학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미학의 논리는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껍데기의 중요성이 역설되고 있다. 한편 껍데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과대 포장이 등장하였고, 나아가 알맹이와는 상관없는 껍데기, 소위
“탈맥락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껍데기 아닌 껍데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껍데기는
더 이상 알맹이를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가사세계와 가시세계, 원본과 이미지, 진리와 허구, 진짜와 가짜의 전도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경향과 관련하여 “확실히 기호화되는 물건보다
기호 자체가, 원본보다 복사본이, 현실보다 환상이, 본질보다 외관이 더욱 선호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 오직 환상만이 신성한 것이고 진실은 세속적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진리가 감소되고
환상이 증가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신성성은 더욱 고양된다고 여겨지고 있고, 그 결과 최고도의
환상이 최고도의 신성성이 되고 있다.”고 썼다.

알맹이가 중시되었던 문화에서 스포츠철학자들은 스포츠가 인격 같은 알맹이를 가꾸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애써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껍데기가 중시되는 문화에서 우리는 스포츠가 껍데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해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입장에서 이러한 경향을 싸잡아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이러한 현상을 적절한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개인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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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우리나라 체육교과서를 보면 각종 스포츠는 YMCA를 통해서 도입되었다는 기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왜 스포츠의 역사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야구, 배구,
농구, 보디빌딩도, 라켓볼, 소프트볼 역사에도…. 이러한 역사는 미국 YMCA와 스포츠의 특별한
결속 관계를 암시한다.

YMCA가 스포츠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한 마디로 미국 YMCA 운동과 스포츠의 관계
때문이다. 미국 YMCA는 많은 스포츠를 창안했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도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무엇 때문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스포츠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일까?”하는 의문은 남게 된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설명은 간단하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복음전략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YMCA는 청소년들을
YMCA로 끌어들여 복음을 전파하고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되었다. 미국 YMCA는 보디빌딩,
농구, 배구, 라켓볼 등을 창안했으며, 소프트볼을 재 조직화했다. 그리고 야구, 미식축구, 수영, 캠핑
등과 같은 스포츠클럽을 운영하였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YMCA 운동(YMCA Movement)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역사와 YMCA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보다 앞서 스포츠가 발달된 나라는 영국이었으며, YMCA가 탄생된 곳도 영국이었다. 영국의
윌리엄스(George Williams)는 런던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신앙심을 굳건히 하기위해
YMCA를 창립하였다. YMCA가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면서 YMCA운동의 프로그램이나 서비스
형태는 아주 다양했다. 여러 나라 및 공동체 조직에서 지역민들의 요구에 부합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러나 초기 세계 YMCA본부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스포츠를 YMCA운동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 YMCA가 ‘체육사업(physical work)’을 YMCA운동에 포함시킨 이래 19세기
말까지 미국 전역 YMCA에는 약 450여개의 체육관이 건립되었으며, 플레이그라운드운동, 산책 클럽
조직, 캠핑 운동, 체육지도자 양성, 야구․미식축구․수영보급 등과 같은 체육 사업이 펼쳐졌다. 보스턴
지회의 로버츠(R. J. Roberts)가 ‘보디빌딩’이라는 새로운 체력 증진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나
미식축구광이었던 네이스미스(James B. Naismith) 목사가 스프링필드 YMCA에서 복숭아 바구니에
공을 던지는 실험을 거쳐 농구를 창안한 일, 매사추세츠의 홀리요크YMCA(Holyoke YMCA)의 모건이
민토네트라는 게임을 창안하여 배구(volleyball)로 발전시킨 일, 코네티컷(Conneticut) 주 그린위치YMCA(Greenwich YMCA)의 소벡(Joe Sobek)이 라켓볼을 창안 한 일, YMCA 행정 간사였던 호이싱턴(Homer Hoisington)이 ‘다이아몬드 볼(diamond ball)', ‘플레이그라운드 볼(playground ball)', 키텐볼
(kittenball: 말괄량이 야구), 쉬시볼(sissyball : 여자애들 야구) 등으로 불리던 놀이를 ‘소프트볼
(softball)'로 명칭을 통일하고 재 조직화 시킨 일 등은 모두가 미국 YMCA의 스포츠 사회 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미국 YMCA를 통해 창안되거나 활성화된 스포츠는 YMCA 조직망을 통해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 농구, 배구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까닭도 이러한 역사와 직결되며, 스포츠 역사에 YMCA라는 단체가 많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강건한 기독교주의(Muscular Christianity)라는 접착제 때문이었다.
미국 복음주의 운동가들이 YMCA 체계 속에 스포츠를 수용하게 된 것은 영국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계몽사조의 영향이었다. 찰스 킹즐리가 주창한 강건한 기독교주의란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의 추구를
뜻하는 것으로 핵심 사상은 단체정신(team spirit)과 남성다움(manliness)의 함양이었다. 미국은 신교
국가였고, 일요일의 스포츠 금지를 의미하는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 전통이 강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19세기 영국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소위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스포츠 교육의 촉진제 역할을 했던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전격적으로 수용
하면서 스포츠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YMCA운동의 중심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기까지는 많은 논란이 따랐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신체적 활동’보다 복음주의적 정신활동에 무게를 둔 YMCA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체활동
프로그램의 수용에 반대했다. 신교도적 신앙에 이끌려 YMCA에 몸담게 된 북미 YMCA 지도자들은
YMCA가 단순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경쟁적인 스포츠를 장려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사조를 수용하고 각종 스포츠를 도입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많은 하층계급 청소년들은 안식일에 놀이를 금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안식일 엄수주의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YMCA가 놀이․스포츠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확대시키자 교회와 YMCA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1900년을 전후로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된 YMCA는 미국 스포츠
운동(sports Movement)의 메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YMCA는 정신(mind), 신체(body)에
 의해 지지되는 영(spirit)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YMCA 휘장을 고안했고, 스포츠 프로그램은 YMCA
운동의 주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연히 YMCA는 미국 스포츠의 요람이 되었으며, 세계
스포츠 역사 서적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체육교과서에 등장하는 YMCA를
 보는 순간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면 스포츠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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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량희 (전남대학교 강사) 

신체 개념은 哲學史(철학사)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플라톤의 신체
개념은 정신과 물질로 나누어, 정신이 우월하므로 인간의 신체는 정신보다 열등하다고 파악
하였으며 서양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발달과 함께 기독교 정신이 지배하던 중세에 이르기까지
몸을 천시하고 학대하는 풍조가 심해졌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관점이 중세를 거쳐 데카르트를
넘어오면서 정신과 신체는 더욱 이원화되고 몸에 대한 경시 풍조가 심해지는 가운데 근대 식민
정치와 산업 혁명이 만나 유래 없는 거대한 물질의 홍수를 경험하고 물질에 대한 집착이 커졌지만
상대적으로 물질의 가치 인식은 떨어져 갔다.

근대 서구에서는 풍부한 물질적 삶을 영위하면서 경험론이 등장하고 훗설의 현상학과 실존
주의가 결합한 실존적 현상학을 통해 인간의 신체를 기존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즉
딜타이의 해석학, 니체의 철학 그리고 훗설의 현상학과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신체의 개념이 재정립되고 신체는 인식주체적 존재로 취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심신일체
(心身一體)적 개념인 소매틱(Somatic) 개념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에는 신체 개념을 더욱 영적이고 혼적인 주체의 입장에 서서 본질적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신체 개념의 정립은 지금까지 인식해온 신체 차원을 확장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확장된 개념을 통해 물질 가치에 집중되어 한정된 인식 안의 신체가 갖는 부정적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반성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유연하고 차원이 높은 신체 개념은 개인적
으로나 사회적으로 보다 폭 넓은 신체 교육의 바탕이 되어 미래를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모색해
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우로보로스(Ouroboros) 신화는 生死, 주체와 객체, 질서와
혼돈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구분되는 개념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며 고대에는 몸에 대한
개념 또한 이와 같았을 것이다. 즉 몸은 인식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이며 더 나아가 인식의 내용이
몸과 함께 하였다. 따라서 고대에 인식되었던 몸에 대한 개념은 우주와 연결되는 총화(總和)된
신체 개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B.C. 600~1200년으로 추정되는 고대 베다의 이해로부터 시작해서 B.C. 600년을 전후로 나타난
우파니샤드에 제시된 고대인도 철학의 몸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역사가 투쟁과 분열로 치달아
오면서 극단적 이분법의 개념으로 점철되며 정립되어 온 신체 개념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제공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베다의 끝이라는 의미의 베단타 철학의 꽃으로서 우파니샤드는 후기
인도의 철학 사상에서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쳤으며 아트만이라는 개별적 신성을 인정하는 범아
일여(梵我一如)사상을 내포하여 각각의 개체를 모두 절대적인 존재로 여긴다. 우파니샤드의 관심은
우주적 전 세계와 인간의 내면적 자아에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근저에
존재하는 아트만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다. 따라서 이 사상을
우주적 현상과 인간의 관계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실체가 곧 우주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이뜨리아 우파니샤드 2장 2편에서 5편까지 나타난 인간의 몸 즉 신체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음식으로 이루어진 것(육신) 안에 숨으로 이루어진 아트만이 있으니 숨으로 이루어진 육신이
음식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채우고 있도다. 또한 음식으로 이루어진 육신이 사람의 형상을 한 것처럼
이 숨으로 이루어진 육신도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상을 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아트만이 숨으로 이루어진 육신 안에 있으며 그 안에 지성으로 이루어진 육신과 더 안에
영혼의 속성인 환희로 이루어진 육신이 사람 형상을 하고 채우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따이뜨리야 우파니샤드는 다섯 가지 몸이 마치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이루어져 있고
각각 그 몸들은 물질, 즉 양분으로 이루어진 몸(annamaya kosa)과 그 안에 숨으로 이루어진
몸(pranamaya  kosa), 그리고 그 안에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manomaya kosa), 더 안에 지성으로
이루어진 몸(vijnanamaya kosa),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희열 즉 영혼으로 이루어진 몸(annan
damaya kosa)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거친 에너지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세밀한 에너지로
이루어진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몸은 양분으로 이루어진 육체(肉體)만이 아니고 이 세계를
이루는 유일한 존재인 브라흐만 즉 아트만의 속성인 영혼의 성질인 희열 즉 환희가 우리 몸을
이루는 요소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렇게 고대의 본질적 신체 개념은 우주를 이루는 모든 섬세한 에너지가 집약된 신체다.


총체적인 신체(Whole-linked-body)

인간에게 있어 몸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가장 직접적인 실체이며 몸에 이상이 왔을 때는
굳건하던 정신조차도 약해지는 것을 대부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몸은 막연히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한 중요성보다는 그 실체에 있어 훨씬 중요한 자리에
있음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몸이라는 것이 의외로 물질적인 요소보다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소와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일어
났을 때 나타나는 신체 반응을 통해 대체로 경험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몸은 마음이나 정신적 상태와 직결된 것으로서 끓임 없이 변하고 달라진다. 그리고
우파니샤드에서 제시한 신체개념 또한 물질로 보였던 신체가 마음 뿐 아니라 호흡, 정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신체는 단속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합리주의의 이성보다도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발달된 의학 기구들을 통해 몸 안에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몸이 시간에 따라 질서 있게 작용하지만 가끔은 질서에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을
목격한다. 생리학적으로 몸의 세포는 한 달 이전에 존재하던 세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며
특수 기능을 하는 신경세포와 면역세포들은 스스로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변해가기도 한다. 즉
어제의 몸이 오늘의 몸과 같지 않다.

그러나 각 개체가 사라질 때까지 그 특성을 나타내듯이 한 순간의 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다. 타이트리야 우파니샤드를 비롯해 인도 철학 전반에 나타나는 신체는 각 신체들의 지엽적
특성 뿐 아니라 인간성 전체와 관련된 신체의 개념으로 그것들은 단편적으로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함께 공통으로 존재하며 삶 전체에 연결된 자양분을 섭취하고 살고 있다.

물질로 된 신체(안나마야코샤, Annamaya kosa)가 물질로 된 양분을 통해 성장하듯이 호흡으로 된
신체(프라나마야코샤, Pranamaya kosa)는 양질의 호흡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각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신체(마노마야코샤, Manomaya kosa)는 지각하고 운동하며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며 지성으로 이루어진 신체(비즈나마야코샤, Vijnanamaya kosa)는 지성적인 교류와 지성의
발전을 통해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주적 본질이며 신의 속성을 지닌
환희체(아난다마야코샤, Anandamaya kosa)도 자양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 속성 중에 종교적 성향이 있다. 루돌프 오토(Ludolf otto,  1869~1937)는 그의 저서 ‘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종교는 스스로 존재한다. 바로 우리 안에 경험 이전의 그 무엇으로!” 라고
하였으며 성스러움에 대해 후천적 경험이 구축해 놓은 구성물도 아니고, 경험 이전에 우리 안에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는 특정한 속성일 따름이라고 피력한다.

인간의 역사가 이념이나 기본적인 욕구 충족에 대한 문제보다도 종교적인 문제에 의한 잔인한
투쟁이 그 크기로 보면 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가진 환희체적 자양분이 보편성을 잃었을 때
인간의 영혼은 갈피를 잡을 길 없이 방황하며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
보아야 하며 이 시점에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신체의 평화를 위해 인간의 속성인 보편적인
영체(靈體)를 인정하는 알맞은 교육이 필요함을 느낀다.

따라서 인도 철학을 통해 나타난 신체의 개념들, 엄밀히 말하면 우주 전체의 에너지에 관련된
신체 개념을 통해 신체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신체를 새로운 용어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즉 물질과 호흡과 마음을 통한 지각활동과 정신 그리고 영적인 모든 요소를 포함하는
총체적-신체(Whole-linked-body)로서 명명(命名)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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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정효 (신도봉중학교 교사) 

김연아의 환상적인 ‘점프’에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마지막 동작이 멈춘 후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도발적인 표정은 마치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를
되묻는 듯 하지 않는가. 혹자는 시상식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더불어 게양되는 대한민국의
위상에 가슴 뿌듯해 하기도 한다. 어느새 김연아는 꿈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전령사는 그녀뿐이 아니다. 박지성과 장미란,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던 베이징올림픽의 야구선수들도 모두 그녀에 버금가는 희망의 전령사들이었다.
이들을 흔히 우리는 ‘엘리트스포츠 선수’라 부른다. 그리고 미디어는 시청자들을 흥분시킨
그들의 공적을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들이 국민에게 안겨준 꿈과 희망의 질량을
계산하면 이러한 찬사는 수사학적 미사여구나 언론의 자극적 선동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길러낸 우리 사회의 스포츠인프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얼버무린다. 말하기는 한다. WBC의 준우승 이후 돔구장의 부재가 마치 우승을 놓친 결정적인
이유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는 했다. 왜 김연아의 우승에는 열광하면서 제2의 김연아를
만들어 낼 물적 토대와 정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까. 차라리 후진적 환경을 적당히
방치함으로써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승리의 시나리오를 즐기는데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혹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의 스포츠정책이 너무 엘리트스포츠에
편중되어 있다고. 이제 체육정책의 방향은 엘리트스포츠라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즐기는 생활체육, 혹은 사회체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따끔한 질책과 비판에는 충분히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엘리트스포츠가 생활
체육과는 전혀 다른 원리적 토대를 가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경우 엘리트스포츠는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스포츠문화로서 그 한계를 가진다.

박태환의 금메달이 잠시 국민을 흥분시키는 국가적 오락이거나 실체 없는 민족주의의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김연아와 박태환, 박지성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니다. 가령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가 당시 체제 이데올로기의 선전에 커다란
몫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메달은 한국의 레슬링 문화의 중요한 성과이며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요컨대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유효기간을 갖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이나 그 문화적 내용은 역사적이고 또한 현재적이다.

스포츠는 문화의 형태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문화 외적인 것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만큼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에서 비롯할 뿐이다. 자연인이 아닌 스포츠 선수로서의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의 신체능력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운동문화를 매개로
극한까지 펼쳐지며 이를 통해 피겨스케이팅은 보다 진일보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사인
볼트의 개인적인 신체능력에 의해 100m의 기록이 갱신되듯이.

엘리트스포츠가 생활체육과 준별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엘리트스포츠가 이미 존재하는
운동문화, 즉 개별 스포츠 종목에 참여하는 개인의 뛰어난 신체능력을 통해 보다 발전된
운동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라면, 생활체육은 한 개인의 신체능력이 특정 스포츠 종목을
행함으로써 보다 발전된 신체능력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마라톤이 생활체육에서는 심폐지구력과 체중감량 등의 개인적
신체능력의 향상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엘리트스포츠로 전환하면 마라톤 자체의 질적 변화
즉 새로운 기록 작성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체육은 각기 문화적
위상을 달리 한다. 엘리트스포츠가 해당 스포츠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생활체육은
그 양적 변화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런 까닭에 생활체육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엘리트
스포츠의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트스포츠에서 필수적인 고도의 신체능력은
전문성과 체계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동호회의 양적 팽창과 ‘이용대’라는 걸출한
엘리트 선수의 배출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생활체육의 저 발전을 엘리트스포츠의 비대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끌어 올리는 정책과 인식의 전환이다. 엘리트스포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생활체육의 질을
견인한다. 아니 견인하여야 한다. 은퇴 후의 김연아와 박태환이, 혹은 그들을 롤 모델로 삼았던
엘리트 선수 출신들이 어린이와 직장인을 대상으로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을 가르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엘리트스포츠는 생활체육의 적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피드백의 고리를
어떻게만들 것인가가 향후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엘리트스포츠에 더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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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윤여탁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

스포츠 경기문화에서 비윤리적 행위의 주체는 사람이다. 스포츠 경기문화라는 생활세계 내에서
심판, 선수, 지도자, 학부모, 관중 등에 의해서 비윤리적 상황들이 연출된다.
특히, 경기지도자는 비윤리적 행위의 중심에서 윤리적 딜레마를 겪게 되는 중심주체가 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인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생활세계 내에서
무수히 많은 윤리적 판단의 기로 즉 윤리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스포츠 경기지도자들은
승패의 키를 쥐고 있는 심판의 권력으로 인해. 윤리적 갈등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심판 판정의 공정성을 주제로 한 최근의 조사들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경기지도자들이 인식하는 심판 판정의 공정성의 문제는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경기지도자들의 불만과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저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심판 권력으로 인한 경기지도자(태권도종목)의 윤리적 갈등은
5가지의 요소
로 귀결된다.

첫째, ‘심판 판정의 희생양’이 됨으로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심판 판정의 오심으로 희생양이 되는 선수의 땀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경기지도자의 길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둘째,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인해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선수들이 시합에 나가서 ‘심판 판정의 희생양’이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경기지도자는
억울한 마음과 함께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선수가 오심을 당하게 됐다는 생각으로 갈등하며
선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심판 판정을 자신의 팀과 선수에게 유리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이런 경우 팀과 선수들에게 마음속으로
죄책감까지 느끼는 갈등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셋째, ‘판정에 대한 항의 그러나 허공을 치는 메아리, 되돌아오는 화살’의 상황을 갈등한다.
경기에서 오심을 당했을 때, 심판에 대한 항의가 무의미함을 경기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아니 무의미함을 떠나 판정에 대한 항의는 역으로 버릇없는 지도자라고 낙인찍혀 되돌아오는
화살에 맞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넷째, ‘인사와 로비’의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심판의 주관적인 득점기준이 승패를 좌우하는 경기(태권도)에서 심판과의 관계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과의 관계형성은 경기지도자의
또 다른 능력이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경기지도자들은 심판에게 인사와 로비를 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팀이 인사와 로비를 안 하면 다른 팀에게
억울하게 질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때가 되면 인사와 로비를 해야 하는 갈등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수인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상황과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경기지도자, 학부모, 심판의 삼각관계 형성’의 윤리적 갈등을 겪는다.
스포츠 경기문화의 비윤리적인 문제는 학부모들에게 까지 영향을 주어 선수를 스카우트 할 때,
이제 학부모들이 먼저 경기지도자에게 심판들과 줄이 닿아 있는가? 라고 묻기도 한다고 했다.
이러한 학부모의 요구로 인해 경기지도자는 심판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을 갈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윤리(倫理, ethic)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이치(理致)” 또는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道理)”
곧 “삶의 길 또는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문화 안에서 경기지도자와
심판, 선수,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이치와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윤리적 삶에 반하는 비윤리적 양태들이 발생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심판 권력으로 인한 경기지도자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3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심판의 윤리적 강령을 철저히 감시하고 실시해야 한다.
심판은 체육인 윤리강령의 ‘제10조 권한 남용과 금품 수수 등의 방지’에 명시되어 있듯이
자신이나 특정인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부당하게 이용하여서는 안 되며,
특히 업무 수행과 경기 심판 또는 각종 회의 활동 등에서 결정권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일방을 편들거나 금품수수, 향응 및 각종 편의를 제공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며,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객관적인) 심판제도의 실행이다.
의도되지 않은 오심이 경기의 일부라는 논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의도된 오심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심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태권도 종목의 경우 전자호구와 비디오 판독 등은 확대되고 계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제도인 것이다.

셋째, 경기지도자의 신분제도 변화이다.
현재 경기지도자의 임용과 해임은 단순히 성적을 통해 결정됨으로 현 제도 하에서는 경기지도자들이
심판권력의 지배를 받을 밖에 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경기지도자들에게 안정적 신분을 보장하고 그들을 전문 스포츠교육자로 대우해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 심판 권력으로 인한 윤리적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국회에서 운동부 지도자의 처우에 관한 공청회 등 운동부 경기지도자의 처우에 관한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이슈화 되는 현상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며,
계속적으로 운동부 경기지도자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스포츠 윤리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및 양심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제도, 정책, 문화 등의 다양한 사회 윤리적 맥락을 통한 문제해결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스포츠 경기문화의 윤리성 회복을 위해 심판과 지도자가
모두 회복되고 상생할 수 있는 제도를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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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하남길(경상대학교 교수)


우리나라 체육교과서를 보면 각종 스포츠는 YMCA를 통해서 도입되었다는 기록을 자주
접하게 된다. 다른 나라의 스포츠 역사에도 YMCA가 자주 등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스포츠의 역사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야구, 배구, 농구, 보디빌딩도, 라켓볼, 소프트볼 역사에도…. 이러한 역사는 미국 YMCA와
스포츠의 특별한 결속 관계
를 암시한다.

YMCA가 스포츠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한 마디로 미국 YMCA 운동과 스포츠의 관계
때문이다. 미국 YMCA는 많은 스포츠를 창안했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도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무엇 때문에 기독교단체인 YMCA가 그토록
스포츠와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은 남게 된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설명은 간단하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복음전략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YMCA는
청소년들을 YMCA로 끌어들여 복음을 전파하고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되었다. 미국
YMCA는 보디빌딩, 농구, 배구, 라켓볼 등을 창안했으며, 소프트볼을 재 조직화했다. 그리고
야구, 미식축구, 수영, 캠핑 등과 같은 스포츠클럽을 운영하였으며, 그러한 스포츠는 YMCA
운동(YMCA Movement)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역사와 YMCA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보다 앞서 스포츠가 발달된 나라는 영국이었으며, YMCA가 탄생된 곳도 영국이었다.
영국의 윌리엄스(George Williams)는 런던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신앙심을 굳건히
하기위해 YMCA를 창립하였다. YMCA가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하면서 YMCA운동의 프로그램이나
서비스 형태는 아주 다양했다. 여러 나라 및 공동체 조직에서 지역민들의 요구에 부합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러나 초기 세계 YMCA본부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스포츠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스포츠를
YMCA운동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 YMCA가 ‘체육사업(physical work)’을 YMCA운동에 포함시킨
이래 19세기 말까지 미국 전역 YMCA에는 약 450여개의 체육관이 건립되었으며, 플레이그라운드
운동, 산책 클럽 조직, 캠핑 운동, 체육지도자 양성, 야구․미식축구․수영보급 등과 같은
체육 사업이 펼쳐졌다. 보스턴지회의 로버츠(R. J. Roberts)가 ‘보디빌딩’이라는 새로운 체력
증진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나 미식축구광이었던 네이스미스(James B. Naismith) 목사가
스프링필드 YMCA에서 복숭아 바구니에 공을 던지는 실험을 거쳐 농구를 창안한 일, 매사추세츠의
홀리요크YMCA(Holyoke YMCA)의 모건이 민토네트라는 게임을 창안하여 배구(volleyball)로
발전시킨 일, 코네티컷(Conneticut) 주 그린위치YMCA(Greenwich YMCA)의 소벡(Joe Sobek)이
라켓볼을 창안 한 일, YMCA 행정 간사였던 호이싱턴(Homer Hoisington)이 ‘다이아몬드 볼
(diamond ball)', ‘플레이그라운드 볼(playground ball)', 키텐볼(kittenball: 말괄량이 야구),
쉬시볼(sissyball : 여자애들 야구) 등으로 불리던 놀이를 ‘소프트볼(softball)'로 명칭을 통일하고
재 조직화 시킨 일 등은 모두가 미국 YMCA의 스포츠 사회 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미국 YMCA를 통해 창안되거나 활성화된 스포츠는 YMCA 조직망을 통해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 농구, 배구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까닭도
이러한 역사와 직결되며, 스포츠 역사에 YMCA라는 단체가 많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미국 YMCA와 스포츠의 결속은 강건한 기독교주의(Muscular Christianity)라는
접착제 때문
이었다. 미국 복음주의 운동가들이 YMCA 체계 속에 스포츠를 수용하게 된 것은
영국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계몽사조의 영향이었다. 찰스 킹즐리가 주창한 강건한
기독교주의란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의 추구를 뜻하는 것으로 핵심 사상은 단체정신(team spirit)과
남성다움(manliness)의 함양이었다. 미국은 신교국가였고, 일요일의 스포츠 금지를 의미하는
잉글리시 선데이(English Sunday) 전통이 강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 YMCA는 19세기 영국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소위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스포츠
교육의 촉진제 역할을 했던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전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스포츠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YMCA운동의 중심에 스포츠 프로그램을 수용하기까지는 많은 논란이 따랐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신체적 활동’보다 복음주의적 정신활동에 무게를 둔 YMCA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체활동 프로그램의 수용에 반대했다. 신교도적 신앙에 이끌려 YMCA에 몸담게 된 북미 YMCA
지도자들은 YMCA가 단순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경쟁적인 스포츠를 장려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사조를 수용하고 각종 스포츠를 도입한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많은 하층계급 청소년들은 안식일에 놀이를 금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안식일 엄수주의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YMCA가 놀이․스포츠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확대시키자 교회와 YMCA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1900년을 전후로 강건한 기독교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된 YMCA는 미국 스포츠 운동(sports Movement)의 메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YMCA는 정신(mind), 신체(body)에 의해 지지되는 영(spirit)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YMCA
휘장을 고안했고, 스포츠 프로그램은 YMCA 운동의 주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연히
YMCA는 미국 스포츠의 요람이 되었으며, 세계 스포츠 역사 서적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체육교과서에 등장하는 YMCA를 보는 순간 ‘강건한 기독교주의’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면 스포츠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인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농구를 창안한 강건한 기독교주의자 네이스미스

 

                                                  모건이 배구를 창안한 홀리요크 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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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안용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탁월성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 즉 ‘타인과 비교하여 한 개인이
최상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또는 ‘덕이 있는’, ‘선량한 의무를 다하는’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레테(aretē)의 의미를 덕, 탁월성이라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철학사전에서의 탁월성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어 aretē는 “‘남성적인 힘’을 뜻하는 라틴어 virtus를 의미한다. 이 말은 ‘남자’ 또는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 vir에서 유래하였다”(이정우 역, 2006: 71). 또한 aretē는 “자기 자신을 교육시켜
인간적으로 탁월한 인격으로 만들려는 이상(임홍빈, 김종국, 소병철 역)”이라고 정의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4가지의 aretē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고
주장하였으며, 매킨타이어는 aretē란 “훌륭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가 발휘하는 것(김민철 역, 2004)”이라고 정의하였다.
 
고대그리스 신화에서 탁월성의 개념은 호메로스(Homeros)가 지은 서사시인 『일리아드(Iliad)와
오딧세이(Odyssey)』에서 헤라클레스의 탁월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헤라클레스(Hercules)는
네메아(Nemea)의 사자를 맞아 맨손으로 목을 졸라 죽이고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를 곤봉으로 쳐서 떨어뜨리고 불사의 머리를 큰 바위에 파묻었다”, “헤라클레스는 영웅 중에
영웅이고 거대한 힘을 지닌 사람이며, 죽음 이후 신격화되어 영광스런 올림피아 신들 중에 한 명이
되었다” 등을 볼 때,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신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인간이 해냄으로서 ‘탁월성’의
개념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지적인 aretē’를 설명하였는데, 즉 “지적인
아레테(aretē)는 교육의 결과이며, 이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Ⅰ권에서 신체의 아레테(aretē)는 구체적으로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으로 5가지를 명시하였으며, 이것은 자연적인 신체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신체의 아레테(aretē)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인간의 탁월함, 즉 아레테(aretē)는 어떤 것에 능함, 뛰어남, 훌륭함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탁월함의 보상으로서 획득할 수 있는 ‘올림픽 메달’과 ‘노벨상’에
대하여 그 의미와 가치를 상기시켜 보자는 것이다.
 ‘올림픽 메달’은 건강, 미, 강함, 크기, 운동 경기에서의 능력 등을 상대와 겨루어 획득할 수 있는
신체의 아레테(aretē)로써, 운동선수들에게는 1896년 그리스 아테네로부터 시작되어 4년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 가장 받고 싶은 상일 것이다.

 지난해 한국 야구는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온 국민들은 한국 야구의 저력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수영 400m에서 박태환 선수가 경쟁자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하자
국민들은 우리나라 수영에서의 첫 번째 올림픽 메달을 축하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금메달 수여자에게 아낌없는 칭찬과 박수를 보내며 환호한다. 그러나 메달리스트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반면에,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그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전년도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매년 수여하는 상이다. 즉 노벨상은
문학, 평화, 물리학, 의학, 화학분야의 우수성을 평가해 수여되는 국제적인 상으로써 그 명성과
권위에서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벨상은 인류사회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개인의 아레테를
높이 평가받아, 아레테(aretē)의 결과로서 받을 수 있는 상이다.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의 ‘평화상’
이외에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아직 한 개도 받은 바가 없다. 1901년부터 시작된 노벨상은 이제
한국인들에 염원이 되고 있다. 
 
물론 ‘올림픽의 메달’과 ‘노벨상’의 가치를 단순히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탁월함에
대해 세계 최고의 보상이라 할 수 있는 신체의 아레테인 ‘올림픽 메달’과 지적인 아레테인 ‘노벨상’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즉 서양의 심신이원론을 바탕으로 하는 관념론적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신체의 아레테는 지적으로 높은 가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과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정신적 우위의 잘못된 사상으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신체의 아레테인
‘올림픽 메달’과 지적 아레테인 ‘노벨상’의 격이 횡적 개념이 아닌 종적 개념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탁월성을 인정하는 신체의 아레테인 ‘올림픽 메달’과 지적 아레테인 ‘노벨상’ 모두 세계최고의
상으로 인정하여 그들에게 박수와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전자가 신체적 탁월성이기 때문에
지적으로 낮게 보는 사회의 인식이 사라져야 할 것이고, 후자가 지적 탁월성이기 때문에 신체보다는
정신우위로 보는 사회 인식 또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신체의 탁월성과 지적인 탁월성을 상하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올림픽 메달과
노벨상 모두는 인간의 잠재성을 개발하여 열정과 노력, 인류에 대한 공헌, 그리고 세계 최고의
상(賞)이라는 희소성의 가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당당히 신체의 탁월함과 지적 탁월함을
발휘한 수상자들에게 우리는 동등하게 아낌없는 박수와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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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김홍식 (한국체육대학교 사회체육학부 조교수)



1. 서구 기원의 현대스포츠(modern sport)는 현대 신체문화의 주조(主潮)를 이루고 있다.
서구 기원의 현대스포츠가 주조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 전통의 신체문화는 두 가지 양상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하나는 쇠퇴 또는 소멸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화된 경기로의 변모이다.
태권도처럼 서구 기원의 현대스포츠와 같은 형식으로 변모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통의 신체문화, 신체기법은 책 속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우리 일상이 서구화된 또 하나의 상징적 사례이다.

우리 신체문화의 서구 스포츠화는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같은
고통과 불쾌를 수반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의 전통적 신체문화가 오랜 동안
우리의 삶과 호흡을 같이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잘 어울릴 가능성도 크다
.

따라서 우리 전통의 신체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자연스럽고 당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구기원의 현대스포츠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 삶이 상당 부분 서구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
 

2. 서구기원의 현대스포츠는 그리스적 전통(Hellenism)과 기독교적 전통(Hebraism)
교차하면서 나타난 역사적 산물
이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적 전통은 여러모로 음미할 만하다.
특히 서구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재해석되고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어 온 그리스 신화가 그러하다.

아틀라스(Atlas)는 제우스에게 저항했던 거인(Titan) 족의 일원이다.
거인 족의 패배와 함께 아틀라스는 하늘/지구를 짊어지는 벌을 받는다.
아틀라스의 힘이 엄청나게 세긴 했나 보다. 그 후 아틀라스는 ‘힘센’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
1
번 척추는 척추 중 유일하게 고유 명이 있는 데, 그 이름이 바로 ‘아틀라스’다
.
지구와 같은 두개골을 떠받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외에도 아틀라스는 세계 지도를
지칭하기도 한다.

아킬레스(Achilles)는 호머(Homeros)의 대서사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아킬레스는 ‘아킬레스건’에서 알 수 있듯이 해부학의 용어이기도 하다
.
또한 “나의 아킬레스건은 정에 약하다는 것이다”와 같은 표현처럼 치명적인 약점,
또는 유일한 약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오디세우스(Odysseus)가 겪은 고난의 귀향 여정이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의미하는 고유 명사인 오디세이아는 ‘여정(旅程)’이라는 의미의 일반 명사로
사용된다. 클래식 음악 전문 방송 프로그램 “클래식 오디세이”가 있듯이 그 말은 ‘특별한 여정’이라는
문학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틀라스


3. 그리스 기원의 많은 용어들이 역사, 과학, 문학 등의 맥락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사용되고 있다. 용어의 그리스적 기원, 전통에 있어 스포츠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올림픽경기대회(Modern Olympics)는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명칭을 차용하였다.
스포츠역사학자 거트만(Guttmann, Allen)의 지적처럼 현재의 올림픽이 고대의 제전경기에 비하여 세속화되었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체조로 번역되는 짐나스틱스(gymnastics)가 ‘나체의’라는 의미의 짐노스(gymnos)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은 통설이다. 신체의 교육(gymnastikē)이 이루어진 짐나지움(gymnasium) 긴 회랑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서 현재 체육관으로 번역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경주(競走, stadion)가 벌어진 곳이 스타디움(stadium)이고, 따라서 육상경기 종목이 주로 이루어지는 현대의 종합경기장이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올림피아의 스타지온 경기장                          
올림피아의 짐나지움


현대 레슬링의 경기 종목에는 그레코로만형(Greco-Roman)과 자유형(Free style)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두 방식의 차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어의로 보면 그레코로만형
(Greco-Roman)은 그리스-로마식일 텐데, ‘고전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또한 자유형은, 고전형과 대비하여 ‘현대형’으로 부를 수도 있겠다.

사이클경기장은 벨로드롬(velodrome)의 번한(飜韓)이다. 벨로(velo)라는 말이 새(bird)를
의미하는데 벨로시티(velocity)가 속도를 의미하는 물리학 용어로 사용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동물 중에서 새가 가장 빠르니 벨로시티는 그렇듯 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벨로드롬은 ‘속도(경쟁)장’ 쯤이 되지 않을까.

                                                                 신화 속의 레슬링

이렇듯 그리스적 전통은 스포츠 영역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에 박혀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원인의 핵심에는 고대의 로마제국과
근대의 서구열강이 자리하고 있다. 고대의 로마인은 그리스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을
융합시켜
유럽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고 라틴어(Latin)로 표현, 전파시켰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근대의 서구열강은 식민통치를 통하여 그 문화를 세계로 확산시켰다.

로마제국의 멸망에 따라 라틴어는 일상에서 사라졌지만 문예 활동의 언어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신체활동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의 ‘키네지올로지(kinesiology)’는 우리의 ‘체육학’ 쯤 될 것인데, 키네시스(kinesis=movement)와 로지(logy=science)의 합성어이다.
체육학의 또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는 킨앤트로폴로지(kinanthropology) 역시 움직임(kinesis), 인간(anthropo), 학문(logy)의 합성이다. 최근에 새로이 등장하는 용어조차 그리스어, 라틴어의 차용인 셈이다.


4.
위와 같은 경향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자로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경향과 비슷하다.
신체(身體), 교육(敎育), 체육(體育), 운동(運動), 경기(競技), 유희(遊戱) 등과 같이 한자로 만든 용어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한중일 삼국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동양 삼국의 경우 로마제국과 견줄 수 있는 한()나라가 있었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의 일상, 체육 및 스포츠 영역의 실천과 연구에서 사용되고 있는 많은 용어들이 서구에서
유래하고 있다. 긴장을 일으키는 두 가지의 의식이 등장한다. 하나는 우리의 신체 문화 전반이 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점령되었다는 불쾌감과 함께 우리 고유, 전통의 신체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일상 전반이 서구화된 바와 같이 신체 문화 역시 그러하며, 따라서 그 추세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는 의식이다.

어떤 의식, 어떤 방향이 합당할까? 결론은 누구나 말할 수 있듯이, 절충 또는 융합일 것이다.
극단은 명쾌할 수 있지만 제한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국수적(國粹的) 태도나 예속적(隸屬的) 태도
모두 한계가 있다. 우리의 현재 삶을 직시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길로 이끌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 문화의 기축인 그리스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신체 문화 현실을 직시하고 반성하는 데 있어 유효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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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경화 (용인대학교 농구감독)




 
인간의 본능은 행복을 추구함에 있고, 스포츠를 행함은 쾌를 추구하기 위한 행위이다.
쾌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에 따른 자연적 현상이며, 신체적 안정을 지키려는 원초적 욕구의 시작에서
비롯되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욕구를 성취함으로써 개인의 정서나 취미에 따라 쾌를 얻게 된다.

이러한 쾌를 통한 즐거움, 즉 쾌락은 좋은 것, 만족한 것 등으로 바로 행복함의 속성들이다.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이 기술을 터득하고 발휘될 때 느끼는 심리적인 상태가 쾌일 것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신체의 동작과 정신적 의지가 일치될 때 만족하게 되는 것
이다.

스포츠는 근원적 쾌의 가장 훌륭한 도구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신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욕망 중에
하나이며, 그 욕망이 이루어졌을 때 진정한 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경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자신의 내면의 모든 의지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경기를 수행함으로써 관중을 의식하고 관중에게 자신의 기술 수준과 능력을 선보이며
평가받게 될 때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행한 즐거움인 쾌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수들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만족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고된 훈련의 계속적인 반복은 동작수행의 리듬과 타이밍을 정교하게 익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열정이 더하게 될 때, 경기가 진행함에 따라 생동감이 흐르고
선수와 관중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스포츠에서 미추에 관한 문제를 살펴볼 때, 승자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기기 위해 전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쓰러지는 많은 선수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때,
그 모습이 아름답고 절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혹독한 훈련의 과정에서 무너지는 이들이 있고,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 싸움에서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 인고의 과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들 또한
스포츠의 소중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공교롭게도 승리자에게는 월계관이 드리우지만 패배하는 자에게는 냉대만이 돌아올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스포츠의 현실이며, 스포츠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위축되는
한계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경기에서 거듭되는 패자의 패배가 더욱 승리를 갈망하고,
그 결과가 비록 또 다시 패배로 나타날 때에도 아름다운 생기를 엿볼 때가 있다.
패자가 승리하기를 갈망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빛이 날 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행하는 상대로서 그 존재의 의미는 아름다운 것이 되기도 한다.
패자는 승자와 견주어 볼 때, 인간의 생리적인 잠재능력을 따라가지 못할지라도
스포츠 상황에서 성실과 근면, 하면 된다는 스포츠의 기본정신에 생명감을 불어넣어주고,
결국 쾌를 지향하는 자극제
가 된다.



스포츠에서 패자는 승자와 필연적 관계이며, 다수의 패자가 제일의 승자를 지향함으로서
승리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패배는 승리를 향한 진정한 훈련이고, 그러므로 적극적인 패배의 결과는 승리에로의 접근을 지향한다.

미적 쾌 - 아름다운 것이 주는 쾌감은 언제나 자유로운 자기 활동의 감정을 주지만
추한 것이 주는 불쾌감은 자기 충돌의 감정
을 준다.
운동선수들의 미적 경험은 반복되는 훈련과 연습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밀한 감각의 경험에서
경기 중반에 발현되는 순간적인 동작의 일체감과 상대성을 고려한 섬세한 동작이 이루어질 때
쾌가 동반되며, 이것이 미적 경험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성을 지향하는 스포츠 행위는 경쟁의 결과로써 승부를 가름하지만,
승리가 유일한 쾌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박빙으로 경쟁하는 가운데서 즐거움의 크기가 배가 되고, 추가 미의 범위 안에 속하듯이
쾌·불쾌 또한 공존하는 아름다움의 굴레인 것이다.

윤리적 쾌 - 모든 즐거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즐거움도 있으며,
괴로움 중에는 좋은 괴로움
도 있다.
훈련할 때 느끼는 괴로움은 분명 육체적 고통을 이겨야 하는 괴로움이다.
목적의식이 분명하면 할수록 고통은 쾌의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선수들은 부단히 훈련과 연습을 통해 체력과 기술의 성장을 위해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의 목표에 도달하려는 것이 쾌의 감정일 것이다.

이러한 쾌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의 도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스포츠이며, 쾌이며, 자아를 향한
카타르시스의 발견이 된다.
훌륭한 선수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허다한 절제를 통하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고 없음으로 인하여 그 결과를 대변한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의 즐거움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고통을 쾌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경쟁구도가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오늘날,
선수들은 지속되는 반복연습과 지루한 과정에서도 숨겨진 쾌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획득을 위한 수양이 살을 에이는 듯이 고통을 수반하고 참을 수 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해도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쾌감을 스스로 발견하고, 스포츠의 행함 그 자체 속에서
쾌의 맛을 터득하는 선수가 되기를 희망한다.

스포츠의 속성이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로서 쾌를 지향하게 할 필요가 있다.
분명 고통도 불쾌도 희열도 쾌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인간의 감성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살피는 것이
진정 스포츠가 지향하는 쾌를 추구
하고자 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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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학준 (한림대학교 연구조교수)

 
우리말에 맛과 멋이 있다.
이 말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이다.
보통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은 의식주이다. 쉬운 말로 먹고 사는 일이다.
그렇다고 먹고 사는 일에서 품위를 생략할 수 없다. 의식주의 품위는 맛과 멋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맛은 먹는 것의 최고 가치이고, 멋은 입는 것과 거주하는 곳의 최고 가치이다.
우리 일상은 맛과 멋으로 채워져 있어서 그 만큼 맛과 멋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이 순간에서도 사람들은 맛과 멋을 찾는다.

사람들은 맛있는 집을 찾는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맛있기 때문이다.
맛을 위해 사람들은 긴 줄을 서도 짜증내지 않고 기다린다.

식도락가들이 맛집을 찾아서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만큼 맛있기 때문이다.
꿀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과 글로 표현을 해도 꿀맛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일도 다양한 것처럼 다양한 맛이 있다.
살구의 맛, 사과의 맛, 수박의 맛 등 다양하다. 우리는 계절에 따라서 다양한 과일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럼 스포츠의 맛을 찾아보자.

스포츠의 맛

스포츠의 맛은 하는 즐거움
이다.
필자도 한 때 농구에 미쳐 농구대에 이렇게 써 놓았다.
 “그 맛은 누가 알리요!”
과연 스포츠의 맛은 누가 알 수 있을까?
바로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체험의 즐거움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이다.
스포츠와 내가 하나 되는 물아일치의 경지이다.

스포츠의 맛은 과일의 맛처럼 다양하다.
여름철 물위를 가로지로며 느끼는 수상스키의 맛,
겨울철 하얀 설원위에서 체험하는 스키의 맛은 색 다른 차원의 맛이다.
스포츠의 종목이 다양한 만큼 스포츠의 맛 또한 다양하다.

농구의 맛
선수가 하늘 높이 솟구쳐 내려오면서 3미터 5센티의 링 위에서 공을 내려찍는
덩크슛에 있다. 그 중에서도 슬램덩크는 덩크슛 중에 백미이다.
배구의 맛은 3미터 공격라인 뒤에서 후미 선수가 점프를 하여 하늘 높이 솟아 오른 공을 도끼로
장작을 패듯이 내려 찍을 때의 맛과 그 공이 마루에 부딪혀 솟구칠 때의 맛이다.
그 시원함은 통쾌, 상쾌, 유쾌하다.
핸드볼의 맛은 6미터 공격라인 밖에서 이중 점프를 해서 공중에서 공을 잡아 체공시간을 이용해
멋진 스카이 슛을 날릴 때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골프의 맛은 홀인원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스포츠의 맛이다. 


스포츠의 멋

스포츠의 멋은 보는 즐거
이다.
스포츠의 맛을 체험한 사람의 몸짓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일종의 보는 스포츠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동작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고 깨끗한 동작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다.
동작이 너무 과장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동작 속에서 발견되는 즐거움이다.

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펼치는 수영의 멋은 어느 특정한 개인의 멋이 아니다.
보는 그대로 드러나는 멋이다.

또한 반칙이 없는 신사적인 행위에서도 스포츠의 멋은 드러난다. 

스카이다이빙의 멋
은 하늘 높이에서 다양한 모습과 멋진 수를 놓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이빙의 멋은 다이빙 선수가 3미터 높이에서 뛰어 내리면서 펼치는 몸동작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입수할 때의 모습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싱크로나이즈의 멋은 선수들이 물에서 조화와 균형을 연출하는 모습에서 멋을 발견한다.
장대높이뛰기의 멋은 선수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바를 넘을 때와 새처럼 하강하는 동작에서 볼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의 멋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날에 의존해서 자신의 생각을 몸으로 표현해내는
동작에서
나타난다.  

스포츠 속으로

스포츠의 맛과 멋은 하이다.
단지 하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의 차이일 뿐이다.
스포츠의 맛과 멋은 스포츠를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말과 글로 아무리 표현해도 도무지 알 수 없다.
하거나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스포츠의 맛과 멋이다.
사람들은 그 맛과 멋에 빠져든다. 그 맛과 멋은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주인이다.

이제 스포츠 속으로 들어가서 온몸으로 맛과 멋을 경험해 보자.
하거나 보는 사람만이 그 맛과 멋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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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효 (신도봉중학교 교사)




 

인간의 신체능력이 다른 동물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다양한 형태와 창조성을 갖는 이유는
스스로의 움직임을 대상화, 혹은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체조의 안마 운동을 춤으로 전이한 비보이(B-Boy)의 현란한 동작 등은
인간이 갖는 신체능력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처럼 특정 운동형태가 다른 운동으로 전이되는 까닭은 인간만이 갖는 직립자세와
관절의 유연성, 그리고 피부의 전 표면이 감각으로 작용하는데서 연유한다.

 
게렌(Arnold Gehlen)은 인간이 보유한 운동능력의 다양성을 해부학적으로 파악해,
몸의 어느 부위든 만질 수 있는 관절의 가동범위와 함께 두부(頭部)와 선골부(仙骨剖)의
운동성으로부터 운동다양성의 근거를 찾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우 실제로 어느 동작을 행하기 전에 미리 머리 속에서 그려 볼 수 있는
‘운동이미지’를 가능하게 만드는데, 인간의 풍부한 운동가능성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게렌은 특정 동작을 머리 속에서 형성하고 상징화 하는 능력을 운동지(運動知, Bewegungsintelligenz)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스포츠와 같은 고도로 복잡한 운동에서 숙달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상징적 운동(symbolische Bewegungen)으로 개념화 하면서 여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연습과정에서의 운동이미지가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운동이미지는 특정 종목의 선수가 몸에 익혀야 할 운동의 장면, 혹은 동작을
미리 설정할 수 있게 만들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운동 경험을 저장
하는 창고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포츠행위의 본질적 의미도 여기에 있다.

 
또한 운동지는 동작을 미리 그려보는 이미지의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운동문화의 전수와 새로운 운동문화의 개발을 가능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림과 글로 설명된 골프의 스윙 동작을 몸으로 재현하거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신체기법이 편찬 가능한 이유도 이러한 운동지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단순히 몸의 대근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반복된 동작이 아니라
대뇌의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지능이 뛰어난 아이가 운동기능을 빨리 습득하는 까닭도 머리 속에서의 표상공간(Vorstellungsraum)에서
해당 운동을 시험, 반복해 보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체기능으로서의 운동이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표상공간(表象空間)에서
조작할 수 있는 심볼(symbol)로 변환될 수 있음을 의미
한다.

 
심볼로 변환된 운동성이란 쉽게 말해 모든 스포츠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운동형식(movement form)
,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폼을 가리킨다.
가령, 피겨스케이팅의 ‘트리플악셀’, 축구의 ‘트래핑’, 야구의 ‘번트’ 등등 각각의 스포츠에는
그 스포츠 고유의 운동형식을 반드시 가지게 되며 이 운동형식의 탁월성이
곧 승패 혹은 순위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신체기능으로서의 운동이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표상공간에서 조작할 수 있는
심볼로 변환되는 과정은 스포츠가 문화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체조에 있어서 철봉의 ‘차오르기’나 매트운동의 ‘앞구르기’, ‘뒤구르기’ 등은
원래 신체기능의 일부였지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는 그 기능이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기표(記表)가 되어야 한다.

운동지식이란 이 기표의 총체를 말한다. 기표로서의 운동형식은 운동 형태를 구성하도록
법칙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운동형식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수의운동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예컨대 우사인 볼트가 세운 9.58초의 100m 세계 신기록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이자
운동지식이지만 그것이 값진 이유는 인간이 갖는 운동 가능성의 극한을 보여준 상징성과
잠재적인 신체의 아레테(arete)가 현실화 된 가장 첨예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자체는 일상생활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의 신체능력의 가능성은 끊임없이 넓혀지는 것이다.

이처럼 스포츠는 신체의 아레테를 발휘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술을 개량해 나가며
문화로 축적되어 부단한 전승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상징적 운동형식으로서의 스포츠는 인간이 신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표현되어질 수밖에 없는 문화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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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미숙(성신여자대학교 스포츠레져학과 교수)


 
한국의 자부심이 되고 있는 김연아,
이제는 우리들만의 꿈의 요정이기를 넘어 세계의 요정이 되고 있는 그녀,
은반 위에 엉덩방아를 찧던 어린 소녀에서 온 국민의 애인으로 자리한 그녀,
무엇이 그녀를 우리의 마음속에 두고 설레게 하는 것일까?

때론 눈을 치켜 떠서 섬뜩한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론 눈을 지그시 감고 움직여 우리를 긴 여울 속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녀가 은반 위에서 느끼는 사랑과 복수는 그대로 우리의 사랑과 복수가 된다.
그녀의 몸짓과 표정만이 아니다. 그녀가 사용한 배경 음악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곡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온 국민이 ‘죽음의 무도’를 모르지 않는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은 개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움직이고,
온 국민의 시선이 움직이고, 나아가 세계가 움직
인다.
피겨계의 대모 소냐 비앙게티는 몇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예술적 감동을 느끼게 해준 김연아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고 한다. 가히 걸어 다니는 하나의 문화이며, 살아있는 문화 아이콘이다. 

외국의 스포츠 스타가 이러한 상황을 연출한 경우는 있었지만,
일찍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던 현상 중의 하나다. 은반은 우리에게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부유한 나라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신체적 조건이나 기술이 따라갈 수 없어 우리는 감히 넘보지 못했던
그 영역은, 그러나 김연아라는 한 여인에 의해 새로운 우리의 영역이 되었다.
그것도 온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오늘의 그녀를 만들게 하였는가?

한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체 구조상 빙상, 수영 등의 영역은 정복이 먼 영역으로 생각된 적도 있다.
그러나 김연아는 오히려 다른 외국의 선수들이 모델로 삼을 정도의 신체적 조건을 구비했다.

늘씬한 하체에 조그만 얼굴, 가냘픈 몸매에 서양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긴 눈매! 항상 웃는 얼굴,
자신감 있는 표현력, 배경 음악과 하나가 되는 그녀의 감성,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조화로운 몸매!

그러나 그것만이 그녀를 우리의 우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요즘같이 성형 미인들이 넘쳐나는 상황에 조각같은 미인들도 많고, 외형적으로 갖추어진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과 무엇인가 다르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녀의 연습 장면을 보라.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선다.
심지어는 완벽한 트리플 럿츠 점프를 위해 아예 넘어지는 것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켜 나간다.
그녀가 가는 것은 형극의 길일지라도 하나의 새로운 길이 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온 국민이 침울하고 희망이 없을 때,
김연아의 생명력 가득한 몸짓은 희망이요 빛이었다.
그것도 불모지나 다름없는 은반 위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일구어낸 새로운 기록들은
온 국민에게 하나의 청량제였다.

그녀는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것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도전하는 그녀가 아름답다.
그녀의 도전은 바로 우리 국민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200점이 넘는 최초의 기록과 함께 미셀 콴과의 공연은 새로운 피겨 여왕을 맞기 위한 행사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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